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남편과 나는 사내 연애 2년만에 결혼했다. 애초에 결혼을 연애의 종착지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연애하는 내내 그와는 단 한 번의 다툼도 없었고 솔직한 자기고백이 담긴 그의 청혼 편지에 감동해 결혼을 결심했다. 3장 가득 빼곡하게 쓴 편지에는 '어떤 멋진말로 감동을 줄까' 보다 '내가 이 말을 해도 되는 사람일까' 몇 번이고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적혀있었다. 그렇게 되돌아본 본인은 가끔 공과금 내는걸 깜박해 연체료를 내기도 하고, 고등학생들보다 더 떡볶이를 좋아하고, 시크한척 하지만 사실은 시시껄렁한 농담을 좋아하고, 고집이 세지만 너에게만은 평생 져주겠다고 했다.
그와 처음 만난 날, 그러니까 우리가 함께 다닌 회사로의 첫 출근 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가장 먼저 만난 팀원이 그였다. '여기 그 팀에 오늘 처음 출근하신 대리님이에요' 인사 담당자가 소개하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 네' 하더니 고개만 꾸벅 하는듯 마는듯 엘리베이터에 쌩 올라타버렸다. 첫 인상이 정말 차가웠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인사팀 직원을 모두가 불편해했다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지만 자기는 나를 첫 눈에 봤을 때부터 결혼하게 될 줄 알았다고 떠들어댄다.
그리고는 그날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오늘 첫 출근 했으니까 커피 쏴요'라고 짓궂은 농담을 하더니 당황하는 내 표정을 보고서야 장난이라며 본인이 커피값을 계산했다. 그 팀 사람들은 모두 만만치 않은 입담을 가지고 있었고, 누군가가 '핑'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퐁'하며 받아쳤는데, 첫 출근에 긴장해있던데다가 입담도 순발력도 없던 나는 흔들리는 동공을 그대로 들켜버리고 말았다. 그 뒤로도 그는 나를 꽤 여러차례 놀려 먹었는데, 입사한지 한 달쯤 지나 식곤증으로 졸고 있는 내 옆에 와서 '안녕하세요 팀장님!'하면서 팀장님이 지나가기라도 하는듯 인사하는 시늉을 하질 않나, 아무튼 꽤나 장난기가 많은데도 싫지 않은 사람이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지낸 지 두달쯤 되었나, 참 신기하게도 그와는 이렇다할 전조 없이 동시에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같은 종족에 대한 레이더 같은게 발동해서 (그때만 해도) 서로가 닮아있다는 걸 알아챈건줄 알았다. 아무튼 그와 사귀기 전에는 그 흔한 전화통화 한 번 하지 않았고, 회사에서 매일을 오가며 얼굴을 보다가 그의 데이트 요청으로 영화를 한번 같이 보고 그날 바로 사귀어버렸다.
연애를 할 때 가장 좋았던 점은 그와 나는 닮은 점이 정말 많았다는 거다. 우리는 이성적인 상식과 정치관에서부터 감성의 영역인 음악 취향, 좋아하는 작가, 유머코드, 그리고 입맛까지 닮아있었다. 연애시절 한번은 남편이 친구들과 놀고 있는 나를 태우러 왔다가 친구들까지 근처 지하철역에 태워다주게 되었는데 그는 당연히 자신의 플레이리스트를 틀었고 친구들은 내 플레이리스트가 재생되고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당시 서로 플레이리스트를 맞출 정도로 사귄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을 때인데도 그 정도로 서로가 좋아하는 음악과 가수가 맞닿아있었다.
그와 결혼준비를 하면서도 취향때문에 이견이 생긴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침대를 고를 때도 테이블을 고를 때도 후보군 중에 우리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건 딱 하나로 동일했다. 매번 마음에 드는게 같으니 결혼준비는 속도가 붙어 착착 진행되었고, 그렇게 그와 나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착각이 점점 견고해졌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3년을 함께 지내보니 '저 사람이 언제부터 저랬지?' 싶은 순간이 한 두번이 아닌건 물론이고, 심할 땐 배신감까지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올해 들어서는 있는 그대로 인정이 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가끔은 어떻게 그렇게 정 반대로 생각을 하냐고, 나는 당신이 나랑 똑같은 사람인줄 알았다고 목소리를 높여 싸우다가 엉엉 울기도 했다. 30년이 넘도록 서로를 모르고 살아온 남편과 나는 서로 다른 사람인게 당연한데, 나 혼자 견고한 착각의 늪에 빠져있다가 뜬금없는 눈물파티로 남편을 당황스럽게 한거다.
남편과 나는 다른 사람이다. 여기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솔직한 글쓰기를 허락해 준 이 글의 핵심인물 남편에게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