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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기유 Oct 23. 2024

오만과 사랑


지난 이야기: 할머니를 통해 일상에서 조심하고 배려할 것에 대해 배워가고 있는 '나'


“할머니! 저 첫 월급 탔어요.”

“응?”

어리둥절한 표정이 지배적이었지만 곧 입이 활짝 벌어졌다. 눈에는 기쁨이 그렁그렁하다.

“월급 탔구나. 벌써 그렇게 되었니?”

둘이 같이 손을 맞잡고 헤벌레 웃었다.

“할머니. 어디 가고 싶은 곳이나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무슨 소리야?”

“첫 월급 탄 기념이에요.”

“에휴, 얘. 그럴 거 없어. 이 나이에 어딜 가고 싶겠니.”

“무슨 말씀이세요? 가고 싶었던 식당이라도 없으세요?”

할머니는 갑자기 침묵하더니 바닥을 시선으로 이리저리 훑었다. 

“첫 월급 타면 부모님 선물 사드리는 거야.”

“부모님 선물도 살 거예요. 아까 백화점도 들렀다 왔는데 아직 못 골라서 보기만 하고 왔어요.”

“그렇구나.”

할머니는 천천히 걸어 주방 조리대 앞으로 갔다. 가고 싶었던 곳을 서너 군데 말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한참 뒤 밥상을 둘러앉았을 때 할머니가 말을 꺼냈다.

“너, 저, 먹고 싶은 거 먹자.”

“네?”

“너 좋아하는 걸로 먹자.”

“저는 회사에서 점심 때도 식당 나가서 먹어요. 할머니 고기 안 드시고 싶어요? 고기나, 한정식이나 그런 거.”

할머니는 손을 휘저었다.

“고기? 아이고, 이 할미 고기 사주게? 허허허. 고기는 집에서 주문해 먹으면 되니까 밖에서 사 먹을 필요 없어. 집에서 요리하기 번거롭고 너도 회사에서 잘 못 사 먹는 거 먹으러 가자.”

수수께끼 같은 문제가 내려졌다. 요리하기는 번거롭고, 회사에서 잘 못 먹는 거. 한참 밥과 반찬을 씹으며 생각해 본 끝에 뚝배기에 담긴 걸쭉한 주황빛 요리가 떠올랐다.

“할머니 혹시 추어탕···, 드세요?”

“추어탕? 너 추어탕 좋아하니?”

“네, 헤헤. 회사 사람들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못 먹고 있어요.”

“어머, 웬일이니. 그래. 추어탕 먹으러 가자.”

그렇게 메뉴가 결정되었다. 그때는 몰랐으나 이건 우리의 첫 외식이자 외출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할머니와 함께 바깥을 걸어보게 되었다.



토요일. 아침을 먹자마자 외출 준비를 했다. 할머니가 걸음이 느려 최대한 천천히 걸어서 가야 했기에 시간을 넉넉히 잡고 출발해야 했다. 인터넷으로 가까운 추어탕 추천글을 훑어보다가 선택한 장소는 신논현역과 가까운 곳이었다. 가까우니 할머니께 택시를 타자고 했지만 본인은 지하철을 무료로 탈 수 있으니 나만 괜찮으면 지하철을 타자고 고집하셨다. 다행히 지하철역이 아파트 앞에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어 마음의 부담은 없었지만 아파트 단지를 나가기도 전에 할머니와 하는 외출의 현실을 알게 되었다. 지팡이를 짚고 걸으시지만 위태롭게 흔들리는 걸음을 보고만 있기가 불편해 팔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처음엔 손사래를 치고 홀로 걸었지만 단지가 오래돼 아스팔트가 울퉁불퉁했기 때문에 중간중간 움찔하며 내 팔을 붙들었다. 그 힘이 얼마나 센지, 여든의 손아귀 힘에 놀랐다. 느리고 위태로운 모습과 달리 굉장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힘이었다. 평소엔 현관문을 나서서 3분도 안 되어 도착하는 지하철역 출입구에 15분 걸려서 도착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어디 먼 곳의 여행지를 가고 싶다고 했다면 나는 실행을 했을까, 웃는 얼굴로 끝까지 여행을 마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고작 15분 지나고 이런 생각이 들다니, 내 짧은 인내심에 스스로 놀랐다.

주말 오전이라 9호선은 한산했다. 언제나 집에서만 보던 할머니와 지하철에 앉아 있다는 게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할머니가 조금 다른 사람으로 느껴져서 쳐다보니, 수줍은 건지 어색한 건지 모를 미소를 보여주셨다. 신논현역에 내리자 얼마 전 할머니가 한 말이 생각났다. 할머니를 벽 쪽으로 보내고 부축하며 옆을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든든한 벽이 되어드리는 기분으로 걸었다. 할머니는 “사람이 참 많다.”라고 한마디 했을 뿐이다. 에스컬레이터의 도움으로 편하게 지상에 올라온 우리는 흐린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 예보가 있었기 때문에 우산을 준비하긴 했지만 다행히 아직 내리지 않았다. 역 출구에서 가게까지는 60미터. 그토록 가까웠지만 할머니의 걸음에 맞춰 오래 걸려 도착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영차영차’였다. 가게는 맛있는 냄새로 가득했다. 식당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땐 마치 긴 여행 끝에 숙소에 들어온 것 마냥 안도감과 해방감이 들었다. 팔과 어깨가 욱신거렸다.

“할머니, 미꾸라지 튀김 드실 수 있어요?”

“응, 먹지. 그런데 다 먹을 수 있겠어?”

“네. 할머니도 많이 드세요.”

보글보글 끓는 뚝배기가 도착했을 땐 들깨가루랑 부추를 챙겨드리고는 무아지경으로 그 맛에 빠져들었다. 후후 불어도 입에 넣자 너무 뜨거워서 깜짝 놀라면 할머니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갓 튀겨진 미꾸라지 튀김이 합류했다. 할머니는 자꾸 접시를 내 쪽으로 밀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 나도 밀면서 할머니가 드셔야지 나 혼자선 어차피 다 못 먹는다고 했다. 할머니는 또 내 쪽으로 밀었다.

“할머니가 먼저 하나 드세요. 그래야 제가 먹죠.”

“에휴, 그런 게 어딨어. 빨리 먹어.”

‘편하게 맛있게 드시지, 왜 이렇게 사양을 하실까?’

살짝 서운해지려 했다. 아직, 아니 앞으로도 쭉 할머니에게 나는 세입자일 뿐인 걸까? 그렇다면 할머니는 왜 나한테 집주인을 넘어서는 호의와 베풂을 주시는 걸까? 할머니가 나를 생각해서 그러는 것을 알면서도 서운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서운했다. 내 호의도 편하게 받아주시면 좋을 텐데. 한입 베어 문 튀김이 맛있어서 화가 났다. 튀김 하나를 집어 할머니 밥그릇에 얹었다. 할머니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쳐다봤다.

“무어야? 너 먹으라니까?”

눈앞의 이 할머니는 내게 어떤 존재인 걸까?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그 어느 쪽을 대입해도 지금 같은 감정을 상상할 수 없었다. 타국에 계시고, 타지에 계시고 성장하면서 크게 살 부대끼며 지낸 기억이 없었다. 내 진짜 할머니들이 음식을 사양했다면 나는 서운했을까? 그러려니 했을까? 내 호의를 상대가 무조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어쩌면 오만일까? 눈앞의 할머니가 드디어 튀김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꼭꼭 씹어 맛을 음미하는 걸 보고서야 입맛이 돌아왔다. 내 마음은 오만일까, 사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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