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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디락스 Oct 14. 2022

부모와 불안정 애착을 맺은 채 어른이 되었다(2)


그때만 생각하면 개 빡친다. 첫아이가 태어난 지 80일쯤 되었을 때다. 자연분만하고 꿰맨 회음부는 이제 거의 상처가 아물었지만, 임신하면서 뒤룩뒤룩 쪄버린 몸은 아직도 무거웠고, 걸을 때마다 무릎이 아팠다. 무엇보다 매일 밤 5번은 기본으로 깨는 아이 때문에 잠을 잘 못 자서 나는 거의 미친년이었다.


아이가 열이 났다. 너무 어려서 동네병원에서 받아주지 않는다고 대학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제주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요로감염이었다. 그때의 나는 미친년이었기 때문에 '요로감염 = 방광염 = 며칠 약 먹으면 됨'이라는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요로감염 이란 단어에서 내 멋대로 ‘감염’이란 단어에 하이라이트를 긋고, 손을 달달 떨면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남편은 근무 중이었고, 제주대학병원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사는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는 대뜸 “지금 화장을 안 해서 나가기 힘든데.”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를 끊어버렸다. 엄마가 뭐라고 웅얼웅얼하는데 그냥 끊어버렸다. “지금 화장 안에서 나가기 힘든데.”라고 말하고 한템포 쉬고 “지금 어딘데?” “30분 후쯤 도착할 것 같다.”라는 말이 아마도 이어졌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엄마 아빠랑은 이제 진짜 끝이야. 도움받을 생각 없으니까 내 앞에 나타나지만 말아줘.”


정신병원에서 나온 검사 결과대로 나는 분명 ‘부모와의 애착 관계’에서 문제가 있었다. 무시형 불안정애착이었는데,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관심이 충족되지 않은채 어른이 되었다. 요로감염 사건만 보더라도 그랬다. 내 마음속 어린아이는 아직도 사랑을 갈구하며 삐지고, 화내고, 서운해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안정 애착의 자존감이 건강한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남편과 지내면서 내 자존감은 정상치를 회복했다. 길거리에서 만난 누군가가 나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가면 “뭐, 날 보지 못했겠지. 다른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을 수도 있고.”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 내가 “저 사람 나한테 뭐 화난 거 있나? 내가 뭘 잘못했지?”라고 생각하던 건 이미 과거였다.


끝이 아니었다. 나의 정신 문제는 아이를 낳고 나니 그대로 반복되었다. 까만 손발과, 동그란 눈, 짙은 눈썹까지 나와 똑같이 생긴 이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어릴 적 내가 부모에게서 느꼈던 감정을 또다시 반복해야 했다. 이건 고문이었다.


아이가 커가면서 내 머릿속에 지배적인 생각은 “어떻게 이렇게 이쁜 아이를 귀찮아할 수 있지?” “어떻게 이렇게 작은 아이들 앞에서 물건을 던지며 싸움판을 벌일 수 있지?” 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엄마가 날 안아준 기억이 없어.." 단 한 번도 “엄마 아빠가 나를 이렇게 밤낮으로 헌신적으로 키워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번은 이런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내가 입양이 보내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이다. 첫딸을 낳고, 아들을 학수고대하다가 둘째도 딸이 태어났다. 엄마는 시어머니에게 아들이 아니라고 구박을 받고는 울었다고 했다. 아이를 또 낳아야 하는구나 싶어서 눈물만 났다고 했는데, 그럼 나를 입양 보냈으면 어땠을까.미국보다는 뉴질랜드나 핀란드처럼 사회복지가 잘되는 나라가 좋겠다. 내가 추위를 좀 많이 타는 편이라서 날씨가 따뜻한 오스트레일리아도 나쁘지 않겠다. 커다란 엉덩이가 그대로 드러나는 검은 레깅스에, 딱 달라붙는 러닝을 입고, 빵빵한 책가방을 메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면서, 해변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기에 이르렀다. 튜나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빨아들이마시니 얼음만 남은 커피에서 끽끽 소리가 난다.


끽-

끽-


여기까지 상상력이 발동되면 급제동을 걸어야 한다. 여기서 생각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이런 생각까지 할 뻔했다. 엉성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으러 한국을 방문한 나다. 오명자 강익선이 아무리 울며 매달려도 눈물 한 방울 안흘려 줄 테다. 끽끽 정신을 차려야 된다.


내가 나의 부모와 맺은 애착 관계와 나의 자존감, 행동 패턴이 나의 아이에게 그대로 유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 다짐을 했다. 내가 이 아이에게 물려줘야 하는 것은 부동산이 아니라 건강한 마음 상태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내 마음과 성격과 행동 패턴을 고쳐먹는데 집 한 채의 값이 든다고 해도, 그래서 아이에게 집 한 채를 물려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선택권이 없었다. 나의 아이가 나와 똑같은 심리적인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내가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난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너무 극단적이게 보일까 봐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만약 아이를 낳기 전에 이 사실을 알았다면 나는 아이를 낳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태어나 버렸다. 안타깝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둘째 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좀 아쉬워하긴 했지만, 그래도 입양은 보내지 않았다.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엄마는 사는 게 힘들어 다정하게 안아주거나 웃어주지 않았다. 2살 차이 나는 남동생과 차별을 받았다. 조금 일찍 결혼했고. 육아가 뭔지도 모른 채 아이를 낳아버렸다. 그리고 엄마 아빠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버렸다. 여기까지는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집 한 채 값을 주면 이 중 하나라도 바꿀 수 있다 한다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돈을 내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지나버린 일이었다.


그럼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상황에서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아이를 건강하게 키울 수 있을까. 내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더라도, 해답만 제시해 주는 사람이 나타나길 바랐다. 5억 정도는 지급할 의사가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답을 알게 되었다.


이까짓게 해결책이 되겠냐고, 하늘에 붕붕 떠다니는 구름처럼 그냥 듣기 좋은 말 아니냐고 의구심을 가지는 내가 마음 한편에 있었지만, 답은 한가지였다 명확했다


그건 ‘받아들임’, 즉 인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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