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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Dec 25. 2023

어차피 만나게 될 거였어요.

넌 학생이었고, 난 선생이었다.

몇 날 며칠을 괴롭게 지내다가 20년 12월 31일 오전 9시.


장문의 카톡으로 이 관계에 대해 얘기하자고 했다.




카톡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이미 남자친구가 된 것 마냥 이렇게 지내는 것이 옳지 않은 것 같다.

난 이미 좋아진 것 같다. 그러니 만날 거면 만나고 말 거면 말아야 하는 관계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안이 벙벙할 법도 했지만 지도(?) 공범 (?) 이니까 빠르게 답장이 왔다.

(사실 잘 줄 알고 보냈는데 답장이 빨리 와서 놀랐음;;)


답장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먼저 얘기해 줘서 고맙다. 이따 만나서 얘기하는 거 어떻냐'


그래서 저녁 7시에 만났다.




내 작업실로 그가 왔다.


띵똥~ 초인종 소리가 그렇게 컸던 적이 없는데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애써 담담한 척.


"어~ 열어줄게~" 


하고서 문을 열었다. 민망한지 들어와서 앉자마자 연신 웃는다.


사실 묻고 싶은 게 있었다며 나에게 어떤 에피소드를 얘기하며 물어보았다.

내가 술에 취해 카톡을 보낸 적이 있는데 그 카톡내용이 굉장히 불안해 보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답장도 하지 말라고 했단다. 안타깝게도 아예 기억이 나지 않았고 그는 왠지 내가 아예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아서 물어본다며 됐다고 했다. 

(사실 나는 정말 놀랍도록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이라 그는 물으면서도 조금의 기대 조차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 카톡을 보낸 시절은 사실 내가 굉장히 우울한 시절이었다. 전남친의 짙은 가스라이팅 때문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기 때문에 통째로 기억을 안 하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이어서 우리 관계에 대한 얘기가 시작되었다.

뮤지컬을 시작으로 이어졌지만 어찌 됐든 우리는 과거에 선생과 제자였기 때문에 이 관계를 완전히 배제하고 얘기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괜히 만났다가 헤어져서 좋은 친구를 잃게 되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있었다.


그런 염려, 두려움,  걱정 너머로 나는 이미 그를 많이 의지하고 있었고 그도 내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뗀다.


"근데 어차피 우리는 만나게 될 거였어요. 지금이 아니었어도 우리는 만났을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만나면 돼요."


??????????????? 이렇게 빨리 상황을 끝낸다고?????????????????


"그;;그래;;그렇지 어어;;" 하고서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출 수 없었고,

여태 몇 날 며칠 동안 했던 걱정은 손에 쥔 모래처럼 머릿속을 빠져나갔다.


마지막 지하철이 올 때 까지 우리는 계속 수다를 떨며 지난 시간동안 마음 졸이며 설렜던 순간들을 나눴다.




20년 12월 31일. 


우리는 만남을 시작했다.


평범하지 않은 만남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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