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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Dec 10. 2020

생각만큼 문제이지 않아요

좁은 세계관 속에서 심각한 어른들

*이 글에 담긴 교사에 대한 비판은 제가 겪은 극히 일부의 교사에만 해당됩니다. 진심으로 아이들을 위하는 훌륭한 교사분들 역시 어딘가에 분명히 계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글에 등장한 교사 어머니, 비판을 감수하고 자녀를 위해 방송에서 가감 없이 치부를 드러낸 용기에 진심으로 응원과 감사의 박수를 보냅니다.


유튜브에서 교육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교사인 어머니에게서 스트레스를 받는 아홉 살 난 여자아이의 사연을 접했다. 아이는 학교 숙제를 마치면 어머니에게서 검사를 받아야 했는데 어머니는 아이의 필체를 확인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글씨 이렇게 쓸래? 너 같으면 이거 읽고 싶겠어? 엄마가 그랬잖아. 학교 선생님은 깔끔하게 숙제하는 거를 좋아한다고.”

아이는 기껏 완료한 숙제를 지우개로 벅벅 지운다. 그리고 어머니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공부하는 데에도 지장을 미칠 것이고, 생활이 흐트러지면 친구들도 그런 아이를 사귀게 될 거고, 다 연결이 돼서 나중에 정신 차리기 힘들 텐데, 그러다가 사춘기 때 엄청나게 방황할 텐데…”


영상 아래로는 악플과 선플이 뒤섞여 있다.

‘그런 아이랑 사귀게 된다는 말을 한다는 거는 교사가 지금 학생을 차별하네.’

‘진심 교사란 사람이 저런 마인드라니.’

‘출연자들 욕하지 맙시다. 당사자가 되면 사람 다 똑같습니다.’


문제의 장면에서 눈길이 갔던 요소는 어머니가 컴퓨터로 시험 문제지를 작성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요즘 세상에는 손글씨를 쓸 일이 별로 없다. 쓸 줄은 알아야 하지만 굳이 잘 쓸 필요도 없고. 나의 경우 글씨를 잘 써보고자 또박또박 노력하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거야 개인의 취향 문제고, 굳이 남에게 글씨 좀 잘 써보라고 타박할 만한 객관적인 명분은 없다. 영상 속의 어머니도 말로는 글씨를 강조하시면서 본인은 컴퓨터로 일을 하고 계셨다. 물론 학교에 출근해서는 칠판에 판서도 하시겠지만 그렇다고 명필이 요구되는 일은 아니다.


그런데 겨우 아홉 살 난 딸아이의 글씨를 왜 그리 타박하셨을까? 아마도 그 분이 교사이기 때문에, 교사로서 매일 아이들의 숙제와 일기장을 검사하며 종일 글씨를 보시기에, 그래서 그 분의 삶에서 ‘글씨'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기에 ‘글씨'의 중요도 또한 필요 이상으로 커 보였을 것이다.


며칠 전 (역시 유튜브에서) 어떤 창업가가 세계관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을 들었다. 아직 삶의 경험이 적고 시야가 좁은 사람의 세계관이 5 정도의 크기라면 그에게 0.5 만큼의 이슈가 발생했을 때 본인의 세계 대비 10%나 되는 이슈이므로 엄청난 감정과 자원이 소모되지만, 세계관의 크기가 20인 사람에게 0.5 정도의 이슈는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요즘의 교사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과거 교사였던 나의 부모님을 비롯하여 내가 성장 과정에서 만난 교사들은 대부분 세계관이 좁았다. 그들은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교사가 되었기에 ‘학교'라는 환경을 벗어나본 경험이 거의 없다. 그들에게 학교란 세계관의 거의 전부다. 그래서 학교에서 아이들이 벌이는 모든 일이 그들에겐 굉장히 큰 이슈다.


고등학교 야자 시간에 줄곧 소설책을 읽었다. 영어 원서일 때도 있었고, 국내 유명 작가의 작품일 때도 있었다. 가끔 야자 감독 선생님이 다가와서 책 표지를 훑어보신 적은 있지만 1, 2학년 동안에는 독서에 제지를 받지 않았다. 그러다 고 3이 된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교무실로 호출하시더니 이렇게 물으셨다.

“너 <태백산맥>왜 읽니?”

“왜 읽냐고요?”

“응.”

“재밌어서요.”

“현대사 공부하려는 게 아니고?”

“네?”

“국사 과목 뒤쪽에 현대사도 있잖아. 그거 공부하려고 읽는 거 아니야?”

“(풉) 아닌데요.”

“그럼 읽지 마.”

“네?”

“난 네가 현대사 공부하느라 읽는 줄 알았지. 그냥 재미로 읽는 거면 읽지 마. 너 그거 읽는 거 내 눈에 한 번만 더 띄면 압수야.”

꽉 막힌 교사와 말싸움을 해봤자 나만 손해라는 걸 오랫동안 알았기에 나는 조용히 교무실을 나왔고, 교실에 가서 친구들에게 불평을 잔뜩 늘어놓았다. 그런데 멍청하게도 귀가 후에 집에서도 불평을 하여 역시 교사인 어머니로부터 이런 처분을 받았다.

“너 그걸 왜 학교에서 읽니? 이제 집에서도 읽지 마. 몰래 읽다가 걸리면 집에서도 압수야!”

중학교 시절 내가 열심히 토익 공부를 하면 ‘학교 시험이나 그렇게 신경 써보라'시던 어머니. 여름철 장염이 유행하여 아이들이 화장실을 들락거려도 좀처럼 조퇴를 허락하지 않던 고3 담임. 학교, 학교 공부, 학교 시험, 학교 성적이 세계관의 전부이던 두 교사의 합작으로 나는 <태백산맥> 읽기를 7권에서 중단해야 했다. (이후 수능이 끝나고 7권부터 다시 읽었는데 디테일이 기억나지 않아 앞부분을 한동안 뒤적거렸다.)


당시의 일을 현재 교사인 친구들에게 말하면 이런 반응이다.

“고 3이잖아.”

“네가 소설책을 읽으면 다른 애들도 다 읽을 테니까.”

“넌 성적이 좋으니까 관리 대상이었던 거지.”


나는 관리 받기를 원한 적이 없다. 세계관이 좁은 사람이 함부로 아이들을 관리하면 도리어 아이들을 망친다. 게다가 내가 소설책을 읽는다고 해서 따라 읽은 아이는 전혀 없었다. 내가 <해리포터>에 빠져 있을 때에도, 존 그리샴과 로빈 쿡에 빠져 있을 때에도, 아무도 그 책들을 따라 읽지 않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삶이 허망하다고 징징대어도 친구들은 “얘 왜 또 이래" 하는 반응이었고, <태백산맥>을 1권부터 7권까지 읽는 동안 아무도 관심 보이지 않았다. 만일 누군가가 따라 읽었다면, 나의 세계관에서 그건 좋은 일이다. 일 년에 한 권도 독서하지 않는 한국의 고등학생이 시중의 책을 나 때문에 단 몇 페이지라도 읽는다면 무한 영광인 일이다.


학교란 더 큰 세상을 위해 아이들이 통과하는 작은 사회일 뿐. 그 안에서 누가 글씨를 잘 쓰고, 누가 선생의 예쁨을 받고, 누가 모범생이고, 누가 개구쟁이인지는 앞으로 아이들의 인생에서 5%도 차지하지 못할 이슈다. 그런데 그런 이슈를 어른들이 관리한답시고 커다랗게 만든다. 공부 1등이 인생 1등이 될 것처럼 부풀리고, 말썽쟁이들은 인생 낙오자라도 될 듯이 수치를 준다. 학교 밖 인생이 얼마나 넓고 다양한지는 새까맣게 모르거나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좁은 세계에서 좁은 잣대로 아이들을 관리한다.


내 딸아이도 글씨가 예쁘지 않다. 양쪽 부모의 악필 DNA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므로 나는 아이를 타박할 자격이 없다. 게다가 아이는 내가 한 번도 다녀본 적 없는 미국 학교를 다니고 있으므로 이곳에서 필체가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지는지 나는 아무런 감이 없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도 글씨를 그리 중시하지 않고. 그래서 나는 조용히 뒤로 빠져 있기만 한다. 아이가 글씨를 쓰다가 짜증을 내면 등을 토닥일 뿐, 달리 할 일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숙제를 보고 글씨가 흐릿하여 선생님께서 보시기 불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by S

글씨가 흐릿한 이유는 아이가 연필을 제대로 깎지 않기 때문이다. 연필을 깎지 않는 귀차니즘 역시 나의 DNA다.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많은 친구가 나를 ‘필기 안 하는 애'로 기억하고 있다. 나는 연필을 깎는 건 둘째 치고 연필이나 펜으로 글씨를 적는 것조차 귀찮아하던 아이였다. 한 번은 한국지리 시간에 “너는 왜 한 마디도 받아 적지 않느냐"며 선생님께 야단 맞은 적이 있는데 그 정도로 글씨 쓰기가 귀찮았다(지리 시간에 필기를 하고 말고는 내 인생에 1%도 영향을 미치지 않은 이슈인데, 나는 시끄럽게 떠들지도, 졸지도, 딴 짓을 하지도 않았고 그저 부동의 자세로 수업을 들었을 뿐인데, 수업의 흐름을 깨어가며 나를 지적할 정도로 교사의 세계에서 필기란 커다란 이슈인가? 덕분에 필기는 더더욱 하기 싫었다).


귀찮은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면 더 귀찮아한다. 그래서 이번 블랙프라이데이에 전자동 연필깎이를 할인 구입하여 아이에게 조용히 건네었다. 연필 깎기가 수월하니 자주 깎고, 연필을 자주 깎으니 글씨도 알아보기 쉬워졌다.

by S

DNA의 교집합을 제외하고 아이의 세계는 나의 세계와 완전히 다르다. 나는 한국에서 자랐고 아이는 미국에서 자라고 있어 그 차이가 더욱 극명하게 와 닿지만, 만일 한국에 살았더라도 아이와 나의 세계는 여전히 달랐을 것이다. 거주지가 어디든 아이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나의 구닥다리 경험으로 왈가왈부할 수 없다. 그저 아이의 곁에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시야를 함께 넓혀가는 수밖에.




아이의 글씨에 대한 예전 글: https://brunch.co.kr/@jin8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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