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못난인형 Jan 07. 2020

참을 수 없는 그것


1970년도 양구군 O면 O리 겨우 한 반뿐이던 초등학교 50여 명의 친구 가운데도 똑똑하고 잘난 아이가 더러 있었다. 그 시절 담임 선생님이 "너희들 가운데 훗날 사징이 되는 아이가 있고 거지가 되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신 말씀일 터이지만 작은 것만 기억하는 내 머리에 생생히 저장되어 있다. 반 백 살 넘게 살다 보니 선생님 말씀대로 중소기업 사장, 은행 간부, 초등학교 교장, 한전 간부, 정부 투자기관 중견 간부, 대학교수까지 잘난 놈들이 정말 많았다. 그때는 다들 노란 콧물 흘리며 머리에는 이가 들끓던 나와 비슷한 아이였는데 말이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유독 또래가  많았고 나보다 잘난 아이도 그만큼 많았다(밑으로는 더 많았지만) 초등학교 재학 시절, 너무도 잘나서 부모의 어깨가 으쓱 올라갔던 두 명의 친구가 유독 기억나는 것은 그들의 부모님께서 자식 자랑이 너무 심해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고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한 아이는 우리 앞집 살던 장 씨 아저씨의 아들로, 노름꾼인 우리 아버지와 다르게 음주 가무를 멀리하고 오직 농사일밖에 몰랐던 근면했던 아버지였고 친구는 아버지만큼이나 성실했다. 학교에 다녀오면 가방 내려놓고 부모님 일을 돕기에 바빴고 공부도 열심이었다. 배짱이 아버지를 보고 자란 나는 학교고 집에서고 오직 노는 것 밖에 몰랐는데 말이다.  동네에서 대량의 수박 하우스를 가장 먼저 하신 분도 장 씨 아저씨였다. 앞집 가족 모두가 반듯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괴로운 것은 어른이고 아이고 길을 걷다 앞집 아주머니를 만나면 끝이 없는 자식 자랑을 들어야 했던 것. 팔십이 다 돼가는 친정엄마가 가끔 고향에 들르면 이제는 의대에 진학한 손주 자랑을 들어야 한다며 웃는다.


다음은 군인들이 많던 우리 동네에서 자그마한 하숙집을 운영하던 L의 아버지 자랑질로 앞집 아주머니와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싫어서 멀리 돌아가던 아이까지 큰소리로 불러서 자식 자랑을 했던 아저씨는 말로 하는 자랑이 모자라 몸동작도 같이했다.

"우리 OO가 말이야..."

아들을 교수로 만들 거라던 아저씨는 일찍 돌아가셨고 홀로 남은 엄마는 교수가 된 아들의 얼굴을 1년에 한번 보기도 힘들다 하신다.




자식 자랑을 참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살아보니 알겠다.

초등학교, 중학교 성적 아무것도 아닌 것을 큰아이들 키우면서 알았는데도 막둥이가 받아온 성적표를 들고 마구 자랑하고 싶어진다. 영어는 만점이고요,  all A맞을 수 있었는데 1점 모자라는 과목이 2개라 안타깝네요.(재수없어 ㅎ)

큰아이, 작은아이 모두 기대했던 것보다 잘하고 있으니 어디에 말도 못 하고 블로그에만 끄적거리다 친구들 만나면 터지곤 한다. '참아야지, 참아야지' 하지만 참을 수 없는 그것은 바로 자식 자랑인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데스 클리닝(death cleaning)을 생각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