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사람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거야 ep.2
“내가 매일매일 잊지 않고 하는 것♪ 세수하기 이 닦기, 학교 가기, 구몬 하기♪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 가지 구몬!♪ 선생님과 함께하는 구몬영어♪”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언제 어디서건 이 노래가 bgm으로 깔린다. 국민학교 1학년, 학교 수업을 마치고 나면 보라색 네모난 책가방을 메고 집으로 걸어왔다. 고학년인 언니는 아직 집에 없고, 아직 유치원을 다니던 남동생도 없는 텅 빈 집에 엄마는 거실에 앉아서 빨래를 게거나 아니면 한쪽 다리를 접고 앉아 고구마 줄기를 다듬고 있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30년이 더 지난 어릴 때 기억인데 어떤 기억은 신기하리만큼 참 선명하게도 오래 남는다. 언니도 없고 동생도 없고 아빠도 없고 엄마만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마치 토마토가 과일이 아닌 야채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나, 어떤 나라는 더운 여름날 크리스마스를 보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처럼 익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책가방을 내 구석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나서 주방 구석, 냉장고와 벽사이 작은 틈 사이에 끼이듯 쏙 들어가 있는 플라스틱 앉은뱅이책상을 챙겨 와 거실에 펼쳐 놓았다.
탁, 탁, 탁, 탁
책상다리 4개를 탁탁 펴서 자리를 잡고 앉아, 뾰족하게 잘 깎인 연필과 구몬영어를 들고 왔다. 메추리 알을 까고 있거나, 아빠 셔츠를 다리고 있는 엄마 옆에 앉아 카세트에 영어 테이프를 넣고 재생을 눌렀다.
“내가 매일매일 잊지 않고 하는 것♪ 세수하기 이 닦기, 학교 가기, 구몬 하기♪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 가지 구몬!♪ 선생님과 함께하는 구몬영어♪”
어른 손바닥만 한 작은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며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꽉쥔 연필로 알파벳을 천천히 써 내려갔다. 노래 가사처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구몬은 아니었지만,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깨작깨작 공부를 하고 있으면 엄마가 슬쩍 쳐다보다가 조금은 대견한 눈으로 옅게 웃던 그 순간이 싫지 않았다. 근처에 학원은커녕 슈퍼하나 없던 그 촌동네, 밤이면 사슴벌레나 장수풍뎅이가 심심치 않게 방충망에 들러붙고, 사방에 둘러 쌓인 밭에서 계절마다 소거름 냄새가 풍기던 그런 시골 마을에서 엄마는 나름 열정적으로 영어공부를 시켜주었다.
내가 영어 테이프를 틀고 “잉그리시” “스타디” “티쳐” 중얼중얼거리고 있으면 엄마는 아무 말없이 보고 있던 티비이 소리를 줄이곤 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깜짝 놀랐던 순간이 있는데, 엄마가 뭔가를 기록해 둔 메모에서 맞춤법이 틀린 한글을 발견했을 때다. 우리 엄마는 힘도 무지 세고, 어떤 문제든(이를테면 마이너스 통장이나. 현금인출 같은 대단히 전문성이 필요할 것 같은 일들) 척척 해결하는 만능 재주꾼인줄 알았는데, 초등학교 1학년의 눈에 엄마의 틀린 맞춤법이 들어온 것이다.
게다가 엄마가 영어 알파벳을 하나도 모른다는 사실은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뭘 물어보면 엄마는 “다음 주에 선생님 오시면 물어봐라 ‘고 대답했다.
화요일 5시, 구몬선생님이 집에 오시는 날은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일주일 동안 끙끙 거리며 궁금하던 궁금증을 물어볼 수 있기 때문은 아니었고, 선생님이 오실 때면 엄마 딸기나, 거봉, 멜론처럼 우리 삼 남매가 애걸복걸해도 좀처럼 사주지 않던 과일을 썰어서 내워 줬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먹지 않고 남기고 가야 우리가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선생님의 손에 든 포크가 움직일 때마다 초조하고 조마조마해서 (딸기가 6개에서 5개 남았다. 선생님 가시자 마자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집어야겠어) 도무지 수업이 집중하지 못했던 기억만 남아 있다.
30년이 지났다. 첫아이가 올해 8살이 되었다. 구몬 수학을 시작했다. 네모난 종이에 빨간 색연필로 월, 화, 수, 목, 금, 토라고 요일이 적힌 빨간 글자가 정겹다.
”선생님, 저기 혹시 어른도 구몬영어 할 수 있나요? 저도 같이 해볼까... 해가지고....”
이렇게 아이와 함께 구몬을 하게 되었다.
아이는 수학, 나는 영어.
학교가 끝나는 시간, 초등학교 후문에서 만나 손잡고 들어온 나와 아이는 거실에 작은 상을 펼치고 앉는다. 아이는 시원한 아이스티 한잔이랑, 딸기잼을 바른 식빵을 오물거리고, 나는 디카페인 카누 커피 한잔 타서 호로록호로록. 사각사각 연필소리를 내며 문제를 푼다.
그 시간이 참 좋다.
가운데 손가락에 하얀 굳은살이 생길 듯 연필을 꽉 잡은 아이가 집중의 입술을 오리조리 오물여 가며 7 + 5를 고민하고 있는 그 모습을 눈에 담는다. 고구마 줄기를 다듬던 엄마처럼 나도 모르게 옅게 미소 짓고 만다.
조각난 행복들을 긁어모아 나는 지금의 커다란 행복을 일구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의 행복을 이렇게 나누다 보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잠깐 깜빡하고 있던 작고 소중한 나의 행복'을 기억해 낼 수 있지 않을까_
아이와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학습지를 푸는 순간
(그리고 아직 젊은 나의 엄마도 함께)
제10회 브런치 대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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