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짐니 Mar 30. 2021

예쁜 말만 듣고 싶은 사람이 선택한 네글자

당신은 멋있는거 할래? 귀여운거 할래?

 어제 저녁, 퇴근하고 집에 먼저 도착해있던 남편이 내가 들어오는걸 보더니 "머리도 예쁘게 하고 다녀왔네?"한다. 오늘 회사에서 30명이 넘는 사람을 만났지만 단 한명도 나에게 머리가 예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루종일 일하며 쥐어뜯은 머리가 퇴근하고 집에 도착한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예뻐졌을리도 없다. 그래도 남편의 예쁘다는 말 한 마디에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저녁이다. 나태한 긴장감에 쌓여 8시간을 보내고 왔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예쁘다는 사람이 있는걸보니 여기가 내 집이 맞는것 같다.


 남편은 참 예쁜 말도 애정표현도 잘하는 사람인데, 반대로 욱하기도 잘하는 사람이다. 물론 연애할 때는 욱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결혼하고 만 1년이 지나갈 무렵부터 언성을 높이는 그를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도 같이 언성을 높이며 싸우다가 그 후로는 서로 상처를 내는게 바보 같은 일이라는걸 깨닫고 무조건 대화로 풀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대화를 하기로한 결심이 무색하게 금세 언성은 다시 높아졌다. 말에는 감정이 실릴 수 밖에 없는 일인데, 나는 감정을 빼고 팩트만 이야기하길 원했다. 언제나 감정을 빼면 우리가 싸울 일은 전혀 없었다. 내가 먼저 감정을 억누르고 '나는 당신을 사랑해'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우리의 다툼은 1분 안에 끝이났다. 나는 우리가 헤어질 정도로 큰 일이 아니라면 빨리 해결하고 평온한 상태로 돌아가자는 속전속결 주의였고, 남편은 달아오른 감정을 해소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고 갈등은 잦아드는듯 했으나 문득 또 다시 언성이 높아지는 날에는 내 주변 (직장상사를 포함해) 그 누구도 나에게 언성을 높이거나 짜증을 내는 사람이 없는데,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화가 나면 나에게 언성을 높일수도 있다는게 꽤나 상처가 됐다. 늘 다툼의 끝에는 왜 나에게 화를 내냐는 질문과 화를 낸적이 없다는 남편이 있었기에 우리의 간극은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우리가 애초부터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이토록 우리를 다르게 만들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어쩌면 그 정도의 언성은 대화의 일부로 인정해주는 남편의 가족과 조그만 소란도 큰 일로 생각해왔던 나의 성장환경이 부딪혀 왔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는 서로의 성장과정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곳에 있는 남자아이 하나와 여자아이 하나를 이해해보기로 했다. '이 아이는 10대 시절에 이런 아픔이 있었구나', '이 아이는 작은 노력을 알아봐주는 칭찬을 좋아하는구나', '이 아이는 부모와 또 친구와 이런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구나' 그랬던 작은 아이가 자라서 내 남편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을 이해한다'는 장문의 편지를 썼고, 그 후 우리는 한 차례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작은 다툼이 생겨 서로 말하기가 싫어졌을 땐, 당번을 정해 돌아가며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을 정하기도 했다. 대화를 시작하면 모든게 해결된다. 그렇게 순간의 감정이 끓어오를 뿐이지, 우리가 사랑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어느 날, 운전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서 '당신은 멋있는거 할래? 귀여운거 할래?' 뜬금없이 물어봤는데, 그는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며 ‘멋있음 5: 귀여움 5’를 선택했다. 한국사회에서 40년을 살아 온 남편은 당연히 상남자적인 멋있음을 선택할 줄 알았는데, 귀여움 5를 넣은걸 보고 이 사람은 멋있는거 보다 귀여운걸 좋아하는군! 간파했다.(물론, 나의 오해일지도 모르지만 이 후 그의 행보를 보면 '간파'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그 무렵부터 남편을 부를 때 '귀염둥이'라는 애칭을 사용한다. 그 네글자가 발휘하는 힘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가끔 욱하던 성격도 가라앉게 만드는 힘이 있고, 그와 함께하는 일상이 더욱 귀여워졌다. 대화를 시작할 때부터 '나는 당신이 너무 귀여워~(=귀염둥이)'로 시작하는데 싸움이 생길리가 없다.


 오늘 아침, 출근하는 남편에게  예쁜 말을 날린다. "귀염둥이, 오늘  이렇게 멋있게 하고가?" 물론  눈에는 실제로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당신 멋있으니까 오늘 하루  자신감있게 지내다  하는 응원의 의미로.



진짜 귀염둥이 시절의 남편


이전 06화 계획적인 사람과 즉흥적인 사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