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몰양심과 아이의 치유력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림 그리기를 싫어했다. 미술교사인 어머니께서 "네 눈엔 사람이 이렇게 생겼냐", "너무 못 그린다", "창피해 죽겠다"고 매번 눈을 흘기며 지적을 하셨으니까. 어머니께서 마음대로 손 대어 고쳐놓으신 수행평가로 미술 시간에 A+를 받고 죄책감에 시달렸으니까(관련 글. 뒤늦은 생각이지만 그렇게 오염된 내신 성적을 이용하지 않고 수능으로 대학을 가서 다행이다). 고등학교 시절 마지막 미술 수업 이후 무언가를 그려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출산을 하고 나서도 아이의 미술 활동을 유도하지 않았고. 그런데도 아이는 연필이나 펜을 잡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낙서를 했고, 낙서는 도형이 되고, 도형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꽃이 되었다. 미술이란 부모의 개입 없이도 아이가 스스로 주도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놀이였다.
아이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그림을 그리며 나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연필이나 크레파스를 잡는 순간부터 케케묵은 부담감, 압박감, 수치심, 따분함, 귀찮음 등이 몰려왔다. 어깨와 가슴을 짓누르는 감정의 먹구름을 한 올 한 올 날려버린 건 아이의 웃음이었다. 왁스 바른 머리를 뾰족하게 그린 제 아빠 얼굴에, 뒷마당에 우뚝 선 나무와 새 그림에, 옥토넛 탐험선에 탑승한 콰지 그림에 아이는 의외로 쉽게 깔깔거리고 신나했다.
참, 나 지금 아이랑 있지.
여기엔 엄마가 없지.
그러니까 마음 편히 그려도 되지.
마음 편히 그렸더니 재미있었다. 마음 편히 그리는 그림은 명상이나 숙면과도 같아서 괜한 잡념을 날려주었다. 하지만 많이 그려서 종이 소비가 늘어 부담스러웠다. 며칠만에 항상 수북히 쌓이는 종이들.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나는 그 대부분을 폐기한다. 아이의 그림은 내가 멋대로 버릴 수 없으니 간직할 만한 그림을 아이가 직접 골라내고 나머지는 아이가 사진으로만 찍어 놓고 직접 버린다. 쓰레기가 늘어나는 일도, 매번 그림을 버리는 일도 마음 무거운 일이다. 그래서 아마존에서 제일 저렴한 스타일러스펜을 사서 아이패드에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패드에 그린다 해도 종이 소비가 없지는 않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그렸다가 지웠다가 수정도 쉬워서 아이도 나도 부담 없이 그림을 연습한다.
세상에서 제일 못하고 제일 싫어한다고 여기던 그림을 즐기게 되다니, 내게 아이는 진정 치유자다. 아마도 모든 부모가 자식에게서 치유 받는 부분이 있을 텐데, 무슨 양심으로 그들은 아이에게 “너 때문에 못 산다" “누굴 닮아 그 모양이니" “창피해 죽겠다" 같은 말들을 할까.
선도 삐뚤빼뚤하고 구도도 명암도 제 멋대로인 그림들. 아이와 내겐 창피하지 않고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