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JO 지나친 조각들 Aug 17. 2020

내 몸뚱이를 너무 믿는다

[프랑스 척척석사 생존기] 프랑스에서 기차 타고 이사합니다 (2)

'캐리어 하나에 백팩 하나니까 할만하겠지. 못 할 건 또 뭐 있어.'


5개월 동안 캠퍼스에서 있다 보니까 현실 감각이 무뎌졌었다. 새로운 출발이라는 생각에 들떴거나. 내 몸뚱이에 대한 믿음이 너무 컸거나. 



주기적으로 몸이 고생하는 판단을 해왔다. 10만 원 더 싸다는 이유로 서울-파리 구간을 경유 포함 30시간 비행으로 온다던가. 건강한 몸 상태로는 괜찮았겠지만, 장염이 낫질 않은 상태로 30시간 비행은 롤러코스터를 계속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학교에서 알프스로 스키캠프 간다고 해서 신청했더니 15시간 버스를 타고 간다거나. 스키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써야겠다.


내가 사는 kerlann 캠퍼스에서 파리로 가는 기차를 타려면 rennes 역으로 가야 한다. kerlann에서 rennes까지 평일엔 기차 타고 9분 거리인데, 주말엔 기차가 없다. 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다. 다만 시간이 5배나 더 걸릴 뿐이다.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rennes역까지 가는 데 1시간 잡고 가면 된다. 터질듯한 29인치 캐리어와 돌덩이보다 무건 백팩을 보자마자 기차 시간부터 확인했다. 저거 짊어지고 가다간 파리 가는 기차 타기 전에 내팽겨 칠 것 같았다. 1시간 반 기차 타고 파리 가면 또 다른 여정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별거 없다. 몽파르나스역 앞에서 58번 버스를 타고, T3a트램을 타고, 183번 버스만 타면 도착이다. 지하철 6호선, 7호선 타고 15분 걷는 여정도 있지만 파리 지하철을 캐리어와 함께 한다는 건 내가 욕을 얼마큼 내뱉을 수 있나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작년에 이사할 때 온몸으로 느꼈다.



일요일에 급하게 친구에게 SOS를 보냈다. 월요일만 재워달라고. 주말에 파리로 놀러 오라고 재밌을 거라고 꼬시는 말에 짐 싸고 쉴 꺼라며 단호히 NO를 보낸 지 이틀 만이다. 참 친구다. 레지던스에게 연락이 오지 않는 시간 동안 온갖 생각이 내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었다. 연락이 오지 않으면 친구 집에 캐리어 하나 맡겨놓고 24인치짜리로 옮겨야 하나. 짐을 다 풀어놓고 빈 캐리어를 들고 다시 와야겠다. 바로 오지 말고 2일 동안 파리에 있을까. 무작정 레지던스로 찾아갈까. 담당자가 휴가 갔나. 사수처럼 3주 동안 갔으면 어쩌지. 세포 분열하는 생각들을 부여잡은 채로 눈을 붙였다.



오후 4시에 플랫폼에서 파리행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띠링.


- Bonjour. 내일, 9시 반?


오 예스. 드디어 입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플랫폼에서 온몸으로 춤추고 싶은 나를 붙잡았다. 9시 반이면 출근 시간이랑 겹칠까 봐 10시 반 가능하냐고 했지만 안 된대서 10시로 바꿨다. 9시 반까지 레지던스에 갈 것이지만 30분이 내게 주는 심적인 여유는 컸다. 걱정과 근심으로 하루를 채우는 줄 알았는데 행복한 마음이 차올랐다. 몸은 지치는데 긴장해서 말린 오징어 같은 상태였는데, 콘푸로스트 호랑이가 되었다.



행복감은 2시간을 채 지나지 못했다. 친구랑 chatelet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잠시 잊고 있었다. 29인치 캐리어를 끌고 어깨를 땅으로 끌어내리는 백팩을 메고 지하철을 탄다는 걸. 몽파르나스역에서 4호선을 타러 가는 길에는 뭐 이리 계단이 많은지. 샤뜰레역, 4호선에서 11호선으로 갈아타는 길에 있는 계단들은 나를 향해 '봤지. 인생은 쉽지 않아.’ 라며 내가 얼마나 욕을 잘 뱉는지 깨닫게 해 주었다.



19구 17층에 사는 친구는 4명 다른 하우스메이트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뭐 먹고 싶냐는 말에 피자 배달을 외쳤다. Kerlann은 우버 이츠도 맥딜리버리도 닿지 않는 청정지역이기에. 각종 치즈, 토마토, 바질이 올려진 화덕 피자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며 행복감을 만끽했다. 초록 트램, 주황 트램,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을 가야 하는 건 내일의 내가 알아서 잘하겠지.



다음 날 오후 4시 기차를 취소하지 않았다. 아침 10시에 입주하고, 청소하고, 장보고, 짐 풀고, 백팩만 메고 다시 역으로 가면 된다는 생각에.


오늘도 내 몸뚱이를 너무 믿는다.

    




[프랑스 척척석사 생존기]

https://brunch.co.kr/magazine/chuckchuck


*이전 글 :

https://brunch.co.kr/@jijo/85


매거진의 이전글 이럴 계획은 아니었는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