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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디락스 Oct 14. 2022

이제, 아빠와 끝이구나 생각했다


내 인생에 누군가에게 큰소리로 화를 내 본 기억은 그때가 유일하다. 썩은 동아줄을 잡고 간당간당 이어가던 아빠와의 관계는 그날 싹둑 잘려버렸다. 29살 겨울이었다.




27살 나는 낮에는 대학원 수업을 받고,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새벽까지 대학원 과제를 하며 지냈다. 소개팅 약속을 했는데, 과제가 산더미라 나갈까 말까 고민했다. 국방색 스판바지에 도서관 갈 때 입는 사슴이 그려진 7부 티셔츠를 입고 나갔다. 스테이크집 1층에서 만나기로 했다. 택시에서 내리니 소개팅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딱 봐도 소개팅하러 나온 남자가 저기 서있었다. 머리에 무스를 잔뜩 바르고 나왔다. 지혜 언니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그 남자였다. 언니가 같은 부서 이 남자를 칭찬할 때면 나는 물었다


“언니, 그럼 언니가 이 남자랑 결혼해.”


그럼 언니는 대답했다


“진아야. 진짜 다 좋은데 내 스타일은 아니야. 난 외모 보잖아”



스테이크 가게에 가려다가 그냥 2층 샤브샤브 집에 가자고 했다. 밥이나 배 터지게 먹고 집에 가야지. 국방색 바지를 입고 나오길 잘했다. 스판이어서 칼국수 사리까지 먹어도 허리가 쭉쭉 늘어났다.


기숙사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저기 길가에 소개팅남의 차가 세워져 있었다. 보자마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남자와 너무 잘 어울렸다. 민트색 레이였다. 며칠 전에 샀다고 했다. 아직 뒷좌석에는 비닐이 씌워져 있었다. 회사에 입사하고 모은 돈으로 일시불로 샀다고 했다.


이 남자를 계속 만나게 되면 결혼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두 번 만나게 될지 말지는 모르지만, 그냥 몇 번 만나다가 끝나지는 않겠구나 생각했다. 나를 기숙사에 내려주고 갔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기숙사에 왔다. 아르바이트 장소까지 데려다주고 떠났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도서관까지 데려다주고 또 떠났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결혼하기로 했다.29살 겨울이었다.


아빠는 결혼을 결사반대했다. 나는 아빠에게 물었다.


“사람 착하고, 직장 안정적이고, 우리랑 집안도 비슷하잖아. 뭐가 문젠데?”


아빠는 대답했다.


“남자가 집을 해와산다. 햇살림에 빚졍 보낼 수 어쪄.”

(남자가 집을 해와야지. 빚지고 시작하는 결혼 반대한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빠와 간당간당 이어가던 마음속 썩은 동아줄이 활활 타버렸다. 평생 누구와 크게 싸워본 기억이 없다. 화가 나면 눈물이 먼저 나서 싸움이 안된다. 이날 처음 알았다. 사람이 진짜 화가 날 때는 눈물도 안 나는구나. 큰소리가 오갔다.차분한 목소리로 아빠 심장에 칼을 꽂고 싸움이 끝났다.


“그럼 이젠 신경꺼. 결혼 허락해 달라는 게 아니고, 그냥 결혼한다고 알려주는 거야.”


아빠는 담배를 꺼냈고, 불을 붙였다. 담배 냄새가 역겨웠다. 나는 집을 나왔다. 남자 친구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빠가 집 때문에 결혼을 반대한다고 말하기가 창피했다. 아빠는 남자가 집을 해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 생각의 배경에는 등등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빠를 두둔하며 이야기할 만큼 아빠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 한참을 혼자 걸었다.


내 명의로 된 집도 없고, 물려받을 재산도 없고, 정서적인 지지도 없던 나의 인생에 단 하나 남아 있던 것은, 어쩌면 나를 살게 했던 그것은 ‘나의 의지대로 나의 삶을 만들어나간다는 믿음'이었다. 아빠는 나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건드렸다. 나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남자 친구를 불렀다.


“아빠가 집 안 해오면 결혼 안 시켜준대. 그냥 우리끼리 결혼하자”


며칠 뒤에 남자 친구는 자금 계획서를 만들어 왔다. 2부 인쇄해서 투명 파일철에 담아 왔다. 지금 수입이 적혀 있었고, 몇 년 뒤에 어떻게 집을 마련할 것인지 정리되어 있었다. 남편은 나를 달래고 달래서 친정집으로 갔다.자금 계획서를 쓱 훑어보더니, 아빠는 마지못해서 해주는 것처럼 우리 결혼을 허락했다. 아빠가 대단한 인심을 쓰는 것처럼 말할 때마다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몇 번 자리를 박차고 나갈 뻔했다. 남편이 조용히 내 등을 만졌다. 아빠가 ‘귀하게 키운 둘째 딸’이란 말을 하는 대목에서는 우리 집에 나 말고 둘째 딸이 하나 더 있나 생각했다.


사실 아빠는 알고 있었다. 무게 추가 기울어진 결혼이 아니었다. 좁은 제주도에서 다 소문이 날 만큼 사돈댁은 인품이 훌륭하신 분이었다. 양가 모두 농사를 지었다. 자신이 채워주지 못한 ‘딸을 향한 조건 없는 지지와 사랑’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아빠는 알았다.


2015년 1월 18일 우리는 결혼했다. 엄마는 구석에서 축의금을 세면서 웃고 있었다. 아빠는 울었다. 아빠는 혼자 눈이 빨개지도록 울고 있었다. 자금 계획서에는 ‘5년 뒤 아파트 구매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결혼 당시 나의 전 재산은 304만 원이었고, 남편은 학자금 대출에 발이 묶여 있었다. 우리는 새마을 금고에서 2,000만 원을 대출했다. 둘 다 결혼자금조차 없었다. 물론 아빠한테는 비밀이었다. 산더미 같은 빚을 가지고 시작한 결혼은 해를 거듭할수록 좋아졌다. 아이를 둘 낳을 때까지도 민트색 레이를 타고 다녔다. 우리가 만난 지 7년째 되는 해, 우리는 일시금으로 흰색 SUV를 샀다. 다음 해 아파트도 샀다. 민트색 레이를 타고 지나갈 때면 우리는 언제쯤 이런 아파트에 살아볼까 생각하던 그 아파트를 샀다.


아파트 계약을 하던 날, 문득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는 결혼식장에서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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