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기유 Nov 25. 2024

할머니가 궁금해


지난 이야기: 할머니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던 중, 할머니의 첫사랑 이야기가 궁금해진 나는 식사 자리에서 질문을 해 본다.



“첫사랑?”

갑자기 모르는 외국어라도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쑥스러운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갑자기 웬 첫사랑? 너 요즘 무슨 일 있냐?”

“저요?”

생각지 못한 반격에 사레가 들렸다. 컥컥거리며 물을 넘기는 나를 기다리지 않고 할머니가 이어서 말했다.

“너어, 얼마 전에는 베란다에 서서 달 쳐다보더라?”

“제가요? 아아, 그날?”

휘영청 밝은 달을 보고 그 자리에 붙박여 한참 쳐다본 날이 있었다. 달과 관련된 지난날의 추억이 떠올라 한참을 바라봤었다. 하지만 첫사랑과는 관련이 없었다.

“이그, 네가 첫사랑 생각나는 걸 뭘 나한테 묻고 그러냐.”

“저 첫사랑 생각 안 했는데요?”

“그럼 갑자기 그런 걸 왜 묻는데?”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봤어요. ‘첫사랑이 생각나는 순간’. 남자들은 술 취했을 때래요.”

할머니는 인상을 한 번 찌푸렸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여자는 추억의 장소나 물건을 봤을 때래요.”

할머니 반응은 시큰둥했다. 눈을 내리깔고 국을 떠먹는 데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그래서, 너는 언제 생각나는데?”

“할머니가 말 안 해주시는데 제가 왜 말해요? 흥.”

“내가 뭘 말을 안 해?”

“할머니 첫사랑 생각날 때 있으신지 물어봤잖아요.”

“으응.”

할머니는 티슈를 뽑아 입술을 거칠게 슥슥 문질러 닦고는 흥미라고는 없는 얼굴로 말했다.

“첫사랑 그런 거 없지. 옛날엔 지금처럼 이성을 만날 일도 많이 없었어요. 첫사랑 그런 게 어딨어?”

실망한 나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할머니가 조선시대 사람은 아니잖아요. 아니, 조선시대 사람이라도······. 정말 없으세요? 부끄러워서 그러세요?”

내가 할머니 팔을 콕콕 찌르자 할머니는 그저 그런 행동이 귀엽다는 얼굴로 웃었다. 첫사랑 얘기를 애써 숨기는 기색이 전혀 없어서 단박에 김이 샜다. 

“그럼 첫사랑 말고 그리운 사람은 있어요? 떠오르고, 보고 싶은 사람.”

할머니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깊게 내리깔았다. 턱의 저작운동이 점점 느려졌다. 갑작스러운 정적에 가슴 안쪽의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할머니를 울리는 건 아니겠지? 괜한 얘기를 꺼낸 게 아닐까? 내심 걱정하며 안색을 살피던 중 할머니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나한테 형제가 아주 많았어. 위로 언니 오빠가 많았지. 동생도 있지만. 우리 큰언니가 엄마 대신이었어, 우리 언니가 말이야. 보고 싶다기보다는 가끔 생각이 나지. 우리 언니가.”

할머니의 어릴 적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런 어린이를 보살피는 어느 여자 아이를 떠올렸다. 흑백사진에서 보던 거친 옷감의 흰 한복을 입은 1930년대의 어린이를. 자기도 어린이면서 더 어린 동생을 챙기는 의젓한 어린아이를. 그런 기특한 아이도 이제는 이 세상에 없다. 70년이 넘는 시간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 허무함에 잠시 맞은편 벽만 멍하니 바라봤다. 슬프다고 해야 할까, 아프다고 해야 할까. 할머니는 멀쩡히 식사를 하는데 내가 밥숟가락을 들기가 힘들어졌다.



햇살 좋은 어느 가을날, 회사에 휴가를 내고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늦잠이라고 해도 여덟 시였지만 평소보다 푹 자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가볍게 외출 준비를 하고 거실로 나왔더니 할머니도 겉옷과 모자를 걸치고 외출을 하시려던 참이었다. 

“약속 있다더니 벌써 나가니?”

“천천히 걸어가 볼까 해서 미리 나와 봤어요. 할머니도 나가세요?”

“어, 나 장에.”

“장? 어디 장 서요?”

“우리 아파트 마당에 매주마다 장 서.”

우리는 함께 나가 현관문을 잠갔다. 할머니는 내가 팔을 내밀어도 지팡이에 의지하며 천천히 걸었다. 함께 나란히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려 멈춰 섰다. 이 공간에 할머니와 함께 서 있다는 게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처음이다시피 했다. 할머니도 어색한지 한 번 눈을 맞추고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시원하고 청량한 초가을 바람이 뻥 뚫린 복도와 엘리베이터 훑고 지났다.

1층에 내리자 평소에는 잠가놓는 한쪽 출입구까지 모두 개방되어 있어 그리로 나갔다. 눈부신 햇살에 저절로 손을 들어 가리게 되었다. 따가운 가을볕이었다. 오래된 단지라 아스팔트가 울퉁불퉁하여 걷기 불편하여 할머니는 잠시 내 팔을 빌리겠다고 하고 있는 힘껏 팔짱을 꼈다. 앞동 너머 아파트 정문 안쪽으로 과연 그럴듯한 장이 서 있었다. 햇빛을 가리도록 간이천막도 있었고 과일, 야채, 생선 등 식재료가 펼쳐져 있었다. 본가 아파트단지에 서는 장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부족할 건 없어 보였다. 달콤한 과일향, 풋풋한 생야채와 비릿한 생선 냄새가 동시에 코를 자극했다. 평소에 출근할 때 몰랐던 세계가 잠시 이 아파트에 열리고 있었다. 잠시 같이 돌아볼까 하고 마음이 동해 시간을 확인하니 여전히 여유는 많았다.

“할머니 얼마나 사실 거예요? 기다렸다가 들어다 드리고 갈게요. 아직 시간 많거든요.”

“무슨 소리야? 너 약속 가야지. 나는 매번 혼자서 장 봤는데 뭘.”

할머니도 햇살에 눈을 잔뜩 찡그리고 간신히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때 상인 중 한 명이 말을 걸었다.

“어르신 나오셨네? 같이 오신 분은 누구?”

할머니는 갑자기 웃는 얼굴로 표정을 바꾸더니 그 상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우리 손녀. 요즘 같이 살고 있어요.”

“아······, 손녀? 손녀가 있었어요?”

상인은 잠시 놀란 얼굴로 나와 할머니를 번갈아 보았다. 내가 인사하자 상인은 정신이 든 듯 손님을 맞는 얼굴로 변하더니 목소리 톤을 높였다.

“아유, 손녀가 대학생인가 보네.”

“아니, 회사 다니는데 오늘 휴가를 냈대.”

“아, 그러시구나. 이거 오늘 아침에 바로 떼 온 거. 봐 봐요.”

그 상인 외에도 여러 다른 상인들이 할머니와 대화하고 나와 인사를 나누었지만 아무도 ‘아들’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대화 내용을 보니 안부나 신상 정보도 어느 정도 아는 사이들 같은데 ‘미국에서 온 손녀?’ 하는 질문도 없었다. 그저 나는 갑자기 나타난 ‘존재도 모르던’ 손녀일 뿐이었다. 절뚝이며 내 팔을 꽉 붙든 할머니의 손아귀 힘이 가냘프게 느껴져 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