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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완 Jan 07. 2023

살아온 총량만큼

우리 모두 살아남을 존재들 8

 조카 산이는 장난과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는 활기찬 아인데, 그것보다 그림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글자를 조금씩 익히고 있지만, 아직 5살이라 그걸 모아서 읽는 것은 어려워한다. 그래도 그 아이는 통통한 팔로 낑낑대며 책장에서 그림책을 한껏 꺼내고는 아주 정성껏 들여다보며 한 장 한 장 넘긴다. 좋아하는 이야기는 곧잘 기억한다. 몇 번이고 읽었는지, 읽어주다가 “그래서 그 빵 도둑은 호랑이였어!” ......(은근히 내용이 재미있어서 몰입해서 읽었는데) 아주 살짝 맥이 빠지긴 하지만, 그런 순간조차 즐겁다. 나는 이야기를 펼치는 걸 좋아하고, 조카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조카의 삶에 내가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좋다.


 오늘도 산이는 자연스럽게 “이것 좀 읽어줘, 이모.”라고 말하며 그림책을 갖고 오더니 내 무릎에 앉았다. 그림책을 보니 악어가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문득 둘째 조카가 태어나서 언니가 산후조리원에 갔던 때가 생각났다. 어린이집 다니는 조카는 어쩔 수 없이 형부와 언니와 떨어져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본가에서 출근하는 나에게, 일찍이 언니 집에 가서 조카를 돌보고 있던 엄마가 전화했다. 산이가 엄마를 많이 보고 싶어 하는데, 주말에 꼭 와서 놀아줬으면 좋겠다고. 금요일에 직장에서 조카의 집으로 퇴근하니, 밝은 얼굴로 “이모! 놀아줘!”하고 나를 반겼다. 기진맥진할 때까지 놀아주는데 여전히 밝은 것 같아 내심 안심했다. 그래. 아이들의 특성상 뭔가 몰두하면 엄마도 덜 보고 싶겠다고 다행스러워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아이가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 평소 잠자기 전에 읽는 그림책을 여러 번 돌려 읽고, 안고 한참을 토닥여야 잠을 이뤘다.


 어느 토요일 오후, 눈은 잠으로 그득한데 낮잠을 자려고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피곤한 상태에서 억지로 활동하면 다치기 일쑤라, 어떻게든 재워보려고 애쓰는데, 대뜸 조카가 “이모, 그럼 제발 이야기 하나만 해줘.”라고 말했다. 그럼 방에 들어가서 잘 거냐고 물어보니, 자겠단다. “그럼 산이랑 같이 만들어야지”하고 말하며, 주인공이 누구였으면 좋겠냐고 물어보니, 악어를 주인공으로 삼고 싶어 했다. 나는 산이가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잠을 이뤘으면 해서, “악어가 잠자는 산이를 보고 꿈에서 함께 놀아줘야겠다고 생각했대. 꿈 속에서 악어랑 뭐 하고 놀까?”하니, 비눗방울 놀이도 하고 놀이터에 가서 놀고 싶다고 했다. ‘나중에 일어나면 비눗방울 놀이하러 갈까.’ 생각하는데, 아이가 “그런데 악어야. 부탁이 있어.”라고 말했다. “엄마랑 아빠랑 아기를 데려와 줘.”라고 대답했다. 순간 그게 너무 짠해서, 언니에게 영상통화를 했다. 언니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를 반기는데, 산이는 잠시 아무말도 없더니, “엄마, 엄마” 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핸드폰에 있는 언니의 얼굴을 잡고 펑펑 울었다. 천천히 진정될 무렵, 아이는 잠도 잊고 좋아하는 자동차 장난감을 가져오더니 놀이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도 분명 밝은 표정으로 놀았는데, 거기서 엿볼 수 없던 편안함이 보였다. 아이는 안심한 상태로 엄마와 아빠 앞에서 놀이했고, 곧 낮잠을 잤다.


 내가 예사로 생각하고 지나갔던 게 부모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뜻이구나. 만화를 보다가도, 그림책을 읽다가도 아이는 엄마가 언제 돌아오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열 손가락을 쫙 펼치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몇 밤을 자야 엄마를 만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뿐이었다. 스케치북에 돌아올 엄마와 아빠, 아기를 그렇게 그렸는데, 어쩜 어른인 나는 무심했을까. 어떻게 잠을 이루고 편안히 놀이하겠는가. 아이의 세계를 받치고 있는 부모가 눈앞에 없는데.


 아이의 그리움과 어른의 그리움이 어떻게 같겠냐고 은연중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어른의 그리움이 더 짙다고 여겼는데, 내가 어리석었다. 살아온 총량만큼. 살아온 만큼 아이는 체득한 그리움이란 감정을 모조리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른이야 정신없는 삶을 살고 손에 집히는 것을 하며 어떻게든 그 감정을 잊어내지만, 아이는 그게 어렵다. 그래서 아이의 것이 어른의 것보다 훨씬 더 깊을 것 같다. 나는 산이가 아이이고, 게다가 내 조카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극단적이지만, 우리 언니와 형부가 부디 오래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고 처음으로 느꼈다. 절대 그래선 안 되지만, 열 손가락 몇번을 세도 부모가 돌아오지 않을 때 느끼는 아이의 그리움을 누가 다 헤아릴까. 살아온 만큼 슬픔을 토해낼 아이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한다. 헤아리기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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