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누구를 만나기 참 좋은 계절이다. 서로 바삐 일상을 살아내느라 연락도 뜸했던 사람들을 만나게 한다. 가깝게 지냈지만 멀리 이사 간 지인이 연락이 왔다. 잘 지내고 있냐며 안부를 주고받고는 함께 친하게 지낸 언니와 셋이 만날 약속을 잡았다. 청명하고 높은 가을 하늘. 노랗고 붉은 단풍들이 울긋불긋 해진 어느 날이다. 바람 한 점 없이 쾌청하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몸은 천근만근이다. 요즘 일이 많아 피로가 쌓인 듯하다. 물을 잔뜩 머금어서 무거워진 스펀지처럼 터벅터벅 약속 장소로 갔다.
오랜만에 경치 좋은 카페에서 반가운 두 얼굴을 보니 기분이 산뜻하다. 무거워진 스펀지를 꽉 짜서 뽀송뽀송 가벼워짐을 느낀다. 이래서 사람들도 종종 만나야 하나보다. 거의 2년 만이었다. 마지막에 얼굴 보고는 연락도 자주 못해서 근황토크가 이어졌다. 이사 간 지인의 새로운 취업 얘기로 시작했다. 소아전문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게 되었다. 지인은 나보다 4살 아래인 동생이다.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같은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며 친해졌는데 알고 보니 같은 학교 같은 학과 출신이었다. 친해진지 한참만에 알게 되어 더욱 신기했다. 그렇지만 그 동생은 간호사 경력이 매우 짧았다. 취업한 지 얼마 안 되어 첫째가 생기면서 경단녀가 되었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뒤에 일하게 된 거라 거의 첫 직장이나 다름없었다. 첫 직장은 적응하기 힘들기 마련인데 빠르게 적응한 눈치다. 일머리가 있는 친구라 그럴 것 같았다.
4살 아래이지만 결혼도 출산도 육아도 살림도 나보다 선배다. 그렇게 동생인 친구에게 육아도 살림도 남편 잡는 법(?), 아이 훈육, 요리도 배웠다. 특히 살림을 잘해 노하우를 많이 전수했다. 화장실 청소가 어렵다는 말에 화장실 전용 욕실세제와 일회용 수세미까지 추천해 주며 그녀만의 쉬운 방법을 알려줬다. 반찬도 간단한 밑반찬 만드는 법과 요리부터 해서 세제 추천까지. 항상 그녀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자신이 겪어보고 시행착오를 거친 후 얘기하는 거라 자신 있었다. 그녀의 진짜 매력은 당당함이었다. 자신보다 남편이 잘 나가고 돈을 많이 벌어도 절대 기죽지 않고 자신의 일, 살림과 육아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졌다. 또 그 일이 자신만의 일이 아닌 가족 전체가 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래서 '잔소리'가 많은 타입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 잔소리로 아이들의 자존감이 떨어지는 거 아닌가. 남편이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기에 좋게 얘기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아무리 좋은 말도 잔소리라고 생각되면 서로 기분만 상하니까. 그런데 아닌 것 같다. 잔소리는 일 잘하는 사람 혹은 일을 많이 해서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잔소리가 없던 시절은 살림, 요리, 청소에 손도 못 댈 때였으니까. 지금도 잘하지 못하지만 신경 쓰려고 하면 할수록 나도 잔소리가 늘어났다. 역시 잔소리는 살면서 매우 필요한 말이다.
그녀가 얘기했다.
그녀 : "밤늦게 일 끝나고 들어가는데 남편이 애들이랑 밥 먹고 설거지 안 해 놓은 것 때문에 한바탕 다퉜다니까요. 그래서 몇 번 뭐라고 했더니, 이제는 설거지는 하긴 하는데 내가 올 때쯤 하거나 오기 직전 해놓은 것 같더라고요. 설거지는 해놨는데 음식물 냄새가 나는 거 있죠. 그래서 또 바로바로 하라고 뭐라고 했죠."
그 얘기를 듣는데 그녀의 말이 아니라 남편의 입장이 이해가 되었다. 나도 번번이 그러니까. 그래서 이렇게 얘기했다.
나 : "그래도 한 거니까 괜찮은 거 아니야?"
그녀 : "아니죠. 그럼 냄새가 나요. 집에 있던 사람들은 모르는데 밖에서 들어온 사람은 딱 알아요."
그녀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우리 집에 왜 이렇게 쾌쾌한 냄새가 나는 걸까?' 하며 '쓰레기통에 쓰레기 때문인가?' '분리수거를 안 버려서 그런가?' 하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식탁에서 뭘 먹고 항상 늦게 치우는 습관. 그리고 치워도 설거지를 미루는 습관 때문이라는 명확한 사실. 그래놓고 아가씨나 누가 우리 집에 오면 긴급하게 환기하고 인센스를 피우기 바빴다. 지금도 우리 집에 향긋한 냄새가 나지 않는데 물건 들에 냄새가 배어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녀가 남편의 흉을 보며 얘기한 건데 나에게 잔소리하는 것처럼 찔렸다.
그날 밤. 아이들과 저녁을 먹고는 원래 같았음 한참 만에 치울 텐데 바로 치운다. 먹은 걸 바로 싱크대에 가져가고 식탁을 닦고 설거지를 한다. 귀찮아서 미루던 건데 30분이면 충분한 일. 미루다가 쌓이면 같이 하는 게 더 효율적인 거 아닐까? 라며 미루는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했는데. 그녀가 남편에게 했던 잔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어 바로 치웠다. 치울 땐 귀찮아도 바로 치우고 나니 개운하다.
잔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나부터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이 되고 우리 집 남자들도 제 할 일을 할 수 있게 부드러운 잔소리를 하는 아내와 엄마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