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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기유 Dec 02. 2024

담금질


지난 이야기: 좀처럼 나눠본 적 없는 할머니의 가족에 대한 대화가 잠깐 이뤄지고, 알 듯 모를 듯 할머니의 고독이 보이는 듯하다.


엘리베이터가 닫힌다. 30층 너머 고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귀가 먹먹해지는 증상도 입사 후 두 달 하고도 몇 주가 더 흐르는 시간 중 홀연히 사라졌다. 메인 업무 외에도 번역, 고객사의 한국 방문 관련 준비 등 자잘하게 할 일이 많아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몰랐다. 사고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싶었을 즈음 터진다고 했던가. 같은 부서 대리님이 부탁한 거래처 손님의 방한(訪韓) 기간 묵을 호텔 예약이 완벽히는 처리되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예약 자체는 완료했다. 다만 얼리체크인(호텔이 정한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체크인하는 것)을 할 경우 별도 요금이 부과된다는 안내를 대리님께 전달하지 않은 것이었다. 손님의 체크인 예정 시간은 오늘 오전 11시 30분. 결제는 손님 본인이 할 예정이었다. 사전 안내도 없던 추가 요금이 발생하면 손님이 당황스러워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체크인을 미루고 곧바로 미팅에 들어간 손님도 있었다. 깊게 생각해보지 않고 바로 대리님 자리로 갔다.

“원 대리님. 죄송하지만 잊어버리고 말씀을 못 드렸는데, 부탁하셨던 호텔이 얼리체크인 시 별도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안내가 있었습니다.”

“뭐라고요?”

짜증 섞인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내가 취했어야 할 올바른 처리 방법이 뒤늦게 머리를 스쳤다. 

‘호텔 매니저님께 연락해 볼 걸! 지난번에 이용 부탁한다고 사무실에 찾아오시기까지 했었는데. 부탁드리면 좋은 방향으로 해결해 주셨을 텐데.’

하지만 이미 상황은 벌어져 버렸다.

“기유 씨, 오늘 오시는 분은 높은 분이에요. 이제 와서······.”

대리님은 수염이 난 턱을 만지며 고민을 하다가 말했다.

“추가 비용 나와도 되니까 예약은 그대로 둬요.”

“알겠습니다.”

바로 근처에 앉아있는 부서 분들은 모두 조용히 모니터만 바라보고 타이핑을 할 뿐, 사무실은 무척 조용했다. 내 바보 같은 실수를 방송한 것 같아 굉장히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잰걸음으로 자리로 돌아와 명함집을 펼쳤다. 지난번에 받았던 호텔 매니저님의 명함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부터 날아든 매니저님의 높고 쾌활한 목소리가 단숨에 나를 밝은 빛으로 감쌌다.

“저희 호텔에 예약 넣어 주신 것만으로도 눈물 날 만큼 감사해요. 저 지금 울어도 되나요?”

살다 보면 신기하게도 힘들 때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에서 나타난 사람이 눈물을 닦아주는 경험을 하게 된다. 지금이 그랬다. 매니저님께는 죄송하지만 우리 회사가 즐겨 이용하는 호텔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근처에서 열린 국제 행사 때문에 그 호텔이 만실이어서 차순위 호텔에 예약을 넣은 것이었다. 이런 사정을 차마 말할 수는 없었지만, 감사해하는 매니저님께 내가 더 감사해서 다음부터는 이 호텔도 적극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사말이 오간 뒤, 지금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하고 해결 방안을 물어보았다.

“당연히 별도 요금 안 붙게 해 드려야죠. 그리고 방도 트윈룸으로 받으신 걸로 나오는데 더블룸으로 바꿔드릴게요. 앞으로도 해외에서 손님분들 오시면 저희 호텔로 예약 좀 부탁드려요.”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부탁하며 빌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감사 인사를 건네주시는 매니저님께 송구스러웠다. 대리님께 일이 해결된 것에 대해 설명하고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자리로 돌아와 한숨을 돌리는데 새 메일이 도착한 알림이 떴다. 원 대리님과 대각선 자리에 앉은 선 과장님이었다. 이메일을 클릭해 열자마자 헉하고 숨이 멈췄다. 여태까지 받아본 그 어떤 업무 메일보다도 긴 장문의 메일이었다. 참조에 내 사수인 유연 선배가 들어가 있었다. 스크롤을 내리고 또 내리면서 읽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말하는 걸 잊어버렸다는 게 말이 되나요. 호텔 매니저와 컨택해보는 정도의 노력은 하고 나서 보고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앞으로 더 큰 일에서 실수하고는 ‘모르고 그랬다’라고 하면 누가 해결해 주나요. 지금 하는 일들이 다 작은 일 같아도 그런 게 이어져서 큰일이 되는 겁니다. 상사(商社)는 곧 서비스업입니다.


하나도 안 빼고 다 옳은 말이었다. 열심히 가르치는 것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긍정적인 마음도 잠시, 놀란 마음과 함께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장문의 메일을 읽고 있으니 마치 거칠게 던져진 공에 맞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겨우 진정이 되었을 즈음 짧게 답장을 썼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황해서 일찍 보고하려다가 걱정만 끼쳐드렸습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선 과장님이 큰 소리로 망신을 주면서 소리 내어 혼낸 것도 아니고 인신공격을 한 것도 아니니 적절한 가르침이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기분이 가라앉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모니터를 보다가 슬쩍 눈동자를 굴려 저쪽 분단에 앉은 보이는 선 과장님 쪽을 쳐다보니, 모니터 너머로 어깨를 덮은 선 과장님의 긴 머리카락만 살짝 보였다.

‘나는 언제 저런 베테랑이 될까.’

선 과장님이 업무를 대하는 마인드를 본받으려고 다시 메일을 정독했다. 


이윽고 퇴근을 앞둔 시간이 되어 텀블러를 씻고 자리로 돌아왔는데 사무실 전화기가 울렸다. 발신번호를 보니 권 차장님이었다. 입사 첫날 가장 처음 마주쳤던 부서원이자, 지금 가장 많은 업무를 함께 하고 있는 분이다. 지방 출장지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차장님은 간단한 업무를 부탁하셨고, 그 일을 다 끝낸 뒤 내가 다시 전화를 걸어 일이 완료된 걸 알려드렸다. 차장님은 고맙다는 인사를 끝내고 잠시 공백을 두고 말을 이었다.

“기유 씨, 저기···. 어때요? 이제 세 달 되어 가는데.”

갑작스러운 질문. 그것도 지방 출장지에서 전화를 걸어서 꺼낼 얘기인가 싶은 질문에 잠시 대답이 궁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요즘 일도 많아지고 바쁜 것 같은데 힘든 일 있으면 말해요. 기유 씨가 워낙 내색을 안 하는 것 같아서. 힘든 일 있거나 안 좋은 일 있으면 누구한테 말하겠어요? 저한테 말하세요.”

가슴속에서 뜨거운 불덩어리가 퍼지는 느낌이 들더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떨려 나올 것 같아 잠시 온 힘을 끌어 모아 정신을 집중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헤헤······. 네, 감사합니다!”

한 손으로 콧대를 누르며 눈물을 참고 있는데 수화기에서 나온 목소리가 귀를 감쌌다.

“그리고, 저···. 할머니하고 계속 지내요? 어때요? 거기도 세 달 됐겠네.”

놀란 나는 초점 없이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뭔지 모를 진한 감동이 스며들었다.



퇴근에 들뜬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홀에 서 있었더니 장 대리님이 옆에 다가와 섰다. 같은 부서지만 겹치는 업무가 없어 아직은 서먹한 사이였다. 그래도 회식도 하고, 출퇴근 길에 마주치면서 대화를 나눌 기회는 많았다.

“기유 씨, 무슨 일 있었어? 평소랑 달라 보이네? 아니,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으면 퇴근 때 이렇게 녹초가 되어 있어? 응?”

“그래요? 하하.”

장 대리님은 외근 때문에 호텔 사건을 모를 것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던졌을 농담에도 위안이 되었다. 과장님은 넥타이를 당겨 살짝 풀면서 말했다.

“어휴, 이제 쿨비즈(여름에 가벼운 옷차림과 넥타이 미착용으로 지나친 에어컨 사용을 줄이자는 캠페인)도 끝나가니까 오랜만에 넥타이 해봤는데 너무 갑갑하네. 난 뭐, 회사는 다니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라고 생각해, 견디는 거. 그렇게 생각해 봐. 그러면 더 수월해 지거든.”

표정을 쳐다보니 장난스러움이 가득했다. 권 차장님도, 장 대리님도 어쩌면 이렇게 타이밍을 꿰뚫어 본 듯 위안을 던질까? 신기하게 생각하던 찰나, 장 대리님이 쾌활하게 말했다.

“기유 씨, 할머니랑은 잘 지내요? 그때 첫 회식 때 말했던 할머니랑 지금도 지내고 있는 거죠?”

내가 놀란 얼굴로 쳐다보자 장 대리님은 작은 눈을 끔뻑였다.

“왜? 이제 같이 안 살아요?”

“아, 아뇨. 권 차장님도 같은 거 물어보셔서요.”

“권 차장님 오늘 안 계시지 않나?”

“네. 출장 가셨는데 전화로 물어보셨어요.”

장 대리님은 큰 소리로 웃으며 “못 말리는 분이셔.”라고 혼잣말했다. 만원 엘리베이터에 타고 침묵을 지키다가 로비층에 내려서야 대답했다.

“할머니랑 잘 지내고 있어요. 같이 식사도 많이 해요.”

“할머니도 얼마나 좋으시겠어? 말동무도 생기고. 기유 씨가 좀 잘할까. 아무튼, 잘 들어가요!”

호쾌하게 한 팔을 들고 멀어지는 과장님의 뒷모습을 볼 땐 이미 오늘의 씁쓸한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 동안 생각에 잠겼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이름은커녕 존재도 모르던 사람들이 어느새 내 생활에 대해 알고 식구의 안부를 묻는다. 인연의 신비로움이란 얼마나 재미있는가. 어느새 호텔 해프닝은 할머니의 안부에 대답하는 동안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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