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동파방지, 해결방법
겨울이면 오는 것들이 있다. 손끝을 찌르는 칼바람. 택배사 배송 지연 안내. 그리고 행정안전부 문자.
[행정안전부] 아침기온이 중부지방 영하 10도 내외로 춥겠습니다. 동파가 우려되는 주택에서는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 물이 흐르도록 하여 동파를 방지하시기 바랍니다.
결혼 전엔 이런 문자가 와도 '아. 세탁기는 잠깐 쉬어야겠네' 정도의 감상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지금 나는 찜질방 여탕을 마고 있는 '찜질방 사모님'이라는 이름의 여탕 전담 수리공이다. 한파 문자 하나에 수도관, 배수관, 세탁기 잔수, 히터, 보온커버까지 머릿속에서 줄줄이 연상된다.
찜질방은 '물' 장사다. 그러니까 물이 얼면 모든 게 얼어붙는다. 손님도 기계도 나의 하루도. 이맘때면 나는 반쯤 자동으로 움직인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이미 내 손은 이불이며 타월이며 못 쓰는 커튼 따위를 꺼낸다. 남편과 함께 수도계량기를 감싸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이소에서 산 파이프 보온재를 사이즈에 맞게 자르고 세탁기 배수관에 보온 커버를 씌운다. 이게 바로 찜질방 여자의 동계훈련이다.
혹시라도 가정용 세탁기가 얼면 50~60도의 따뜻한 물을 세탁통에 70% 채우고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는' 의식을 한다. 잔수 제거 호스를 통해 물을 빼고 헹굼 코스로 정상 작동을 확인할 때까지 마음이 들썩인다. 이 모든 걸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 내가 가끔 너무 대단해서 스스로 놀란다.
그날도 평소처럼 '동파방지 매뉴얼'을 이행 중이었는데. 뉴스에서 사막에 눈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학라 사막.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에 눈. 지구가 진심으로 우리를 놀래키고 있는 것 같다. 그 놀람은 곧 내게 현실로 돌아왔다. 수도꼭지 동파방지를 위해 물을 조금씩 틀어놓고 있었는데 직원 한 분이 수도꼭지를 '잘못된 선의'로 잠가버렸다. 결과적으로 세탁기 배수관이 얼어붙었다. 모든 걸 잘 고치는 남편을 소환했다. 뜨거운 물을 붓고 드라이기와 히터를 총동원했지만 배관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다 결국 650도까지 올라가는 '열풍기'를 샀다. 배관 전용 히터건이다. 이쯤 되면 거의 장비발로 버티는 생활 RPG(Role-Playing Game).
열풍기에 희망을 걸고 계속 녹였지만 녹이기 실패했다. 세탁기 배수관이 유독 길고 구조가 복잡했다. 결국 배관을 자르기로 했다. 배관 겉을 두드려서 둔탁한 소리가 나는 곳을 찾는다. 그곳이 제일 많이 얼어있는 곳이다. 그 부분을 열풍기로 데우고 꼬챙이로 얼음을 깬다. 험난한 작업이 시작됐다. 남편과 교대하며 2시간을 반복했다. 너무 힘들어서 팔에 감각이 없어지는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얼음이 한 덩이씩 빠져나올 때마다 쾌감이 온몸을 전율처럼 휘감았다.
"언제부터 내가 이런 거에 희열을 느꼈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하며 새롭게 깨달았다. 이런 게 바로 중년의 로망인가. 전생에 대장장이였나. 남편은 힘들어 아무 생각 없었는데, 나는 오만가지 생각을 떠올리며 힘들지만 신나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초짜는 초짜. 일이란 게 그렇다. 한참 몰입하고 있다가 뭔가 살짝 잘못될 타이밍은 늘 존재한다. 열풍기가 생각보다 뜨겁다는 걸 몸으로 배웠다. 내가 입고 있던 롱패딩에 그 '살짝'이 닿았고. 그 살짝은 곧바로 구멍이 되었다. 처음엔 하얀 게 묻은 줄 알고 문질렀다. 근데 문지를수록 하얀 털이 날린다. 털뭉치가 바람에 흩날리며 작은 눈처럼 떨어졌다. 급하게 검정 전기테이프로 구멍을 붙였다. 그렇게 수리를 마무리했다. 내 패딩엔 구멍 하나가 생겼지만 배관은 녹았다.
사람들이 겨울엔 패딩에 스카프와 부츠 이런 걸로 기억을 남긴다면. 나는 전기테이프로 땜질한 패딩 구멍으로 기억을 남긴다. 그 구멍은 얼어붙은 배관과 싸우다 얻은 일종의 훈장이었다. 그 겨울 내가 얼마나 움직였는지. 내가 얼마나 엉뚱하고 바보같고 또 용감했는지 보여주는 표식. 누군가는 이걸 "어머. 옷 버렸네"라고 하겠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슬쩍 뿌듯해한다. 그날 난 얼음을 녹였고 기술하나를 배웠으며 인생의 구멍 하나를 전기테이프로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