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교육의 방향성
들뢰즈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삶, 인간의 독특성, 변화, 차이를 강조하였다.
들뢰즈는 차이의 철학자이다. 하지만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그 차이와는 의미가 다르다. 이 개념을 다문화 교육에 적용해 보고자 한다.
들뢰즈는 반복을 통해 차이를 생성한다고 했다. 결국 반복되는 모든 것은 겉으로 볼 땐 똑같아 보여도 매번 다른 것들을 생성한다는 것이다.
다문화교육을 겉으로 볼 땐, 동서양의 차이, 국가의 차이, 외모의 차이, 인종의 차이, 이주 배경과 비이주배경의 차이 등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들뢰즈의 차이에 비추어 다문화교육을 해석해 보자.
들뢰즈는 구분을 먼저 한 것 이 아니다. 다문화 교육에서 궁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인간다움, 인간에 관한 것이다. 한 인간이 있다. 인종, 국가, 남자, 여자 등으로 구분하기 전에 한 인간이 존재한다.
그 인간이 한 사회에 살아가면서 수많은 만남들, 부딪침, 사건들을 접하면서 점차 다른 존재가 되어 간다. 어떤 인간도 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은 없다. 똑같은 학교를 다닌다고 해서 다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듯, 같은 교육을 받아도 같은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냐면, 똑같은 획일화된 개념을 주입시키는 교육에 반하는 개념이다.
한 인간의 존재에서 그 존재의 상황과 정체성에 맞는 교육을 가지치기로 해 나가야 함을 뜻한다. 그렇다면 개개인이 도달하는 목적지는 모두 다 다르게 된다.
인간다움의 교육에서 시작하여, 어떤 학생은 미술을, 어떤 학생은 수학을, 어떤 학생은 문학을 향해 나아가 자신에게 맞는 형태의 과목(여기선 과목도 구분 짓는 개념이 될 수 있겠다)으로 나아갈 수 있다.
들뢰즈는 차이 그 자체를 통해 드러난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차이만이 반복되는 세계인 '차이의 체계'에 대해 사유한다. 또 존재는 차이의 체계로부터 차이로서 발생, 생성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김재춘, 배지현/ 들뢰즈와 교육 /P.45/ 학이시습>
들뢰즈는 법칙의 "일반성은 오로지 가설적 반복만을 재현하고 가설적 반복만을 가정"한다고 말한다 (Deleuze, 1968a; 김상환 역, 2004:30)
삶을 일반성에 가두고 반복되는 닮은꼴로만 본다면 삶은 지루함의 연속이지만, 삶가운데 매 순간 움트는 독특한 것들을 본다면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특이성과 차이가 반복된다는 들뢰즈의 아이디어는 우리 삶이 결코 똑같이 다시 시작될 수는 없는 차이들이 펼쳐지는 토양이라는 것, 일반성이 가둘 수 없는 특이성이 꽃피는 지대라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김재춘, 배지현/ 들뢰즈와 교육 /P.32/ 학이시습>
나의 전공의 변천사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 한다.
나는 학부에서 대학원까지의 전공이 모두 다르다. 이 과정을 들뢰즈의 차이 생성에 관해서 보자면,
그림이 좋아서 그림을 전공했다. 색채에 빠져 있던 때, 디자인 대학원을 들어갔고 이건 내 길이 아니다는 강한 생각에 1달 만에 그만두게 된다. 그러다가 일단 교사자격이 나오는 교육대학원에 들어가면 자격이라도 얻을 것 같아서 미술교육을 전공하게 되었다. 미술교육을 하다 보니,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게 단순히 미술을 잘하게끔 가르치는 것만 필요한 게 아님을 현장에서 매번 느꼈다. 아이들이 다 그림을 잘 그리고, 영재 같은 아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다채로운 현장이 교육현장이 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는 아이들, 화가 많은 아이들, 말을 하지 않는 아이들, 한 시간 내내 하기 싫다며 생떼를 부리는 아이들, 발달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들 등 너무 많은 아이들을 만나면서 정서적인 측면에 대해 내가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미술치료를 배우게 되었고, 자격증도 따게 되었다. 미술치료를 배우다 보니 매체 상담에서는 약한 언어상담이 필요해서 상담심리를 복수 전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여러 문화 권의 아이들을 만난 경험을 토대로 다문화교육을 공부하고 있고, 그 안에서 다문화상담을 전공하고 있다. 이렇게 공부를 하다 보니, 내년 2024년부터 우리나라가 다인종, 다민족 국가로 정식 등록 되게 된다는 기사를 마주하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다인종, 다민족 국가가 되리라고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는 백의민족, 어떤 색도 섞일 수 없는 순백색의 민족이었고, 단일민족이라는 교육을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받아왔다.
앞으로는 단일 전공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시대가 다양성을 요구하고, 다양한 시각을 가진 인간상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또 한 번 다문화 교육에 대입해 보고자 하는 개념이 있다.
나는 그것을 노매드 교육이라고 부르고 싶다.
정주민은 국가가 땅을 구획하고 번지수를 붙여 할당해 주면 그 고정된 땅에서 산다. 반면 유목민은 할당된 땅에 살지 않고 땅을 차지할 수 있는 본인의 역량에 따라 스스로 땅을 할당한다. 또 스스로 할당한 땅에 지속적으로 정착하기 보다 매번 달라지는 자신의 차이적인 역량에 따라 또다시 새로운 땅을 할당한다. 즉, 정주민은 주어진 땅에 의해 삶의 영역이 결정되는 데 비해, 유목민은 본인의 내적 역량에 의해 삶의 터전인 땅을 결정한다. <김재춘, 배지현/ 들뢰즈와 교육 /P.53/ 학이시습>
유목민은 처음부터 나의 땅이 정해져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적 역량에 맞게 삶의 터전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문화 교육에 대입하여 보자.
정해진 수업, 정해진 커리큘럼, 정해진 과정에 앞으로의 교육은 도태되고 촌스러운 억지식 교육이 될 뿐이다. 거시적으로 방향성정도만 정해 놓고 세부적인 교육방법은 학습자와 교육자가 함께 만들어 나가야 한다. 학습자와 함께 해 보고, 그 학습자들의 내, 외적인 맥락들을 파악하여 새로운 교육 방법을 생성해 내어야 한다. 앞으로의 다문화교육은 유목적 교육이 되어야 한다. Nomad Education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곧, 학습자의 변화 가능성을 인정하고 존중의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다문화 사회 안에서의 다양성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라는 점, 이 인간은 단 한 존재도 같지 않다는 사실은 들뢰즈가 말하는 존재의 일의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