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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기유 Oct 14. 2024

마음과 마음


지난 이야기: 긴장과 설렘의 첫 출근. 할머니는 이미 가족이 되어 있었다.



이튿날 환영회를 가졌고,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질문이 나와 자연스럽게 부서원 모두 내가 할머니와 지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우선 처음에는 생소한 형태의 동거 이야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그다음 두 부류로 나뉘었다. 그게 과연 감당 가능한 일인지 눈썹을 비틀며 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지낼 수도 있다는 데에 놀라며 ‘안전, 고정비 절약, 정서’ 모든 면에서 참 괜찮은 선택이라며 눈빛을 빛내는 사람이 있었다. 전자는 여자, 후자는 남자로 신기하게도 성별이 나뉜 것이 인상적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말을 놓은 유연 선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월초라서 다들 바쁜데 모두 모인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돼.”

“아, 월초는 바쁜가요?”

“모든 회사가 그럴 거야. 월초, 월말은 마감 때문에 정신없지. 아직 마감이 뭔지 모르지? 그나저나 농담이 아니고, 영업직은 출장이나 외근이 많아서 전원이 모일 수 있는 날이 굉장히 드물어. 정말 이렇게 한 명도 빠짐없이 모인 건 드문 일이야. 연지씨랑 소미 씨 환영회 때도 다 못 모였었어.”

앞에서 선배들이 맞장구를 쳤다. 서로 자기 때는 누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이름이 거론된 당사자가 “뭐야, 왜 내 이름이 들려?”하며 이야기가 왁자지껄하게 이어졌다. 문득 할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한 회사의 같은 부서에서 만나는 것부터 보통 인연이 아니지. 부장까지 모두 모였을 때 환영회를 하겠다고 한다는 건 정성이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그런 게 다 마음인 거야.’


다른 선배들 때는 피치 못하게 전원이 모이지 못했던 것일 뿐, 언제나 사람들은 환영회를 열었고 자리를 함께하려 했다. 정해진대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뿐이지만, 어찌 되었든 누군가를 환영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건 사실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어두운 조명 아래 노란빛이 어른거린다. 앞에 앉은 소미 선배가 달걀말이를 올린 접시를 내밀고 있었다. 

“기유 씨, 이거 먹어 봐. 이 집 계란말이 되게 맛있어.”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건 이런 사소한 챙김이었다. 할머니의 말씀이 다시 들리는 듯했다. 엊그제까지 일면식도 없던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과 통성명을 하고, 함께 밥을 먹고, 미래를 이야기한다니. 지금까지와 새로운 종류의 인연들 속에 앉아 이 재미있는 상황에 한껏 몸을 담가보았다. 사람들은 서로 은근한 거리가 있으면서도 농담도 하고 놀리기도 하면서 서로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사회에서 맺는 인간관계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드럽고 통통한 계란말이가 참 고소했다.



*

부엌에 서서 열심히 감자를 썰고 있다. 주말을 맞아 낮에 약속에 나갔다가 장을 봐 온 뒤 저녁 준비를 하는 중이다. 초보 자취생이라 그럴싸한 요리를 하는 건 아니었고, 메뉴는 간단한 오므라이스로 정했다. 야채와 햄을 잘게 썰어 밥과 케첩을 넣고 볶은 뒤, 계란 지단을 부쳐 덮어 케첩으로 얼굴을 그려주는 게 우리 집 레시피다.

여러 야채를 잘게 다지는 데만 이유도 모르게 30분 넘게 걸려버렸지만 드디어 볶는 단계에 들어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볶아지는 야채에 케첩을 더하니 냄새에 풍미가 깊어졌다. 오늘 저녁은 맡겨만 달라는 말에 쭉 방에 계시던 할머니가 부엌으로 응원을 나왔다. 

“냄새는 아주 훌륭하구나? 그런데 소문난 잔칫집이 먹을 게 없다는데 모를 일이지 또.”

응원을 나온 게 아닌 건가.

“한번 두고 보세요.”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이며 그릇에 볶아진 밥을 담는다. 팬을 닦아내고 다시 기름을 둘러 약불에 얹어 계란물 푼 것을 두른다. 휘휘 돌리며 계란물이 얇게 고루 편 뒤 때가 되어 뒤집자 옆에 그림자가 가린다. 돌아보니 할머니가 고개를 빼고 구경을 한다.

“나보다 낫네!”

계란 지단 하나를 그릇에 옮겨 밥을 덮은 뒤 다시 같은 작업을 한다. 계란 지단 부치기는 고등학생 때 가정 실습으로 해봤는데, 반에서 3명한테만 주는 가산점을 따기도 했었다. 한 번 해본 일이라 이번에는 더 수월했다. 할머니는 배가 고픈지 계속 옆을 서성인다. 지단이 익는 동안 먼저 완성된 오므라이스 위에 케첩으로 얼굴을 그렸다.

“할머니, 먼저 드세요!”

“아냐. 같이 먹자.”

지단 하나가 마저 완성되어 내 것까지 사진을 찍고 식탁에 올리자 할머니는 이윽고 숟가락을 들었다.

“스마일이네. 아까워서 이걸 어떻게 망가뜨리냐? 예술인데.”

“예술이요? 하하하하!”

할머니가 첫술을 씹으며 “옹, 옹.” 소리를 냈다.

“양파 씹히는 맛이 좋네. 간도 잘 됐고 아주 맛있다. 훌륭해.”

나도 한술 떠 꼭꼭 씹어보았다.

“할머니, 감자가 덜 익은 것 같지 않아요?”

감자를 더 잘게 썰거나 볶을 때 일찍 넣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그게 더 맛있어. 이건 원래 그렇게 야채 씹는 맛으로 먹는 거야.”

이 집에서 처음으로 칼과 불을 쓰는 요리다운 요리를 한 건데 아쉬움이 가득했다. 뭘 믿고 간도 안 보고 그릇에 냈을까? 다음 요리는 꼭 그릇에 내기 전에 잊지 말고 확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폭소를 터뜨렸다.

“음하하하, 오호호호”

놀라서 쳐다보고 있으니 할머니가 갑자기 몸을 가까이 기울이며 눈물이 맺힌 듯 촉촉한 눈으로 날 보았다.

“사람 앞날이란 건 참 모르는 거야. 정말 모르는 거야. 학생도 아가씨도 아닌.. 찐기유 되는 사람이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나서, 이렇게, 밥도 해주고"

갑작스러웠지만 뭔가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찐기유라고 장난스럽게 부르다니, 할머니의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할머니는 연신 오호호 웃으며 바쁘게 그릇을 비워 나갔다. 마치 오므라이스가 아니라 약주를 곁들이신 것 같았다. 할머니가 식사에 무아지경인 와중에 조용히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생각해 보니 이건 내가 한 최초의 요리였다. 학창 시절 가정 실습시간이나 축제, 파티 때 교실에서 했던 요리 외에는 처음으로 해본 요리였다. 어쩌다 보니 부모님보다 먼저 내 요리를 드시게 된 할머니. 부모님께 먼저 해드릴 걸 싶은 마음에 일순 후회가 들었지만, 감자가 서걱거리는데도 맛있다며 드시는 모습에 그런 순서쯤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기로 했다.


할머니가 자처하여 설거지를 하는 사이, 나는 다음 요리 메뉴를 떠올려보았다. 요리를 하고 그걸 누군가와 함께 먹는 즐거움을 경험하니, 바로 다음 요리를 해보고 싶어 졌다. 함께 밥을 먹는 식구가 있다는 것, 사소하지만 의욕과 용기를 주는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진기유입니다.

당시 만들었던 오므라이스예요.

조촐하여 공개하기가 부끄럽지만, 함께 식사했던 할머니가 실제로 계셨다는 실감을 전달드리고 싶어 공개합니다. 잘 그려진 걸 할머니께 드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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