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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Dec 18. 2023

비 오는 날 폐지 줍는 할머니 그리고 빨간 원피스

아메리카 드림이 산산조각 났던 그 해는 유난히도 다사다난했던 기억들로 가득했다.

그날은 비가 억수 같이 내렸다. 우산을 뚫고 비가 들어올 정도였으니까.

하필 이런 날 제일 아끼는 빨간색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 저거 입고 나갔다가는 홀딱 젖을 것 같은데..'


나는 그날 제일 존경하는 재즈피아니스트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고 그래서인지 비가 오든 말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원피스를 입고 싶었다.

기어코 그 원피스를 입고 집을 나섰다.


피아니스트의 공연도 재밌게 봤고 인사도 잠깐 나눴다. 괜히 원피스를 잘 입고 나온 것 같아서 뿌듯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비가 더 세차게 내렸다. 이미 공연도 봤고 인사도 나누면서 마음 깊이 뿌듯함으로 가득 채워서 인지 옷이 좀 젖는 건 상관없었다.


아파트 입구로 걸어 들어오는데 폐지 줍는 할머니가 자기 몸 보다도 큰 리어카에 젖은 박스를 싣고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걸어가고 있었다.

비에 젖은 박스... 우산도 쓰지 않은 모습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물을 머금은 박스가 얼마나 무거운데 그걸 저 작은 몸으로 밀고 있다니.. 싶은 생각을 하는 찰나 나도 모르게 그 할머니께 성큼성큼 다가갔다.


"할머니 우산 없어요?"


"우산 쓰면 이거를 못 밀잖아~괜차네"


"할머니 어디까지 가야 해요? 제가 우산 씌워 드릴게요. 이거 박스가 물 먹어서 너무 무겁잖아요!!!"


"아이고 여기 코나(코너) 돌면 금방이여"


"금방 가는 거니까 같이 가자고요."


"하이고.. 아가씨가 정도 많네 정도 많아"


아파트 주차장을 같이 가로질러 할머니 집까지 갔다.

100미터 조금 넘는 거리였을까 그 거리를 걷는 동안 할머니가 오늘 배고팠다는 얘기, 비가 오락가락해서 박스가 젖었다는 얘기.. 를 들었다.


할머니를 모셔드리고 집에 왔다.

아끼는 빨간 원피스가 홀딱 다 젖었다.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다 젖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속상하지 않았다. 할머니를 도와드렸다는 것이 내심 뿌듯해서였을까?


아메리카 드림이 산산조각 났어도,

좋지 않은 대학을 나와도,

아끼던 원피스가 빗물에 홀딱 젖어도,

세상에 이 보다 중요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배웠던 나의 20대의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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