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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작 Nov 06. 2021

소품은 맛있다.

소품용 파프리카는 맛있었다.

*김밥과 월남쌈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입으로 가는 손짓을 참아가며
먹기 좋게 잘 배치하여 식탁에 올린 뒤,
젓가락으로 하나씩 집어먹는 것이다.




촬영을 하면

가끔 소품으로 쓰임이 다한 식재료들이 버려지는 경우가 있다.

버리기 너무 아깝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버려야 하는 경우도 충분히 이해한다.


촬영이 끝나고

소품용장바구니 안에 들어있던 식재료들이 있었다.

대파,,소세지,느타리버섯,김,

그리고 이름모를녹색채소(미안)


저 중 김과 이름 모를 녹색채소를 제외하고는

자취를 한다는 강력한 이유로 나의 가방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마침 대파를 사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도 타이밍이 좋을 수가.

촬영으로 돈을 번 사실보다

대파를 얻었다는 기쁨이 미세하게 앞섰다.

(입금되면 돈이 대파를 가볍게 이길 거예요.)


유독 양이 많았던 .

막상 들고 오긴 했으나,

저 많은 를 어떻게 처리할, 아니 어떻게 섭취할지 고민했다.

(듣는 파프리카가 기분 나쁘지 않게 '처리'취소할게요.)

간단하면서 손쉽게 해 먹을 수 있는 무언가를 생각해보았다.

각종 효능이 넘치는 저 를 어떻게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지.

사실 어떻게 먹어도 소문 안 날걸 알기에,

'월남쌈' 이라는 빠른 결론을 내렸다.


마트에 가서 필요한 재료들을 이것저것 담는 중에,


"잠깐만... 이거... 배 보다 배꼽이 더 큰 거 아니야?"


장바구니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재료들을 보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

나는  '하나'만 갖고 있는데,

나머지 재료를 다 사서 월남쌈을 만드는 건........?

주인공보다 조연들 몸값이 더 비싸고 비중도 큰 것이 아닌가.

담아둔 재료들을 바라보고 합리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래... 있으면 먹을 거잖아.'

'월남쌈은 살도 안 찐대.'

'있을 때 쓰는 거지 뭐.'

'두고두고 몇 번 먹으면 될 거야.'



이미 계산대에 바구니를 올려놓고

울려대는 삐익-삐익-소리에 주섬주섬- 

카드를 꺼내 들고 있었다.

신나는 발걸음에 식재료들이 들썩이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오늘 하루 첫끼를 저녁 늦게 먹게 되었다.

배고픈 만큼 속도가 매우 빨랐다.

씻는 속도부터

로션을 바르는 속도까지.


온갖 식재료들을 준비해 놓고 월남쌈을 만들기 시작했다.

쌈을 싸는 속도부터

그릇에 올려놓는 속도까지

배고픈 만큼 눈부시게 빨랐다.


빠른만큼 생략되어 가고 있는 모양과 데코레이션.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라고 했던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나에겐

완성된 떡은 다 맛있을 거다. 이게 더 합리적인 말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우당탕 이래 저래 얼렁뚱땅-


나 자신에게 가장 칭찬해 주고 싶은 순간이었다.

만드는 내내 하나도 주워 먹지 않았다는 것.

이건 만들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그게 얼마나 칭찬받을만한 일인지.


젓가락으로 품격 있게 먹고 싶었지만,

마구잡이로 쌓아 올린 월남쌈은 짧지만 빠른 속도로 서로에게 정이 붙었고,

마음은 아팠지만 그 정을 떼어내려 맨손으로 먹기 시작했다.

못 먹어서 아픈 것보다 마음 아픈 게 나을 수도 있는 경우.



'잘 먹었습니다-'





사실...

김밥과 월남쌈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남이 만들어 주는 걸 먹는 것' 이다.


다음 촬영에는 양파가 소품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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