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소중한 '마음'을 느끼며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
지하철을 탈 때는 가장 빨리 환승할 수 있는 열차 칸과 출입문을 사수한다. 길에서는 재빠르게 걷는다. 회사를 다닌 지 3주가 넘어가며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이다. 최단 거리, 최대 속도, 최고 효율. 통근에 빠져서는 안 될 요소였다. 그러다 보니 휴대폰을 보거나 두리번거리며 속도를 늦춰 앞을 막는 사람이 있으면 순간적으로 짜증이 올라오며 신경질적으로 그 옆을 추월했다. 그럴수록 점점 여유롭게 걸을 수 없었다. 어디를 가든 빨리 걸어간 뒤 목적지에서 여유를 부리는 편이 더 마음이 편했다.
“아침에 지하철 내릴 때 기유 씨 봤는데, 순식간에 사라졌어.”
옆 부서 선배가 세면대에서 손을 털며 말했다.
“같은 칸에 타고 계셨어요?”
“응. 사람이 많아서 내려서 부르려고 했는데, 내리자마자 저만치 앞에 가 있더라고. 무슨 축지법 써?”
함께 웃음이 터졌다. 한편으론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혼자 급하게 걸어온 게 아쉬운 기분도 들었다.
*
할머니는 천천히 밥을 씹어 삼키고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동작을 멈추고 내가 밥 먹는 모습을 한참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모든 동작이 느리고, 사이사이에 휴식을 취할 때가 많아서 이젠 나도 그러려니 하며 그대로 편하게 식사를 한다. 초반에는 내 먹는 모습이 이상한가 싶어서 “왜 그러세요?”하고 질문하기도 했다.
한참을 내 밥그릇에서 밥이 줄어드는 걸 보던 할머니가 다시 숟가락을 움직이며 말했다.
“일을 하는 젊은이는 참 멋있어.”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눈을 크게 뜨고 할머니를 바라보니 할머니는 말을 이었다.
“너도 매일 열심히 일을 하고 오고 말이야. 아주 멋있어. 내가 말이야, 예전에 저쪽 강남역에 큰 서점 있는 건물 있잖니. 이름이 뭐더라? 높은 갈색 건물.”
“교보문고요? 교보타워?”
“그래, 그래. 맞는 것 같다. 그 앞을 지나다가 양복 입은 청년들이 건물 근처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을 봤는데 말이야, 그 모습이 어찌나 멋있었는지 몰라.”
“예······?”
하고 많은 모습 중에 왜 하필 담배 피우는 모습? 할머니는 눈을 반짝이고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젊은 청년들이 깨끗하고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 따악 매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이야, 저 청년들 참 멋지다, 한국을 이끌어가는 청년들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 뭐냐.”
“아······. 그러셨어요?”
“표정이 왜 그러니?”
“아니···. 사무실에서 일하는 모습이 아니고 밖에 나와서 담배 피우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고 하셔서, 좀 의외라서요.”
“으음, 얼마나 일하다 답답하고 지치면 나와서 담배를 피우겠니. 그만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거잖니?”
할머니 눈에는 그런 모습마저 그렇게 기특하게 보였던 것일까. 담배 피우는 모습을 이리도 아름답게 보는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에 놀랐다. 게다가 보통의 회사원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일을 한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어르신이 ‘나라를 이끄는 기특한 세대’라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과한 신뢰와 칭찬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런데 말이다.”
할머니는 밥을 꼭꼭 씹어 삼키더니 화제를 바꿨다.
“나는 젊은이들이 옆을 쌩하고 지나가면 아주 무서워!”
나는 잠시 할머니의 말뜻을 생각하느라 숟가락질을 멈췄다. 할머니는 숟가락도 놓고 양손으로 손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걷는 게 느리잖니. 무릎 뒤가 팍 하고 당겨서 빨리 걸을 수가 없어요. 천천히 거북이처럼 걸어야 하는데, 젊은 사람들은 그게 답답한지 좁은 길에서도 옆에 바짝 붙어서는 쌩하고 가 버려. 배낭으로 툭 건드린 줄도 모르고 지나가. 부딪히면 넘어질까 봐 무섭다니깐?”
괴담이라도 얘기하듯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무섭다고 말하는 할머니를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옆을 빠르게 지나가는 게 누군가에게 공포를 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는 자각이었다. 빨리 걸으며 앞선 사람을 추월할 땐 몸을 비틀어 안 부딪히게 지나갔고,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늘 생각했었다. 아니, 그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당연한 수순으로 ‘반성’이 뒤따랐다. 나는 그간 어떻게 걸어 다녔는가, 하는 자문. 깁스를 해서 어쩔 수 없이 절뚝거리며 느리게 걷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느리게 걷는’ 사람에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짜증을 느꼈었다. 어르신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은 낙상이 직간접적인 사인(死因)이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는 걸 떠올렸다. 이런 내용을 모르더라도 본능적으로, 옆을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때때로 자동차나 버스처럼 무서워하셨구나. 많은 어르신들이······.
“저도 빨리 걷는 편인데, 이제 조심해야겠네요.”
“너 걸음 빠르니?”
“네. 얼마 전에도 회사 사람이 지하철 내리고 저랑 같이 가려고 했는데 제가 순식간에 앞으로 가버렸다고 하더라고요.”
“어이구, 얘. 그렇게 급하게 살 필요 없어. 넘어질라.”
“네.”
“그것 때문에 회사 동료랑 같이 출근할 수 있었는데 못했잖아.”
“그러게요.”
할머니는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조심해서 걸어야 돼. 알았니?”
“네.” 웃음이 흘러나왔다. 할머니가 어느 순간 내 걱정을 하고 있었다.
대화 이후 식사 내내 머릿속에 할머니가 위태위태하게 길을 걷는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아이가 계단을 오르듯 한 발 이동하고 양 발 모으고, 또 한 발 이동하고 양 발 모으는 걸음걸이. 사슴 같은 눈망울에 근심이 있고 입꼬리는 긴장으로 한껏 내려가 있는 모습.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렇게 무서워하며 길을 걸으셨을까. 앞으로는 할머니 옆으로 누군가 쌩 하고 지나가지 않기를, 얌전히 여유 있게 지나가기를 바랐다. 나도 앞으로 급할 것 없을 때는 여유 있게 걷자고 다짐했다. 할머니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하마터면 내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며 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