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투자사기꾼조심하세요
육아에 올인하며 세월이 휘리릭 지나고 나니, 뇌가 화분에 심은 고구마처럼 말라붙은 느낌이었다. 물을 주고 싶었다. 그 물이 바로... 공부였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아이에게 "왜 숙제 안 했어?" 물으며 동시에 "나는 대체 마지막으로 문제집 풀어본 게 언제더라?" 자괴감이 밀려왔다.
세상은 너무 잘 돌아가는데 나는 거기에 전혀 끼지 못하고 있는 느낌. 뉴스를 보지 않으니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 전부 '누구세요?' 상태. 아이에게는 물어볼 것도 많고 알려줄 것도 많아야 할 것 같은데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거 하나도 모르는 나. 나보다 초등학생 아들이 더 아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진짜 사기 당하겠다.
사기꾼은 실제로 내 삶에 한 번 왔다. 마트 문화센터에서 만났다. '소액 투자로 건물주 되는 법'을 알려주겠다던 남자. 그땐 몰랐다. 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나는 '공부하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사람은 사기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었던 거다. 전세 끼고 갭 투자하는 법. 경매 넘기기. "어떻게 남의 인생을 싸게 사냐."는 이야기를 배웠다. 그때는 뭔가 느낌이 이상했지만 지식이 없으니까 이상하다는 것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찝찝한데 왜 찝찝한지를 몰랐다.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그 뒤로 결심했다. 이런 세상에서 무사히 살려면 공부를 해야겠다. 금융 공부. 사회 공부. 세상 공부.
그렇게 갑자기 공인중개사 공부를 시작했다. 왜 하필 공인중개사냐고? 간호사도 했는데 못 할 게 뭐 있겠냐는 근자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에듀윌에 가입했다. 광고에 나오는 서경석 씨 얼굴이 그렇게 믿음직스러울 수 없었다.
'공인중개사 합격은 역시~ 에듀윌~' (문제는 머리에서 3일째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것)
근데 막상 책을 펼치자마자 내 머릿속에는 어떤 음성도 재생되지 않았다. 부동산학개론. 민법... 이 단어들이 도무지 나와 눈 마주쳐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저히 읽히지 않는 책. 듣는 순간만 이해되는 강의. 수강 후 10분 안에 사라지는 기억력. 마치 내 머리에 '자동 삭제 설정'이 되어 있는 것처럼.
결국 시험은 떨어졌다. 예상은 했다. 이걸 통과하려면 올인해야 했고. 나는 집안일과 아이 장난감 정리와 밥 차리기, 찜질방 박반장 사이사이에 간신히 '공인중개사'를 끼워 넣고 있었으니까. 시험엔 실패했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이건 시작이었고 변화의 시동을 건 거니까. 사기꾼 말도 못 알아듣던 내가 이제는 경제신문을 시도라도 하고있다. 물론 여전히 3줄 읽고 멍하지만 예전엔 1줄 읽기도 무서웠으니까 진보다. 예전에는 '세상에 없는 일'처럼 느껴졌던 뉴스 속 단어들이 이제는 '내가 모르던 일' 정도로 다가온다. 나는 지금도 무식하다. 하지만 무식한 채로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게 다르다.
예전에는 설거지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무슨 벌을 받길래. 하루에 세 번씩 이걸 하고 있나.'
요즘에는 생각한다. '그래도 이건 쉬운 일이구나'하고. 머리 안써도 되니까. 나는 점점 머리 쓰는 일이 좋아지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힘들다. 어려운 건 어려운 거니까. 그래도 좋다. 왜냐면 '나'로 돌아오는 중이니까. 엄마로만, 아내로만, 가사노동자, 여탕 수리공으로만 존재했던 내가 이제는 나라는 이름을 다시 부르기 시작했으니까.
누구나 자기 자리에서 살고 있지만 살다 보면 문득문득 '내가 날 잃어버렸구나' 싶은 순간이 온다. 그럴 때는 무언가 배우는 게 생각보다 강력한 구명보트가 된다. 나는 지금 공부로 조용히 내 인생을 다시 꿰매고 있는 중이다. 비록 공인중개사 자극증은 못땄지만 그래도 마음은 '인증'하나는 새겼다. 나는 다시, 생각하는 대로 살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 폴 부르제 -
그리고 나는 이제 사는 대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사기꾼도 이젠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깨인 정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