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다 큰 딸의 이야기
“아빠 뭐해요?” 회사 건물을 나오자마자 아빠에게 전화를 건다. “응, 동태찌개 끓여서 먹고 누워있어.” 아빠는 혼자 살고, 나는 둘이 산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에 3번 통화한다. 점심을 먹은 2시, 퇴근 후인 7시, 잠들기 전 10시. 이렇게 하루에 3번은 꼭 서로의 안부를 꼼꼼히 챙겨야 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다. 아빠는 내게 남은 마지막 가족이다. 세상에 내 가족이 없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아빠에게 더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한번은 퇴근길에 아빠에게 전화했는데 열 통이 넘도록 전화를 받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며 혼비백산해 달려간 적이 있다. 가는 길에 만취한 아빠와 연결이 됐는데, 안도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빠는 술 때문에 한평생 엄마 속을 썩이고, 지금은 딸 속을 썩인다. 그러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한 달 내내 술을 끊는다고 친구도 안 만나고 집에만 있는다. 도무지 중간이 없다.
아빠는 태어나고 자란 지역에서 학원을 운영했다. 그리고 그 중간 없음으로 학원사업에 성공했다. “내가 젊을 때 별명이 뭐였는 줄 아니? 로봇 태권V였어.” 술만 마시면 나오는 아빠의 단골 레퍼토리. 아빠는 타고나길 리더 기질이 강해, 본인의 판단대로 밀어붙이는 편이다. 아빠의 판단이 잘 맞아떨어져 성공한 학원사업은 한때는 학원 생 100명을 모집하는데 1,000명이 넘게 와서 제비뽑기를 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그렇게 당첨된 입학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되파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봄, 가을에 학원 소풍을 갈 때면 아이스크림 장사들이 소풍지까지 따라오기도 했다고. 바야흐로 아빠의 전성시대였다. 학원사업을 하며 존경받는 원장 선생님이었던 아빠는 큰돈을 벌어 가족을 위한 아파트까지 샀다.
그때도 아빠는 학원원장이기 이전에 내 아빠였다. 내게는 당연한 일이었고, 아빠 스스로도 그렇게 행동했다. 한번은 보건소에서 우리 유치원에 출장을 나와 단체로 예방접종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아빠가 각 교실을 돌며 의사 선생님과 함께했다. 당시 아빠 학원의 유치원생이었던 나는 주사 맞기 싫어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나보다 눈치가 빨랐던 아빠는 순서대로 아이들을 호명하며 주사를 맞히다가 내 차례에는 “예쁜 딸, 예쁜 딸 나오세요!” 하면서 공식적으로 딸내미 선언을 해버렸다. 반 친구들은 예쁜 딸이 도대체 누구인가 두리번거리다가 내가 나가는 걸 보고 까르르 웃었다. 나는 아빠 품에 폭 안겨 주사를 맞았다.
아빠는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다. 어디에서 무얼 하든 사람들을 금방 사귀고, 또 그 무리에서 금방 대장이 된다. 형이든 동생이든 할 것 없이, 일단 무리가 생기면 신기하게도 늘 아빠가 결정하고 사람들은 따른다. 아빠에게서 리더십과 붙임성을 배웠으면 좋았을 걸 아쉽다. 아빠에게서 국어, 수학, 영어, 과학 모든 걸 다 배우고 그건 배우지 못했다. 새로 이사한 동네에서 아빠는 또 친구를 잔뜩 사귀었고, 그 동네 농부 아저씨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지낸다. 아빠는 도시에서 살 때 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했다. 딸로서는 그의 사교성이 참 감사한 일이다.
아빠는 요리하는 걸 좋아한다. 혼자 사는 아빠가 요리도 잘 못 했으면 나는 회사 생활도 못 하고 그 옆에만 붙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아빠가 음식을 아무리 맛있게 해도 매번 같이 먹을 사람이 있는 게 아니니까 쓸쓸할까 걱정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동네 아저씨들과 함께 배추 농사를 지어 그걸로 김장까지 했다. 손이 커서 매번 음식을 몇 통씩이나 해놓고 너무 많다고 해도 한가득 싸 준다. 한번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전화가 계속 와서 무슨 일이 있나 뛰어나와 받았더니 “잡채가 다 상해 버렸어.”라며 한숨을 푹 쉰다. 손이 큰 아빠가 잡채를 또 한 바구니 해 두었는데 통째로 쉬어 버렸다는 거다. 나는 순간 그게 이렇게 전화까지 할 일인지 짜증이 나다 가도 쉬어 버린 잡채 때문에 속상해하는 아빠가 귀여워 피식 웃고 말았다.
아빠에게는 특별한 대화의 기술이 있다. 바로 칭찬과 공감이다. 남편이 아빠 드시라고 고기를 조금 사가는 날이면 아빠는 어김없이 어제부터 고기가 먹고 싶었다며, 우리 사위가 참 센스 있다고 치켜세운다. 내가 뭔가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이면 아빠는 우리 딸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안다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줄줄 읊을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아빠와 더 친해졌다. 세상에 아빠와 내가 단둘이 남겨진 후에도 어색함은 전혀 없었다.
아빠와 나는 함께 있을 때 주로 음악을 듣는다. “아빠, 무슨 노래 들을까?” 하면 아빠의 1번 선곡은 항상 ‘카펜터스’이다. 아빠와 함께 드라이브를 할 때면 그가 좋아하는 카펜터스의 「Top Of The World」와 「Yesterday Once More」를 틀어드리는데, 매번 아빠가 원하는 노래는 같아서 자동으로 재생시켰더니, 어떻게 알고 틀었냐고 한다. 카펜터스 다음은 이글스의 「Hotel California」, 그다음은 엘튼 존의 「Goodbye Yellow Brick Road」. 아빠는 그중에서도 해 질 녘에 듣는 「Yesterday Once More」가 가장 좋다고 한다. 석양을 바라보며 지난 날을 그리는 아빠를 보며 짠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그는 은퇴 후에도 늘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데도 가끔 그의 집에 가면 아빠는 “오늘 사람하고 한마디도 안 했어.”하신다. 그럴 때면 딸내미 마음이 덜컹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때부터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앉아 아빠와 수다를 시작한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밥은 잘 챙겨 드셨는지, 동네 친구분들은 잘들 지내시는지 한 분 한 분 안부를 묻고 친구분들과 아빠와의 사이가 좋은지까지 체크하고 나서야 옷을 갈아입고 저녁 준비를 할 수 있다.
결혼 후에는 아빠 집에 2주에 한 번씩 간다. 남편에게는 미안하지만 꼭 하룻밤을 그의 집에서 지내고 온다. 내 속을 아는 남편이 먼저 제안을 해줘서 덥석 물어버렸다. 밥은 어떻게 드시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집에 고장 나거나 다 떨어진 건 없는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누구와 친하게 지내는지와 같은 것들은 잠깐 들리듯 다녀와서는 알 수 없다. 아빠가 대충 닦아 놓은 그릇들을 다시 한번 깨끗하게 닦아 두고, 날은 추워지는데 따뜻한 옷은 충분히 있는지 아빠의 옷장을 살펴본다. 구석구석 점검을 마친 나는 아빠가 차려준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는 예전부터 고등어를 참 좋아했는데, 이 동네에는 큰 마트도 생선가게도 없어 아쉽다고 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아빠 집 주소로 고등어 한 박스를 주문했다.
아빠는 본인의 젊은 시절을 이야기한 후에는 항상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돈 번다고, 돈 아낀다고 애쓰지 말고 너희들은 젊을 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라고 얘기한다. 그는 학원사업으로 성공을 거뒀지만, 지금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때 아등바등 살지 않고 여행이라도 다닐 걸, 후회가 된다고도 했다. 나는 아빠의 인생을 이해하며 아빠의 삶만큼 덜 편협한 사람이 되었다.
저녁을 먹고 입이 심심해서 “아빠, 먹을 거 없어요?” 했더니 어제 요 앞에 있는 밤나무에서 주워 왔다며 싱싱한 밤알들을 내놓았다. 냄비에 물을 붓고 딱 12알만 골라 삶았다. 삶은 밤을 찬물에 헹궈 가져왔더니, 아빠가 칼과 쟁반을 들고 붙어 앉는다. 그리고 한 알씩 쥐고 살살 껍질을 벗겨 내게 건넨다. “아빠, 이거 그냥 이로 깨물어 살만 솔솔 먹으면 돼.”라고 말해도, 아빠는 마지막 알까지 다 까고 나서야 말한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꼭 칼로 까야지만 먹을 수 있는 날밤도 아니고, 이로 깨물어 먹으면 그만인데 괜히 힘들게 깐다는 나를 보며, 그는 “아빠 손 운동하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란다. 이로 깨물든 칼로 까든 그렇게 티격태격 삶은 밤 12개는 결국 다 내 입속으로 들어갔다. 달콤하고 보드라웠다.
삶은 밤을 먹으며 생각하니 아빠가 지금까지 내게 주었던 모든 것이 이 ‘삶은 밤’과 같았다. 어쩌면 아빠가 평생 가장 예쁘게 깎아 놓은 밤알이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이후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아빠가 정성스레 밤을 까 주던 그날을 생각한다. 오늘도 양손에 아빠의 삶은 밤을 쥐고 일했다. 그리고 퇴근하자마자 아빠에게 전화를 건다. “아빠 뭐해요?”, 아빠는 변함없이 “응, 예쁜 딸.”하며 전화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