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컨디션이 안 좋아도 룸메이트 할머니의 지혜로 회복한 '나'. 여든 살 할머니는 약자가 아니라 현자였다.
오므라이스에 이어 카레, 닭볶음탕 등 요리를 이어 가며 자취 아닌 세미자취의 내공을 쌓아가며 할머니와 나누어 먹던 와중에도 아침밥은 언제나 간장계란밥이었다. 8월의 어느 날. 잠에서 깨 방문을 열고 나왔는데 웬일로 할머니가 부엌에 계셨다. 평소에는 주무시는 시간이라 이렇게 아침에 부엌에서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할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늘 일찍 일어나셨네요?”
“잘 잤니? 으응, 잠이 일찍 다 깨버려서.”
분주해 보이는 모습을 들여다보니 미역국을 끓이고 계셨다.
“요리도 하셨어요? 몇 시에 일어나셨길래요?”
“으응, 그냥 좀 전에······. 찐기유, 어제 밥 남은 거 미역국에다가 넣어서 끓여 먹고 가라.”
그렇게 먹게 된 미역국은 소고기의 감칠맛이 곁들여져 아주 맛있었다. 어째서 같은 소고기에, 시중에서 파는 미역을 넣고 끓이는데 집집마다 이렇게 맛이 다른 걸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금, 국간장, 마늘 유무 등 레시피에서 차이야 있겠지만, 아무래도 신기하다.
퇴근 지하철이 한강 위를 달리기 시작했을 때, 평소와 달리 붉은색으로 물든 수면을 보며 계절이 변해감을 느꼈다. 아파트에 도착해 복도를 걷는 와중에도 예전과 달리 석양빛이 눈을 직격 하는 일이 없어졌고, 해는 건너편 아파트 너머로 내려가 있었다. 매미 소리도 줄어들고 있었다. 살짝 시원한 바람이 부는 듯하면서도 아직은 공기가 달큰한 계절이었다.
씻고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와 책을 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가 보낸 메시지였다.
‘오늘 음력 생일인데 맛있는 거 먹고 지냈지?’
퍼뜩 고개를 돌려 달력을 보았다. 평소 양력 생일만 챙기던 터라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전화를 걸었다.
“몰랐어. 그런데 오늘 웬일로 할머니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셔서는 소고기미역국 끓여주셨어. 진짜 신기하지?”
엄마는 함께 놀라워하고는 ‘할머니께 정말 감사하다’며 살짝 눈물 맺힌 목소리를 냈다. 계약서에 있는 주민등록번호를 보고 생일을 아셨다고 해도 음력생일을 알려면 해당 연도의 음력 날짜를 알아봐야 하는 건데, 할머니의 철저한 조사의 결과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와의 통화 후 화장실을 가다가 TV방으로 걸어가는 할머니와 마주쳤다.
“할머니. 오늘이 알고 보니 제 음력 생일이었어요. 어떻게 아시고 아침에 미역국을 끓여 주셨어요?”
“오늘이 생일이니? 그냥, 맨날 식은 밥 먹고 출근하는 게 마음이 그렇더라고.”
할머니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듯 편하게 말하고는 발걸음을 떼셨다. 불 켜지 않는 컴컴한 TV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더니, 좋은 일에선 우연이든 의도가 있었든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감사하고 감동적일 뿐이었다. 할머니가 나에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해 주시다니. TV방 문 앞에 서서 고개를 기울이고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매일 늦게까지 TV를 보시는 할머니와 정해진 나름의 룰이 있었는데, 이른 저녁 언제든 할머니께 밤 인사를 드리고, 그 후로 정말 잘 때 따로 또 인사하지 않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인사 같은 거 할 필요 없다고도 했지만, 함께 밥 먹는 사이에 아무 말없이 자러 들어가는 게 영 마음 불편한 일이 아니라는 내 주장에 절충안을 찾은 것이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할머니가 반사되는 TV불빛 속에서 손을 흔들었다.
“굿 나잇!”
할머니가 굿 나잇이라고 하다니 너무 놀라서 웃었다. 할머니가 애교 섞인 미소를 보여주며 마저 손을 흔들다가 이윽고 TV로 눈길을 돌리신다.
방으로 돌아와 인터넷 창을 열었는데 친구가 ‘첫사랑이 생각나는 순간’이라는 제목의 인터넷 페이지를 보내왔다. 남자는 술 마시고 취했을 때가 1위였다. 얼마 전 있었던 모종의 일이 떠올랐다. 다시 떠올려도 황당하다. 다음 순위로는 애인과 싸웠을 때, 첫눈 올 때, 추억의 장소나 물건을 접할 때 순이었다. 반면, 여자는 추억의 장소나 물건이 1위였고, 그다음 순위는 비슷비슷했고 술 마셨을 때가 그중에선 꼴등이었다. 이토록 남녀가 다르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가 내 눈이 유독 한 문장에 고정되었다는 걸 자각했다.
첫눈 올 때
나는 첫눈이 오면 그리운 사람이 떠오른다. 왜일까? 아마 이윽고 겨울이 왔음을, 이미 겨울이었음에도 그것을 증거 하는 눈을 보고서야 계절과 세월을 실감하고, 그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흐름이 아닐까. 아니다, 그저 눈이 감수성을 깨운다는 단순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한참 스크롤을 내리며 댓글을 읽다가 문득 할머니는 어떠신지 궁금해졌다. 첫사랑도, 그리운 사람도. 80년이라는 세월은 어떤 세월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잃고, 잊었을까? 그 와중에도 잊지 않고 떠올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여든이라는 나이가 되면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조차 잊을까?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꼬리에 꼬리를 물며 떠올리다 보니 시야가 아롱졌다. 해방 전, 6·25 동란 등 파란만장한 근현대를 거친 그 인생은 과연 어떤 인생일지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잠시 시간여행을 떠나 본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