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나도 몰랐던 내 음력생일에 맞춰 우연히 미역국을 끓여주신 할머니. 할머니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생겨난다.
옷을 갈아입고 방문을 열고 나올 때면 아까만 해도 주무시던 할머니가 어느새 식탁에 앉아 계신다. 언젠가부터 내 출근 복장을 보고 평가를 해주시는 게 일과가 되어버렸다. 할머니의 평가는 지극히 평범한 내가 감당하기에 버거울 정도의 호평일색으로, 어떻게 비슷한 말을 매일 다르게 하시는지 그 창의력에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옷을 차암 잘 입는다, 너에게 잘 어울리는 게 뭔지를 아네, 어제는 백합 같더니 오늘은 장미 같네?, 오늘은 각이 딱 잡힌 멋쟁이네, 너는 분위기를 이리저리 마음대로 바꿀 수가 있구나, 오늘은 편하게 입어서 더 어려 보이네.
하루는 내가 몸에 딱 붙어 몸매를 부각하는 치마를 입었다가 도저히 그 옷을 입고 출근할 용기가 나지 않아 갈아입으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할머니가 불러 세웠다.
“왜 도로 들어가?”
“치마가 너무 딱 붙어서요. 뱃살도 보이는 것 같고.”
“네가 뱃살이 어디 있다고?”
“어디 있냐고요? 여기, 안 보이세요?”
할머니께 보이도록 정면으로 서서 치마 위로 배를 쓰다듬었다. 할머니는 헤헤하는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얘, 여자가 그 정도 아랫배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리고 남자들은 여자들 뱃살 살짝 볼록한 걸 더 좋아한단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내가 입을 쩍 벌리고 할머니를 쳐다보는데도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예술 작품들 봐 봐. 여자 몸 중에 마른 몸 있디?”
여든 살 할머니를 보수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저 의견은 개방적이라고 받아들이면 되는 걸까? 수치심은 들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나도 미술을 좋아하기에 똑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저런 발언을 직접 한다는 것, 여든 살 할머니가 한다는 것에 놀랐다.
어느 날은 식사 중 이런 말도 하셨다.
“너는 신발을 얌전한 것만 신더라? 예전에 찐기유처럼 우리 집에 머물었던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 아가씨는 밤늦게나 들어와서 얼굴 보기도 힘들었어. 그 애는 신발이 죄다 야한 것밖에 없었어.”
“야한 신발이 뭐예요? 하이힐 말하시는 거예요? 굽 높은 거?”
할머니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각구두 같은 거. 그런 거는 신발만 봐도 야하지 않니? 볼 때마다 저런 거 신으면 발목 부러질까 걱정되더라.”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맞아요. 지금 갖고 있는 구두는 다 5센티, 7센티고, 딱 한 켤레 10센티짜리가 있긴 있어요. 이 정도.”
손가락을 벌려 길이를 보여드렸다.
“에이, 그런 거 신지 마. 무릎이랑 허리에 안 좋아.”
“한 번씩 마음먹고 신을 때마다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할머니 아까는 야한 신발 왜 안 신냐는 것처럼 들렸는데요?”
“에이, 젊은 아가씨니까 왜 그런 신발은 안 신나 했지, 뭐.”
이 두 가지 대화를 통해 할머니가 어떤 관점을 갖고 계신지, 어떤 삶을 살아온 건지 정답은 모르더라도 어느 정도 추측을 해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고 복도를 걸어오는데 현관문이 닫혀 있었다. 평소에는 열린 채 방충망만 닫혀 있었지만 이제는 날이 추워져서 닫으셨나 싶었다.
드르륵, 찰칵. 챠라랑.
열쇠로 잠금을 푼 후 들리는 열쇠고리끼리 부딪히는 소리. 평소에는 들을 일이 거의 없는 소리였다. 이제 쌀쌀해지면 퇴근 때마다 이렇게 문을 열겠구나, 생각하며 집에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방에 계시는 할머니 잘 들리게 언제나 크게 하는 인사. 오늘은 적막만이 있었다. 방에 열쇠와 가방을 내려놓고 TV방으로 가보았다. 아늑한 공기와 할머니의 향수 냄새만 은은히 감돌고 있었다. 부엌과 다용도실과 뒷베란다를 보았다. 전등도 꺼져있고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베란다에 나가 보았다. 밖에서 들어온 아이 목소리만 아련히 울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방문이 열려있는 안방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할머니의 안방을 문 밖에서 보이는 이상 보게 된 건 처음이었다. 짙은 갈색의 마호가니 옷장과 서랍장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큰 침대와 콘솔 등 가구가 가득 차 있었다. 이곳도 TV방과 같은 향기가 감돌고 있을 뿐 고요했다.
“할머니?”
의도보다 높은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긴장을 하고 있었다. 설마 욕실에서 쓰러지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할머니? 할머니?”
여러 번 소리를 내 보았지만 그저 조용할 뿐이었다. 아직 문지방을 넘지 않고 서 있었지만 방문과 수직을 이룬 욕실 문이 열려 있는 게 보였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손을 합장했다.
‘들어가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정말 걱정 돼서 들어가 봅니다’
뜨거운 불판이라도 밟듯 깡충깡충 뛰어 방 안에 들어가 욕실 문 앞에 섰다. 놀랍게도 안방 욕실에는 서랍장과 옷 더미가 있었다. 욕조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지, 수납용 가구처럼 그 안에 있는 살림살이나 옷가지들이 문 밖에서 보일 정도였고, 할머니는 변기와 세면대만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듯했다. 바닥에 물기가 떨어진 흔적조차 없었다. 할머니도 없었다.
‘어디 나가셨나 보다’
안심을 하고 돌아 나오려는데 문득 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방문 밖에서도 보이는 위치에 있어 예전부터 눈에 들어오던 작은 액자였다. 서랍장 위에 올려진 손바닥만 한 액자에는 할머니와 다양한 연령의 사람이 찍힌 사진이 들어 있었다. 언제나 멀리서만 봤기 때문에 대충 가족사진이겠거니 하고 자세히 못 봤는데 그 액자가 지금은 눈앞 30센티 거리에 있었다. 식탁을 둘러앉은 사람들이 카메라 방향을 향해 돌아앉아 있다. 사진 속 할머니는 아무리 젊어도 오십 대 중반은 되어 보였고, 주변에는 나이 지긋한 백발의 남성, 그와 비슷한 연령의 여성, 그들의 아들 정도 나이로 보이는 남성, 초등학생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여럿 있었다. 아이들과 할머니는 심리적 거리감이 있어 보였고, 백발 노부부의 아들 뻘로 보이는 남성은 아무리 봐도 할머니의 아들이라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았다. 할머니 표정은 굳어있다고 해야 할까 살짝 무거운 느낌이었고, 살짝 카메라를 비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미소가 생각대로 잘 안 지어진 걸까. 사람들의 조합과 분위기가 영 조화롭지 않은 사진이었다. 웃고 있는 얼굴이 한 명도 없다. 언젠가 할머니가 함께 식사 준비를 하면서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들이 한 명 있는데 미국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뿐이었다. 며느리나 손주 이야기는 없었다. 함께 지낸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안부 전화가 오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시차가 있다고 해도 이곳이 늦은 저녁일 때 얼마든지 올 법도 한데. 사진에 아들 나이로 보이는 남자는 없었다. 어쩌면 아들이 카메라를 들고 이 사진을 찍었을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인원 구성이 부조화스러운 게 마음에 걸렸다. 할머니의 가족인 듯 가족 아닌 어중간한 느낌이 가득했다.
저녁 준비를 하려고 밥솥에 쌀을 안치는데 드르륵, 하고 현관문에 열쇠가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나는 부엌에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할머니는 젖은 머리에 한가득 자잘한 헤어롤을 말고 있었다. 손에는 장바구니 같은 작은 가방이 들려 있었다.
“엄머 깜짝이야. 너 왜 거기 서 있니?”
“오셨어요? 어디 다녀오셨어요? 걱정했잖아요.”
“목욕 갔다 왔지. 근데 걱정? 뭔 걱정?”
“인기척이 없어서 할머니가 집 안에서 쓰러지신 줄 알았어요. 죄송하지만 확인하러 안방까지 한 번 들어갔다 나왔어요.”
할머니는 '쓰러진다'라는 단어에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이 되더니 "쓰러지기는!”이라는 말을 남기고 안방으로 걸어갔다. 너무 쉽게 내뱉은 그 말에 할머니가 놀라시는 걸 보고 아차 싶었다. 그런 일이 있을까 봐 걱정한 한편,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믿음이 내 마음속에 더 크게 존재하고 있었기에 가볍게 내뱉은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 위험을 염두에 두는 사람에게 그런 말이 얼마나 묵직한 타격을 주는지 생각해 봤어야 했다. 내 경솔함에 나도 상처받았다.
걱정과는 달리 다시 거실로 나온 할머니는 크게 언짢아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한 밥, 집에서 가져온 반찬, 할머니의 국을 함께 먹기 시작했을 때, 할머니가 말을 꺼냈다.
“네가 퇴근할 때 내가 집에 없었던 게 처음이라 놀랐나 보구나. 할미 쓰러진 줄 알고 놀랐어? 허허.”
먼저 이해의 말을 꺼내주신 할머니께 감사했다.
“네, 할머니. 이제 할머니나 저 중에 누가 외출을 하든 규칙을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몇 마디 대화 끝에 ‘누구든 외출을 한다면 식탁 위 탁상달력의 방향을 바꿔놓기’로 규칙을 정했다. 그 이야기 이후에는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나 할머니가 지인과 나눴던 대화 같은 일상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생각보다 먼저 입이 움직이고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첫사랑 생각나실 때가 있어요?”
할머니가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고 동그랗게 떴다.
“첫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