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코드 VS 낭만코드
복사기 빼고 다 안다는 사내연애 1개월차, 퇴근 후 은밀하게 하는 데이트에서 남편은 뜬금없이 "성대모사 해줄까?"라고 물었다. 그는 김정민, 박영규, 이선균 등 개그맨들이 주로 따라하는 유명인의 목소리를 흉내냈다. 만난지 한달 된 여자친구를 위한 그의 성대모사는 너무도 정성스러웠고 그래서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웠다. 나를 재밌게 해주기 위해 성대모사를 하는 사람은 난생 이 사람이 처음이었다. 남편은 저 중에서도 특히 이선균 성대모사를 잘했는데, 울림통이 큰 그의 목소리와 아주 잘 어울렸다. 요즘도 그는 봉골레 파스타를 하며, 이선균 목소리로 "봉골레 하나, 봉골레 하나"를 외친다. 요리는 기본이고 성대모사는 덤이다. 내가 깔깔대고 웃으면 남편은 "역시 나랑 노는게 제일 재밌지?"하며 뿌듯해한다.
우리는 유머코드가 맞는다. 한번은 그와 카톡을 하다가 내가 실수로 문장 끝에 '이'를 붙여서 보냈다. "여보 잘 도착했어요? 이" 다른 문장을 더 치려다가 정신이 없어서 그냥 전송이 눌러진거다. 남편은 그걸 놓치지 않고 답장 끝에 '이'를 똑같이 붙여 보내왔다. "네 지금 막 도착했어요 차가 엄청 막히네요 이" 그걸 보고 한참을 웃었다. 나는 또 다시 그에게 "엄청 늦었네요 이"라고 '이'가 붙은 답장을 보냈고, 그게 우리만의 암호라도 되는 양 그날 우리의 대화는 하루종일 '이'와 'ㅋㅋㅋ'로 끝났다. 둘만 아는 비밀 놀이가 생긴것 같아서 일하는 내내 메신저 창을 보며 키득거렸다.
반면 우리의 낭만코드는 어떨까? 토요일 저녁 함께한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 저녁 메뉴로 남편과 나 둘다 햄버거를 골랐다. 버거를 먹기로한 것 까지는 합의가 되었지만, 논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남편이 말한 햄버거는 버거킹에서 배달시켜 집에서 먹는 버거이고, 내가 말한 햄버거는 수제버거 집에서 맥주 한잔 곁들여 분위기와 함께 먹는 버거였다. 당연히 수제버거 집에서 외식을 하는 줄 알고 내가 버거 맛집을 검색하자, 남편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야말로 토요일 밤의 버거이몽이다. 결국 우리의 저녁 메뉴는 버거가 아닌 집 앞 곱창집에서 먹는 모듬곱창으로 결정됐다. 남편은 좋아하는 '술'로, 나는 배달음식이 아닌 '외식'으로 합의점을 찾았다.
남녀가 오래토록 사랑하려면 낭만코드가 맞아야한다던데... 남자의 낭만은 호텔 라운지 와인바에 있는데, 여자의 낭만은 호텔 맞은편 포장마차에 있다면 오래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의 경우, 아직은 대부분 남편이 나에게 맞춰준다. 그런데 문제는 남편이 원치않지만 맞춰 준다는 걸 내가 여실히 느낀다는 점이다. 그의 노력에 고마울 때도 있지만, 연애시절 눈빛만 봐도 척척 맞던 우리의 낭만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 언제부터 그와 나의 낭만은 '우리'의 낭만이 아니라 너의 것과 나의 것으로 분리되었을까. 지금까지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이토록 생각이 달랐던 적은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나만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작은 것 하나부터 이렇게 점점 달라진다면 10년 후 우리는 같이 하고 싶은게 완전히 없어질까봐 무서운 생각이 든다.
유머코드 VS 낭만코드, 유머코드 WIN
또 다른 날 밤에는, 남편에게 "우리 북악 스카이웨이 드라이브 갈래?" 대차게 제안을 해봤다. 남편은 "거긴 왜...? 거기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라며 나가기 싫은 마음을 담아 천연덕스럽게 받아쳤다. 내가 데이트하고 싶어서 꺼낸 말이라는걸 뻔히 알면서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묻는게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버렸다. 세상에, 북악 스카이웨이에 친구 만나러 가는 걸까봐? 유머코드의 일치가 낭만코드의 불일치를 이기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재밌게 살고 있다. 물론 배달음식 좀 그만 시켜먹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데이트가 하고 싶지만, 평생 로맨틱한 데이트를 한다고 해도 웃을 일이 없는 삶은 더더욱 싫다. 요즘 유행하는 밸런스 게임에서 '평생 나를 웃게 해주지만 낭만적이지 않은 사람 vs 매순간 로맨틱하지만 핵노잼인 사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전자를 선택할 것이고, 그 사람이 바로 내 남편이다. 그의 유머와 개인기 덕분에 자주 웃고, 두번 싸울일도 한번으로 줄어든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의 재능이 나의 낭만을 막도록 허용하지 않겠다는 조용한 경고를 날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