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달라서 그래
20대 중반의 일이다. 주말에 집에서 쉬고 있는데 친구가 갑자기 줄게 있다며 우리 동네에 온다는 거다. "안돼! 나는 10분 이따가 목욕할 거야!"라고 나의 주말 계획을 말했지만 친구는 나중에 해도 되지 않냐며 목욕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아니 이따가 저녁에는 또 할 일이 있고 오늘이 주말 마지막 날이라서 지금이 아니면 목욕할 시간이 없는데! 나는 내 계획대로 욕조에 물을 받았다. 친구는 우리 집 근처에 와서 30분 넘게 나를 기다렸다. 그는 볼멘소리로 "왜 내가 온댔는데 목욕을 했어?"라고 따져 물었지만, 솔직하게 말해 나는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먼저 내 계획을 말했는데도 무시하고 방문한 건 그였기 때문에.
오늘 10년 전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코로나 확산도 점차 심해지고, 몸이 안 좋아 최근에는 집에서 누워만 있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삼청동에 AS 맡겨둔 목걸이를 찾으러 남편과 함께 가게 된 것이다. 삼청동 하면 수제비, 나는 며칠 전부터 남편에게 삼청동 수제비를 먹자고 제안했고 그도 흔쾌히 "콜!"을 외쳤다. 문제는 수제비 집에서부터 시작됐다. (아무래도 우리 부부는 수제비와 인연이 없는 것 같다. 최근에 싸워서 이틀이나 말을 안 했을 때도 수제비를 막 먹으려고 숟가락을 들던 차에 다퉈서 한 숟가락도 먹지 못하고 불어 터진 수제비를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야 했던 안타까운 기억이 있다.) 아무튼 삼청동 수제비에서 수제비를 먹다가 다음 코스 계획을 짜며 서로 기분이 상하고야 말았다.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수제비 먹고 소품점 가서 목걸이만 찾아서 집에 가자."라고 말했고, 나는 그의 대사가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앞서도 설명했지만 최근에 몸이 안 좋아서 거의 집에 누워있다시피만 하다가 오랜만에 나온 주말 나들이였다. (내 기준) 당연히 삼청동 거리를 거닐며 바람도 쐬고 차도 한잔 마시고 저녁 즈음에 집에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의 계획은 완전히 달랐던 거다. 내가 "오랜만에 나와서 차도 한잔 마시고 들어가려고 했지."라고 말하자 늘 그렇듯 그는 안색을 바꾸고 수제비 그릇이 다 비워질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러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차 마시자는 얘기는 미리 안 했잖아."라고 답했다. 그러니까 자신의 '계획'에는 사전에 얘기된 삼청동 수제비와 수선된 목걸이를 픽업하는 딱 2가지만 있었다는 거다.
남편과는 이전에도 비슷한 문제로 다툰 적이 있다. 전날부터 내일 점심은 짬뽕이 먹고 싶으니까 짬뽕을 먹자!라고 합의를 하고 다음날 차를 타고 막 출발하는 길에 내가 먹고 싶은 메뉴가 바뀌었다. "혹시 짬뽕 말고 파스타는 어때?"라고 물었는데 그때 그의 표정과 수제비집에서 그의 표정이 같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어제는 짬뽕이 먹고 싶었는데 오늘은 파스타가 먹고 싶을 수도 있고, 그깟 음식 메뉴는 언제든 바꿀 수 있는 거 아니야?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했어?"라고 말하자 당시에는 그가 별것도 아닌 걸로 날을 세워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한 사람이 한 번 사과하고 넘어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수제비집에서 똑같은 문제로 또 부딪히게 되었으니. 문제는 오늘 먹을 메뉴를 바꾸고 차를 마시느냐 안 마시느냐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자신의 계획하에 두고 움직여야 마음이 편한 그는 나의 사소한 제안에도 내면의 평화가 쉽게 깨지는 듯했다.
남편은 수제비만 먹고 얼른 들어가서 운동을 가려고 했단다. 그러면 '계획이 있으니 오늘은 일찍 들어가자.'라고 말하면 되는 문제 아닌가? 남편은 다시 "그래, 다음부터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미리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말해줘."라고 했는데 나는 또 그 대사가 탐탁지 않았다. 그냥 남편이랑 데이트를 나왔다가 밥을 먹고 계획에 없던 산책도 하고 그러다가 우연히 어떤 옷가게에 들어가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하고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충분히 자연스러웠다. 아내가 남편에게 차 한잔 마시자는 제안은 언제든 할 수 있는 거라고 말하자 그도 내 의중을 이해는하는 듯했으나 그의 계획주의 성향이 짙은 자아는 즉흥적인 제안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아 보였다. 그는 화해를 한 마지막 순간까지도 "앞으로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미리 말해줘."라는 말을 반복했다.
이날 나는 10년 전에 나의 계획을 무시하고 '무단으로' 방문하려던 친구가 된 기분이었다. 운동을 하려던 그의 계획을 무참히 깨트린 나쁜 아내가 되었다. 이날도 여느 날처럼 갈등 끝에 결국 남편이 모든 걸 맞춰줬지만, 그는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모르겠다. 남편과 외식을 하다가, 나온 김에 산책도 하고 차도 마시자고 한 게 그렇게 잘못인가?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되뇌었다. '우리가 달라서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 살고 있습니다>는 매주 일요일 연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