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첫 월급을 탄 기념으로 할머니와 외식을 하고, 할머니에 대한 마음에 대해 사색에 잠겨 본다.
따뜻한 바람이 솔 불어 들어오는 현관. 스티로폼 박스를 집 안에 들이고 허리를 펴니 할머니가 종종걸음으로 슬리퍼를 끌며 다가왔다.
“어서 와라. 이건 뭐니?”
“문 앞에 놓여 있던데요?”
허리를 숙이고 운송장을 살피는 할머니의 입이 한없이 앞으로 나와 있다. 집중할 때의 표정이다. 현관문을 닫고 신발을 벗을 때까지도 할머니는 개미를 관찰하는 어린아이처럼 허리를 펴지 않고 있었다.
“안경 안 쓰시고 그 글씨 보이세요?”
“안 보여.”
나 원 참. 쭈그려 앉아 살펴보니 이사 왔던 날처럼 시골에서 올라온 소고기였다. 할머니는 아이고 맞다며, 당신이 주문하고는 잊고 있었단다.
“이거 얼마나 오래 밖에 있었던 걸까요?”
“모올라. 문 계속 열어두고 있었는데 왜 몰랐지?”
씻고 옷 갈아입고 나오니 할머니가 손짓했다. 고운 빛깔의 생고기가 부엌 조리대에 펼쳐져 있었다. 할머니는 냉동할 것, 바로 쓸 것을 나누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이걸로 요리해 먹자. 뭐 먹을까?”
스스로 아주 유치하다고 자각하면서도 추어탕집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거 할머니 고기잖아요.”
할머니는 못 들으신 건지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김치찌개 먹을까? 마침 아주 맛있는 김치가 있는데. 오래된 김장김치가 있어.”
김장김치라니 이건 반칙이었다. 도저히 다음 일격을 가할 수 없었다.
“너, 저, 방에 들어가 있다가 부르면 나와.”
“같이 요리해요.”
“요리? 너 요리할 줄 아니?”
입이 쩍 벌어졌다.
“네에? 저번에 제가 했던 오므라이스 같이 드셨잖아요!”
“오므라이스? 아하하하하하.”
할머니는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웃었다. 너무 하찮은 요리라고 놀리시는 건가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요리를 하는 모습을 보여드린 일이 드물었다. 그간 집에서 주신 반찬이나 레토르트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고, 그나마 아침밥은 조리에 가까운 간장계란밥으로 해결했다. 할머니 기억에서 내 요리가 잊힌 것도 납득할 만했다. 할머니가 온몸으로 밀며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극구 말리는 통에 못 이기는 척 부엌에서 물러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부엌에선 연신 집기 부딪히는 소리만 나고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았다. 다가가 살펴보니 김치와 파가 썰린 채 전골뚝배기에 담겨만 있었고, 할머니는 도마 위의 고기를 붙들고 고전하고 있었다. 칼이 안 드는지 고기가 고무처럼 잘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칼을 신경질적으로 도마에 눕히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께 눈짓하고 자리를 바꿔 서서 칼을 잡았다. 이렇게 고기를 잡고 이렇게 썰면 되지.
“어?”
전혀 썰리지 않았다. 여전히 고무 같았다. 마치 플라스틱 자로 칼질을 흉내 내는 것 같았다.
“생고기는 잘 안 썰려.”
“아, 원래 그래요?”
갑자기 고깃집에서 고기가 익은 다음에 가위로 써는 장면이 떠올랐다. 여태까지 그 타이밍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집 나와 사니까 이렇게 사소하게 하나씩 배우게 되는구나. 힘들게 대여섯 조각을 찢다시피 썰고 나니 요령이 붙었다. 순간적으로 칼을 밀며 손목 스냅을 이용하니 수월하게 썰렸다. 옆에 바짝 붙어 도마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지켜보던 할머니가 내 얼굴과 도마를 번갈아 봤다.
“아깐 처음 하는 것 같더니, 많이 해 봤어?”
“아뇨, 처음이에요.”
“제법 써는데?”
“하하.”
할머니는 제법 많은 고기를 사용하려 했다. 그래야 더 맛있다고. 어르신이라고 다 손이 크고 관대한 건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런 모습이 멋있게 느껴졌다.
“다 썰었네. 어휴, 고마워. 이거 혼자 했으면 덩어리째 끓이고 썰어야 했는데. 팔 아프겠다. 방에 가서 쉬어.”
정말로 팔과 손목이 아파서 사양 않고 곧장 방으로 갔다가 맛있는 김치찌개 냄새가 방까지 물들였을 때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보글거리는 소리가 가스레인지 위에서 쉴 새 없이 나고 있었다.
“다 된 것 같은데 뭔가 영······. 간 좀 볼래?”
한 술 떠먹어 본 뒤, 고추장, 설탕을 감으로 추가했다.
“김치찌개에 고추장을 넣어?”
할머니는 굉장히 놀라며 물었다.
“느이 집에서는 고추장 넣어 먹니?”
“몰라요, 어떻게 하는지.”
“근데 여기다 넣는 거야?”
“네. 뭔가 고추장이 빠진 듯한 맛이에요.”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라 집에서도 마지막 간 보는 담당은 나였다. 요리를 한 적도 없지만 간을 간장, 소금, 젓갈 중에 어떤 걸로 더할지, 심지어 국간장인지 양조간장인지까지 선택해서 제안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하면 정말로 맛이 괜찮아졌다. 내 입맛과 감에는 자신이 있었다. 할머니는 다 된 찌개가 망가질까 걱정이 되는지 세상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내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 와중에 팔을 부여잡고 말리지 않는 인내심에 내심 웃음이 났다. 다시 한 술 떠먹어 보니 캬아 소리가 저절로 나는 맛이었다.
“맛이 좋아?”
“네! 할머니도 드셔보세요.”
할머니도 한 술 뜨시고는 깜짝 놀란 얼굴로 끄덕였다.
“어머나, 신기하네. 나는 여태 김치찌개는 고춧가루로 끓이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맞는 걸지도 모르죠. 제 방법이 야매일지도 몰라요.”
“야매? 그런 말 쓰는 거 아니야!”
아이코, 혼나고 말았다. 그래도 뜨거운 밥과 찌개를 함께 먹으며 기분 좋게 마주 보고 웃었다. 나도 할머니도 새로운 걸 알게 된 저녁이었다.
*
첫 월급으로 산 부모님 선물이 담긴 여행가방을 끌고 복도에 섰다. 이 집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본가로 떠나는 날이었다. 할머니는 나와 눈을 마주칠 때는 미소를 지었지만 바닥이나 다른 쪽을 볼 때는 울상이 되었다. 아주 떠나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실까? 이 금요일 밤부터 주말 내내 적적하시겠다 싶어 내 마음도 좋지 않았다. 집을 알아볼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 했다. 대체 우린 집주인과 세입자인 건지, 할머니와 손녀인 건지, 남인 건지, 가족인 건지.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할머니, 저 일요일 밤에 오니까 걱정 마세요. TV로 재미있는 거 많이 보세요.”
“어, 허허허. 얼른 가 봐. 느이 엄마랑 아버지가 많이 좋아하겠다.”
할머니와 연신 악수를 했다가 포옹을 했다가 어설픈 어깨동무도 했다가 겨우 발걸음을 뗐다. 가방의 바퀴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할머니는 방충망을 열어둔 채로 문과 복도에 걸쳐 서서 정지화면처럼 서 있었다.
“할머니, 들어가세요! 모기 들어가요!”
대답 없이 가라고만 손짓할 뿐이었다. 돌돌돌돌돌돌돌, 복도에 바퀴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고 엘리베이터 홀로 꺾기 전에 뒤를 돌아보니 할머니는 그대로 복도 저편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목례를 했는데도 들어가실 기미가 없었다. 일부러 씩씩하게 크게 손을 흔들었다. 할머니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코너를 돌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니 몇 초 지나서야 현관문이 끼익 닫히고 걸쇠를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멍하니 그 몇 초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힘없이 들어가 문을 당겼을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이 집을 떠나면 할머니가 마음 쓰이고, 본가를 떠나면 부모님이 마음 쓰이는 시소게임이 시작되었다. 아니, 어쩌다가 이런 웃지도 울지도 못할 상황에 처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