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함께 요리하고 밥 먹고, 잠시 헤어질 땐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고 서 있는 가족이 된 '할머니'와 '나'
회사 선배들과 기분 좋게 점심을 먹고, 맑게 흐르는 청계천을 따라 잠시 산책을 한 뒤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 사이 쌓인 메일을 처리하고, 이런저런 업무를 보는 중 머리 한쪽이 당기듯 아픈 두통이 시작되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속까지 답답하고, 프린터나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걸을 때마다 두통이 심하게 느껴져서 저절로 미간에 주름이 지어졌다.
“기유 씨, 어디 아파?”
머리에 자극이 가지 않도록 천천히 걸었더니 스쳐 지나가던 같은 부서 언니가 금방 알아봤다.
“머리가 아파서 천천히 걷고 있어요.”
“어머. 아까 밥 먹을 때도 아팠어? 아깐 괜찮아 보였는데.”
“아깐 괜찮았어요.”
“체했나?”
소미언니는 총무팀 가서 약 받아봐라, 휴게실 안쪽에 있는 수면방에서 잠시 쉬고 와라 조언을 해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 손에 서류 뭉치를 들고 멈춰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그 모습에 묵직한 감동이 일었다. 아플 때는 조그마한 관심이나 걱정도 몸 둘 바 모르게 감사했다.
“네. 이것만 체크하고 넘기면 총무팀 가 볼게요.”
나는 손에 든 자료를 들어 보였다. 각자 자리로 가서 앉았는데 잠시 어지럼증까지 일어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숨을 돌렸다. 모니터로 눈길을 돌리는데, 시선에 소미 언니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통화를 하며 모니터를 바쁘게 훑고 있는 가냘픈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 멋있고 따뜻하게 보였다.
결국 퇴근할 때까지 소화제는 먹지 못했다. ‘이것만 체크하고’라고 생각했는데 그 일을 끝내기가 무섭게 전화가 걸려와 급한 업무 요청이 들어왔고, 그걸 처리하고 있는데 부재중인 팀원 업무를 대신 요청하는 또 다른 긴급 업무가 들어오면서 화장실 갈 시간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퇴근 도중 건물 지하 라운지에 있는 약국이 눈에 들어왔지만 다소 상태가 나아진 느낌이라 집에 일찍 도착하는 걸 우선으로 두고 그대로 지나쳤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닫고 신발을 벗는데, 할머니가 입술을 쭈욱 내밀고 미간에 주름을 짓고 나를 쳐다봤다.
“목소리에 왜 그렇게 힘이 없어?”
“체한 것 같아요.”
“어이구, 어쩌다? 소화제는 먹었고?”
“아뇨. 그냥 왔어요. 손 따면 돼요.”
“손은 뭘로 따는데?”
“방에 수지침 있어요.”
우리 집에서는 체하면 소화제를 먹기보다는 손을 따곤 한다. 독립한다고 나오면서 수지침도 구매해 왔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할머니는 별 걸 다 갖고 있다고 놀리듯 웃더니, 생각났다는 듯 손을 활짝 펴고 말했다.
“찹쌀밥 해서 된장찌개랑 먹자. 그러면 너 걸린 거 쑥 내려간다. 손 따지 말고 그냥 누워 있다가 나와.”
“찹쌀밥이요?”
찹쌀밥을 떠올리니 속이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예전에 찹쌀떡 먹고 체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지금은 속도 답답하고 머리도 아픈 것이, 밥은커녕 음료수 한 모금, 과자 한 조각도 못 먹겠는 상태였다.
“아···, 할머니. 밥 못 먹겠어요.”
“먹어야지 무슨 소리야?”
“밥도 못 먹겠는데 찹쌀밥은······. 저 그냥 손 따고 잘게요.”
“찹쌀밥이 왜?”
“아니···. 너무 배부를 것 같아요. 저 지금 머리도 너무 아프고 속도 메슥거리고, 뭐 먹을 생각이 없어요.”
“아이고, 얘. 찹쌀밥이 천연 소화제야!”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오려 했다.
“옛날부터도 체하고 소화 안될 때 찹쌀밥 먹으면 쑥 내려가고 그래서 소화제 대신 사람들은 찹쌀밥을 먹었어. 된장찌개도 소화가 잘 되게 해 줘.”
할머니는 눈에 힘을 주고 말하고는 몇 마디 실랑이 끝에 결국엔 밥을 먹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씻고 방에 누워 머릿속이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소화제 하나 안 먹었다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자신에게 헛웃음이 나왔다. 오늘은 찹쌀밥을 실험적으로 먹어보되, 앞으로는 체하면 바로 소화제를 먹거나 손을 따야지 생각하며 메슥거리는 명치를 부여잡았다. 그나저나 곧 요리 냄새 맡으면 화장실로 달려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시 뒤 식은땀에 젖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차라리 한 번 게워내는 게 낫겠다 싶어 방문을 열고 나왔는데 진하고 구수한 찹쌀밥 냄새가 집 안에 가득했다. 그와 묘하게 어우러지는 듯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도 휘휘 감돌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냄새를 맡으며 할머니의 등을 보자마자 속에서 금방이라도 올라오려던 느낌이 가셨다. 할머니의 뒷모습이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도사님처럼 보였다. 내가 힘 없이 슬리퍼를 끄는 소리를 듣고 할머니가 돌아봤다.
“아직 남았는데 좀 더 쉬다가 나와.”
나는 힘을 쥐어짜 내 고개를 젓고 할머니께 다가갔다.
“저 뭐 할 거 없어요?”
“무슨 소리야, 이제 밥 다 되면 돼. 찌개도 다 끓었고. 그냥 앉아만 있어. 이거만 냉장고에 넣고 나도 쉴 거야.”
할머니께 너무 감사해서 한쪽 팔을 끌어안고 몸을 바짝 붙였다.
“아잇, 차!”
할머니는 깜짝 놀라 팔을 움찔했다.
“너 손이 왜 이렇게 차니? 어?”
내 손을 목에 대어 보았다. 얼음같이 차가웠다.
“네가 아주 심하게 체하긴 했나 보다. 에구, 쯧쯧. 그 정도면 약이라도 먹지, 고생은!”
갑자기 코 끝이 매웠다. 양가 할머니들과 한자리에 있을 때 아팠던 경험이 없지만, 만약 지금 같은 상태였다면 어떤 대화가 오가고 할머니들은 어떤 행동을 보여주셨을까? 할머니들이 해 주셨을 모든 행동과 마음을 지금 눈앞의 할머니가 대신 내게 해주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정이 담긴 잔소리마저도. 몸을 틀어 식탁을 잡고 간신히 의자에 몸을 앉혔다. 식탁에 깔린 유리가 따뜻했다. 내 손이 얼마나 차가운지 다시 실감이 났다.
“들어가 있으라니까 그러네?”
“아니에요. 여기 있고 싶어요.”
“어이구? 밥 안 먹는다더니?”
웃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밥솥에서 경쾌한 기계음이 나오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밥과 국을 평소 먹는 양보다 현저히 적은 양으로 퍼서 마음의 부담은 상대적으로 덜하다. 뜨거운 김이 나는 찹쌀밥을 입에 넣으니 반찬 없이도 맛있겠다 싶었다. 찌개도 안 떠먹고 밥만 몇 술 더 먹고 있으니 할머니가 당신의 국그릇을 톡톡 치며 찌개도 먹으라고 했다. 표정이 사찰 입구의 사천왕 같다. 내 앞에서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는 찌개를 떠서 입에 가져갔다. 갑자기 모든 감각이 미각에 집중된 듯 된장찌개가 새로운 맛으로 다가왔다. 맛있다. 덜 갈린 콩이 씹히는 진한 된장찌개를 찹쌀밥과 함께 꼭꼭 씹어 음미하고 천천히 넘겼다. 한 숟갈, 두 숟갈, 어느새 그릇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할 때 속이 편안해졌음을 깨달았다. 입맛이 돌아 밥과 찌개를 조금 더 푸기 위해 일어나니 트림도 나오고 머리 아픈 것도 반으로 줄었다. 할머니는 놀리듯 웃으며 식사를 이어갔다. 다시 뜨거운 찹쌀밥과 된장찌개. 두 번째 그릇이 비워질 때는 신기하게도 머리도 아프지 않고 말할 기운도 났다.
“할머니, 진짜 신기해요. 정말 내려갔어요!”
“거 봐라. 내 말이 맞지?”
함께 눈을 마주치고 웃는다. 이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지 생각해 보았다. 둘 다 건강하고, 둘 다 웃을 힘이 있고, 웃을 일이 있다. 감사한 일이었다. 게다가 약한 줄만 알았던 여든 살 할머니가 너무도 의지된다는 사실에 놀랐다. 할머니가 천천히 식사하시는 모습이 더욱 정갈하고, 고요하고, 아름다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