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이 즐거워지는 기술(2)
초등학교 6학년 때쯤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친구 댁에 놀러간 적이 있다. 어머니의 친구분도 어머니처럼 미술 교사였는데 개인적인 작품 활동을 병행하는 분이라 거실에는 캔버스와 미술도구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그림이 멋져 보여 그 자리에서 어머니께 이렇게 말했다.
“엄마, 엄마도 이렇게 작품 만들어 봐.”
그러자 어머니가 반문하셨다.
“그럼 너한테 밥도 못해 주는데? 너도 아빠도 쫄쫄 굶어야 돼.”
아, 어머니는 ‘요리'라는 중책을 맡고 계시지. 내가 주제 넘은 제안을 했구나, 하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20여 년이 지나 내가 부모가 되어 보니 어머니의 대답은 당신의 실체를 망각한 유세이자 생색이었다. ‘요리'라는 중책을 맡고 계신다 해도 어머니는 시간 여유가 많으셨다. "집구석에만 들어오면 짜증이 난다"는 신경질과 함께 가사를 하신 후에도 두세 시간 동안 TV 앞에 누워 계시다가 잠이 드셨고, 주말에도 드물게 나들이를 하지 않는 이상 TV 앞에 앉아 계셨고, 긴긴 방학도 2박 3일 정도의 일회성 여행을 제외하고는 TV 앞에 앉아 계셨다. 아버지께서도 집안일을 하셨으니 모든 가사가 어머니의 분담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너도 아빠도 쫄쫄 굶어야 한다"는 겁박 대신에 “작품이고 뭐고 나는 TV 앞에서 쉴 시간이 필요하다"고 대답하시는 편이 훨씬 진실성 있었을 테다. 어머니는 당신의 실체를 모르셔서 당신의 역할을 과대포장했다. ‘요리'가 중요한 역할이긴 하지만 그 역할을 하지 않으신다 해도 나머지 식구가 쫄쫄 굶을 만큼 바보는 아니다. 감자를 삶아 먹든 맨밥에 물을 말아 먹든(실제로 부모님이 외출하고 혼자 남겨지면 그렇게 밥을 먹곤 했다) 자기 생존에 필요한 일은 할 줄 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나머지 식구들을 ‘밥 쫄쫄 굶을' 바보로 깎아내림으로써 ‘밥 해 주는' 당신의 위상을 부각시키고, 주말 내내 방학 내내 TV 앞에서 뒹굴거리는 당신의 실체는 교묘하게 감추셨다.
어머니의 친구분께서 당시 어머니와 나의 대화를 들으셨을까? 들으셨더라면 ‘응? 난 우리 애들 밥 안 굶기는데' 싶으셨을 거다. 교사직과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그녀에게도 남편과 자식이 있었다. 자식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되었고, 심지어 나보다 모두 어린 아이들이었다. 쭈뼛거리는 나와 달리 붙임성이 좋던 그 아이들은 절대로 굶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요리'에 대한 어머니의 유세는 대단해서, 소풍날 아침 김밥을 싸는 일에도 이어졌다. 그나마도 이웃집 S양의 어머니가 대신 싸주시거나, 학교보다 먼 반찬가게까지 걸어가 내가 직접 구입하기도 했는데, 어쩌다 어머니가 직접 김밥을 싸게 되면 새벽부터 신경질이 대단하셨다. 한 번은 소풍이 기대되어 내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김밥 꼬다리를 집어 먹으며 재잘대었더니 어머니께서 버럭 짜증을 내셨다.
“네가 지금 얼마나 얄미운지 아니? 평소엔 깨워도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너 그러는 거 아니야!”
말씀이 논리적이지 않아 정확히 무엇이 불만이신지 단번에 파악되진 않았지만 평소 아침 기상을 힘들어하는 내가 웬일로 일찍 일어난 모양새가 얄미우신 것 같았다. 얄미우니까 소풍날 아침에도 늦잠을 자라는 의미인가, 싶어 고민이 되었으나 이후로 내가 소풍날 특별히 일찍 일어나는 일은 다시 없었다. 나는 혈압이 심하게 낮아 항상 아침잠이 많았고(지금도 많다) 소풍이라고 설레어 일찍 일어난 그날은 매우 예외적인 날이었다.
당시에는 나의 예외적인 행동이 얄미우실 수도 있겠다고 믿었는데,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정반대다. 평소 늦잠 자던 아이가 소풍날 기분이 좋아 일찍 일어났다면 그 모습이 귀여워야 한다. 이벤트를 기대하고 즐길 줄 아는 태도가 대견해야 하고, 그 긍정적인 태도에서 부모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을 줄 알아야 한다. 새벽부터 김밥을 만드는 노동이 번거롭기는 하지만 그런 노동도 아이를 위해서라면 즐겁게 할 줄 알아야 한다. 게다가 아이를 직접 깨울 필요가 없어졌으니, 안 그래도 할 일 많은 소풍날 아침에 할 일 하나가 줄은 셈이므로 마음 먹자면 아이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도 있다. 무엇보다 평소 허약하던 아이가 모처럼 활기찬 날이라면, 마음 먹지 않아도 절로 기뻐야 한다.
반면 자신의 수고를 내세우고자 아이의 들뜬 기분까지 짓밟는 부모라면 정말로 궁금하다. 대체 아이를 왜 낳으셨는지. 일 년에 단 두 번, 소풍 도시락을 준비하기도 싫으시고, 아이가 소풍을 기대하는 모습조차 꼴보기 싫으시다면 대체 아이를 왜 낳으셨는지.
전업주부라면 김밥을 새벽에 말든 한밤에 말든 쉽사리 불평하지 못했을 거다. 어차피 자기 몫의 일이라 여길 테니까. 반면 (일부) 맞벌이 부모는 가사를 ‘추가 노동'으로 인식하고 불만을 마구 쏟아내기도 한다. 불만스럽더라도 아이는 잘못이 없다. 배우자 탓, 직장 탓, 사회 탓은 해도 되지만 아이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래도 붙들고 이야기할 사람이 아이밖에 없다면 아이를 비난하는 대신 아이에게 도움을 청하면 된다. 아이는 집안일이 서투르다고? 그러는 당신은 처음부터 집안일을 잘하셨나? 일찍부터 아이와 가사를 함께 하든지, 가사를 도맡으며 아이에게 유세를 떨든지, 선택은 부모의 몫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내 삶이 곧 내 메시지(My life is my message)”라고 했다. 간디뿐 아니라 누구든, 그(녀)의 삶은 곧 그(녀)의 메시지다. 저항하는 삶은 저항에 대한 메시지를, 순종하는 삶은 순종에 대한 메시지를, 게으른 삶은 게으름에 대한 메시지를, 분주한 삶은 분주함에 대한 메시지를 준다. 부모의 삶도 마찬가지. 근면한 부모는 근면함에 대한 메시지를, 방탕한 부모는 방탕함에 대한 메시지를, 권위적인 부모는 권위에 대한 메시지를, 공부하는 부모는 공부에 대한 메시지를 준다. 그 메시지는 부모가 공갈과 협박을 동원하여 미화해봤자 미화되지 않는다. 눈으로 본 실체가 있는데 귀로 들은 유세를 믿을 만큼 자식들은 바보가 아니다. 어린 나이에는 잠시 속을지 모르지만 자식은 영영 어린 아이이지 않다.
코로나 사태로 재택근무 중인 남편, 그리고 프리랜서로 일하는 나는 어제 하루 내내 일에 몰두하느라 요리를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아침엔 시리얼과 과일을 먹었고, 점심엔 전날 먹다 남은 파스타를 데워 먹었다. 역시 코로나 사태로 원격 수업 중인 아이는 간간히 제 방에서 소리 높여 엄마나 아빠를 찾았다. 그래서 방에 들어가 보면 “선생님이 동화책을 읽어준다는데 들어볼래?” 또는 “이제부터 친구들이 발표할 건데 들어볼래?” 하였다. 바빠서 안 된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냥 앉아서 들었다. 들어 보니 재미있었다. 학교 수업이 모두 끝나고 세 식구가 다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이후 아이는 역시 온라인으로 미술 학원 수업을 들었다. 그 다음엔 학교 숙제를 했고, 혼자서 책을 읽었다. 나는 금방 일이 끝날 듯하여 계속 붙들고 있었는데 막상 끝내고 나니 벌써 저녁 일곱 시였다. 남편은 아직도 일을 하고 있었고, 밥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아이도 별로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빵을 조금씩만 먹자고 하였더니 다들 오케이하였다. 나는 과일을 깎았고, 아이는 식탁을 차렸다. 식사 후에는 요즘 새로 배운 쿠브(Kubb)라는 스웨덴식 비석치기 놀이를 했다. 잠들기 전엔 지원이와 병관이 시리즈의 <먹는 이야기>를 읽었는데 이런 대화가 있었다.
지원: 엄마, 나 스파게티 먹고 싶어요.
엄마: 저녁엔 밥 먹어야지. 스파게티는 나중에 해 줄게.
그 구절에 딸아이가 물었다. 저녁엔 왜 밥을 먹어야 하느냐고. 나는 주인공 엄마 캐릭터의 개인적인 믿음일 뿐이라고 답해주었다.
내 삶이 아이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얼지는 아이가 결정할 일. 시리얼과 밀가루와 과일만 먹은 어제의 영양 부족을 오늘의 생선 구이와 김밥으로 보충했으니 나로선 그걸로 됐다. 생선 손질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가 유세를 떨지도 않았고, 김밥 재료 준비가 얼마나 번거로웠는지 남편이 생색을 내지도 않았으니, 생선 반찬에 아이가 점심밥을 두 그릇 먹었고, 저녁엔 다같이 김밥을 말면서 즐거웠으니, 충분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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