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이 즐거워지는 기술
제일 좋아하는 집안일이 무엇이냐고 아이가 물은 적이 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집안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그 중에서 그나마 나은 집안일이 있는가, 곰곰 생각하는데 아이가 다시 물었다.
"나랑 노는 거? 나랑 노는 게 제일 좋아?"
"그럼, 제일 좋지. 근데 노는 건 집안일이 아니잖아."
"집안일이지. 집안일은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는 거잖아. 엄마랑 나랑 놀면 내가 행복하니까 집안일이지."
사실 나는 집안일을 싫어했다. 아주 싫어했다. 어릴 적부터 집안일을 별로 해 보질 않아 익숙하지 않았고 번거로웠다. 어머니께서는 퇴근을 하시고 나면 "집구석에만 들어오면 짜증이 난다"면서도 매일 매일 바닥에 엎드려 걸레질을 하셨다. 아버지께서 당신이 하시겠다고 나셔서도 어머니는 뭐든 직접 해야 마음이 편하다며 도움을 마다하셨다. 그러고 나면 저녁 준비를 하셨는데, 그렇게 차린 밥상에 감히 투정이라도 하면 "싫으면 네가 직접 만들어 처먹으라"고 하셨다. 식사 후에 어쩌다 내가 설거지를 도우면 어머니는 내가 씻은 그릇을 하나하나 확인하시곤 덜 씻긴 부분을 일일이 지적하셨다.
언젠가 부모님과 함께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딸에게 집안일을 시키지 않는 출연자의 사연을 접했다. 그녀는 딸이 밖에서 부림을 당하지 않도록 집에서도 가사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청소도 요리도 집에서 배우지 않은 여자는 밖에서도 그런 일을 할 줄 몰라 아무도 일을 시키지 않는 반면, 가사에 능통한 여자들은 손쉽게 노동력이 착취된다는 것이다. 그 말에 어머니는 맞장구를 치시며 당신이 내게 집안일을 가르치지 않은 이유도 같은 이유라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이 믿기지 않았다. 어머니가 집안일을 도맡으신 건 깔끔하고 강박적인 성격 때문이었으며, 그저 어린 아이일 뿐인 나의 능력을 불신하셨기 때문이고, 나의 실수로 더욱 커다래질 일들을 감당하기 싫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너는 가만히 있는 게 도와 주는 것" 또는 "그만 알짱거리고 저리 가라"는 말씀이 자꾸 입 밖으로 튀어 나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기에 그럴 듯한 사연이 방송되자 맞장구를 치시며 당신의 의도를 미화시킨 것이다, 라고 나는 해석하였다.
결혼과 육아에 대한 사회 뉴스를 보면 부부 간에 가사 분담이 상당한 갈등을 초래한다. 우리 부부 역시 그랬다. 다만 우리 부부의 경우 문제는 남편이 아니라 내 쪽이었다. 나는 집안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짜증을 내었고 남편이 열심히 해 놓은 집안일에 대해 지적을 하고 신경질을 내었다. 나도 모르게 어머니로부터 답습한 패턴을 완화시키는 데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혼 9년 차인 지금에서야 집안일이 조금 편해진 듯하다. 매일 밥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일이 무의미하고 귀찮고 번거로운 노동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그래서 조금은 즐겁다는 생각이, 이제야 조금씩 머릿속에서 깜빡깜빡 빛을 발한다. 더디게나마 변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집안일이 몸에 익어 습관적으로 해내는 남편과, 집안일을 도우며 기뻐하는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대손손 재벌이라 본인도 자식도 평생 입주 도우미를 두고 살 것이 아니라면, 또는 본인도 자식도 평생 노숙자로 살 것이 아니라면 인간으로서 집안일은 죽을 때까지 수행해야 하는 일이며, 수행하는 모습을 죽을 때까지 가족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 일이다. 그 일을 수행할 때마다 귀찮고 짜증스러워 원망을 쏟아내는 사람과, 그 일이 몸에 베어 습관적으로 묵묵히 해내는 사람, 그리고 그 일을 사랑의 마음으로 즐겁게 해내는 사람 간에는 삶의 질도 갈릴 뿐더러, 그들의 감정이 주변에 미치는 파장 또한 극명하게 갈린다.
그러므로 딸이 밖에서 부림을 당하지 않도록 가사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오래 전 중년의 모습으로 방송에 나온 출연자의 교육관은 딸의 인생에 전혀 도움되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그렇게 자란 딸은 '가사 = 힘겨운 노동 = 괜한 고생 = 내가 하면 손해'라는 공식을 머릿속에 심고 성장하여, 혹여라도 같은 공식을 가진 상대를 만나 결혼이라도 하면 가사 분담으로 오랜 기간 갈등을 빚을지 모른다.
아이는 요즘 바느질을 한다. 레깅스 무릎팍에 구멍이 나서 내가 꿰매 주겠다고 하였더니 제가 직접 꿰매겠다고 하여 시작한 바느질이다. 실을 바늘에 꿰어 왔다 갔다 구멍을 메우는 모습을 딱 한 번만 시범으로 보고 배운 바느질이라 물론 서투르다. 바느질 결과도 어른인 나의 눈엔 여전히 미흡하다. 그래도 그대로 둔다. 아이는 제가 꿰맨 옷을 기쁘게 입고 다닌다. 이제 제 옷뿐 아니라 내 옷까지 꿰매 주겠다는데 아무리 미흡해도 나는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아이가 널어 놓은 빨래, 아이가 개어 놓은 빨래, 아이가 자른 과일, 아이가 씻은 그릇, 아이가 닦은 식탁, 아이가 치운 제 방, 모두 미흡하지만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네가 준 사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