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년생 나무이고 관리가 그렇게 까다롭지 않다. 때때로 물을 주기만 하면 실내에서는 사시사철 잘 생긴 푸른 잎을 보여준다. 집안에 한 그루 있으면 초록초록한 풍경 하나가 인테리어를 완성한다.
특별히 손이 가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잘 있다 보니 물을 주거나 거름을 보충하거나 분갈이를 해야 한다는 걸 까먹고 만다.
한때 잎이 무성했던 우리집 벤자민도 우리 가족의 무심한 방치 속에 잎을 하나둘 떨구기 시작했다. 저러다 또 새 잎을 틔우겠지 싶어 그대로 두었더니 무섭게 초록색 열매를 맺더니 그 열매가 노랗게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닥으로 떨어트리고는 잎마저 다 잃고 말았다. 죽음을 직감한 생명이 마지막으로 후손을 남기고 비장하게 최후를 맞이한 것 같았다.
무성한 푸른 잎 다 떨어지고 남은 건 말라 비틀어진 앙상한 가지. 도무지 소생할 희망이 전혀 없어 보였다. 대략 우리 집에서 10년은 넘게 보낸 것 같은데 이제 드디더 이별을 할 때가 온 건가 싶었다. 오래 쓴 정든 물건과 이별할 때도 마음이 짠할 때가 있다. 무생물도 그러할진대 움직이지는 않지만 생명이 있는 식물을 그렇게 떠나보내야 하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조금 더 신경 써서 관리를 해 줄 걸 하는 후회는 이미 늦었다. 마음은 아팠지만 이제 죽은 저 나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가 중요했다.
차에 실을 수 있는 크기로 잘라서 시골에다 갖다 버리든지 땔깜으로 쓰면 될 일이었다. 가위로 말라 비틀어진 가지를 먼저 잘라내는데 아니나 다를까 생기 하나 없이 건조했다. 조금 더 기둥이 가까운 쪽으로 잘라 나가는데 자른 단면에서 하얀 수액이 금방 맺히더니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어? 아직 살았나? 혹시 얘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분갈이를 거의 안 했는데 양분이 부족했을까? 아니면 물을 생각보다 자주 줘서 뿌리가 썩어가고 있어서 그랬던 걸까?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터라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거름을 새로 사서 분갈이를 했다. 깨어나지 않으면 않는 대로 처분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기다렸다. 열흘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그럼 그렇지. 그래 이제 정말 보내줘야 하는구나. 미안하다 벤자민아. 사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에선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자라고 있었고 퇴근할 때마다 회색 가지에 아주 작은 초록색이라도 있는지 살펴 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아주아주 작은 점 같은 것이 하나 봉긋 솟아나기 시작했다. 초록색이었다. 어? 살아나나? 그렇게 시작된 초록점이 물결(!)이 되어 가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점 하나였던 것이 이제는 이제는 제법 잎의 모양을 갖춘 것도 생기고 그 잎이 쭉쭉 밀고 나와서 가지가 될 법한 녀석도 생겨났다. 다른 곳에서는 또다른 점이 막 생겨나고 있었다.
요즘은 퇴근하자마자 벤자민이 있는 베란다로 가서 안부를 묻고 기특하다고 말해준다. 세상에 이런 기특하고 고마운 일이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죽은 줄 알았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다니. 저 작고 여린 잎이 희망과 기쁨을 주게 될 줄은 몰랐다. 식물도 기특해지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은 몸의 신체적 기능이 쇠퇴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작은 나뭇잎 하나로도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삶의 의미를 더 잘 새길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