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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니 May 31. 2021

술에 취한 사람이 싫다, 당신 빼고.

버릇처럼 술 값을 내는 남편

 같이 취해있으면 몰라도, 나는 맨 정신인데 상대가 술에 취해있는건 최악이다. 왠만하면 술 취한 사람과는 마주하고 싶지도 대화를 하고 싶지도 않다. 나의 경우 술 취한 사람 울렁증은 영어 울렁증보다 더한데, 최초로 술 취했는데도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바로 내 남편. 보통 술 취한 사람은 한 말을 또 하고, 한 말을 또하고 말도 안되는 소리들을 늘어 놓거나 과격해 지기도 하는데, 그는 한도없이 귀여워진다. 일단 혀가 짧아지고 평소의 7배 정도 더 애정표현을 늘어 놓으며, 내가 없으면 못 산다고 한다. 결혼하고 해를 거듭할수록 그는 조금씩 무뚝뚝해지고 있는데,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여지없이 귀여워진다. 전화를 걸어 "여보, 왜 안들어와요?" 하면 "아니~ 그게 아니고오~"로 시작하는 혀가 꼬부라진 그의 목소리가 귀엽다. 물론, 그렇다고 술을 자주 마시라는 얘기는 아니다. 세상 모든 일에 장점과 단점이 있듯이 술 마시는 그에게도 단점은 존재한다.


 술 취한 남편에게서 감당이 안되는 것 중 하나는 밤 늦은 시간에 음식을 엄청 사온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 아빠도 술에 취했다 하면 빵집에 남아있는 빵을 전부 다 사오곤 하셨는데... 처치곤란으로 난감해하던 엄마의 표정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어쩜 남편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우리 아빠의 술버릇을 똑닮았는지, 오늘도 꽈배기를 잔뜩 사왔다. 그리고 다른 손에는 널 위해 준비했다며 핫도그 하나를 꼿꼿하게 들고 왔는데, 이건 네가 가장 좋아하는 핫도그이고 내 사랑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으니 꼭 지금 먹어야 한다고. 여보 근데 지금이 몇시인줄 알아? 12시가 넘은 시간에 핫도그로 사랑고백하는 남편은 감당이 안된다. 내 사랑이 담겼는데 왜 당장 먹지 않냐고 토라지기 때문에.


 그래도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다. 진짜 문제는 그가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수시로 술값을 낸다는 거다. 그것도 10만원이 넘는 금액을 말이다. 회사에서 팀장직을 맡고 있는 남편은 회사로부터 제공되는 회식비를 다 쓰고 나면, 그의 사비로 팀원들에게 술을 사준다. 현재 함께 일하는 팀원들 뿐만이 아니다. 전 직장의 팀원들을 만날 때도 술 값을 15만원씩 쾌척한다. 그 돈은 물론 우리의 생활비가 아니라 그의 용돈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한번씩은 슬그머니 생활비에 끼워 넣어 논 것을 모르지 않는다. 나는 5만원짜리 블라우스 하나를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살까말까 며칠을 고민하고 있는데, 저렇게 술값을 내고 다니는 남편을 보면 심기가 뒤틀린다. 내 옷이야 둘째쳐도 10만원이면 2만원 짜리 치킨을 5마리나 시켜먹을 수 있는 돈이다. 그 말은 즉, 그가 낸 술값이 일주일치 우리 집 저녁 식비와 같다는 거다.

 

 물론 제일 화가난 부분은 10만원이라는 큰 금액에서 였지만, 아쉬운 부분은 따로 있다. 고주망태가 되어 집에 들어간 사람들이 과연 다음 날까지 그리고 그 다음 날까지 술값을 낸 고마운 분이 누구인지 기억하고 감사하게 생각할까? 하는 문제다. 나 역시 11년째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남편처럼 10만원이 넘는 금액을 사비로 충당하며 술을 사준 사람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누군가 내 대신 계산을 해준다면 정말 감사하고 그 순간에는 예의 바르게 감사 표시를 한다고 해도 두고두고 고맙게 생각한 적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까 결론은 아내에게 매번 혼이 나면서도 술값을 내는 남편이, 팀원들에게 충분히 고맙고 감사한 사람인 것인지가 염려스럽다. 그 돈을 자신에게 쓰건, 팀원들에게 쓰건 조금 더 의미있게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애주가 부부가 픽한 하이볼용 위스키



 지난 밤, 또 큰 돈을 쓰고 들어온 남편이 다시는 술값을 내지 않겠다고 사과했다. 이것으로 술값과 관련된 3번째 사과이다. 이쯤되니 술 자리에서 술값을 내려는 남편의 무릎 위로 어지러운척 쓰러지는 아내가 등장하던 CF가 왜 나왔는지 알만하다. 매번 약속을 하고도 지키지 못하는 그는, 술만 마시면 "형이 다 사줄게!"하는 허세가 발동하는 걸까, 아니면 술만 마시면 내 앞에서 귀여워지는 것처럼 회식 자리에서는 계산대 앞에 1번으로 서는 술버릇이 있는 걸까. 동료들에게는 이렇게 술을 잘 사면서, 나와 단 둘이 술을 마실 때는 먼저 일어나며 "생활비로 내요!"라고 말하는 그가 너무 얄밉다.

 

 이번 주는 내내 비가 온다. 내일 퇴근길에 그와 만나 김치전에 막걸리를 마셔야 겠다. 내일은 술에 취한 귀여운 그가 술값을 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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