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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완 Feb 08. 2023

시금치와 풍경

사람들 사람들 6

  월요일부터 남해의 삼동면 쪽을 여행했다. 오늘 아침엔 국립남해자연휴향림을 가보기로 했다. 독일마을에서 아침을 먹고, 바로 출발했는데 아뿔싸! 휴관이었다. 아쉬움이 컸지만, 차를 타며 지나온 경관도 만만치 않게 아름다웠던 게 생각났다. 내려서 좀 걷기로 했다.


 주차 후 차에서 나오니 바로 앞에 ‘엘림민박’ 간판이 크게 세워져 있다. 노옹 한 분이 전기톱으로 장작을 자르고 계셨다. 그분이 우리를 힐끔 보며 걸어오시길래, 먼저 인사드리니 받아주신다. 나무 타는 냄새가 연하고 구수하게 감돌았다. 호숫가를 따라서 걷는데, 한쪽에 아직 꽃망울이 터지기 전의 동백나무가 줄줄이 있었다. 봉오리 안의 게 피어나면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로 빼어날 텐데. 피어날 때가 아님을 알지만, 아쉬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호수 겉면에 찰랑이는 윤슬은 햇살 받아서 은처럼 찬란하다. 그 맞은편 뼈대 얇고 키가 큰 편백 나무로 울창한 산자락이 이어졌다. 새도 참 간간이 지저귄다. 고요하고 고요해서 그 산도 호수도 막막해 보였다. 그래도 빛 받은 초록과 은빛을 품고 있어 그 쓸쓸함마저도 찬연했다.


 휴양림 대신 다른 관광지를 둘러보고 집에 가기로 했다. 수원까지 5시간 이상을 운전해야 한다. 아빠는 뻐근한 몸으로 운전하시고, 그동안 나는 아빠가 지칠 것을 염려해야 하는구나. 면허를 진즉에 따지 않은 내가 원망스러웠다. 조수석에 앉아 지루함을 달랠 음악을 틀고 그곳을 빠져나오는데.


 노모 두 분께서 밭에 주저앉아 무언가를 캐시는 게 보였다. 시금치였다. 저거 데쳐서 들기름 넣고 무치면 맛있는데. 뒤에서 엄마의 아쉬운 소리가 들렸다. 남해의 시금치는 도시의 것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달다. 해풍을 견디며 자라니까. 어제 아빠는 횟집에서 들기름 묻은 반질반질한 시금치를 한 입 먹고, 회보다 당기는지 자꾸 드셨다.


“가서 사 오지 그래.”

“저걸 팔아요? 본인들 드시려고 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파시기도 할 거야.”


 마트에서나 봤지, 밭에서 갓 캔 걸 파는 건 본 적이 없는데? 엄마는 신나서 나갔다. 진귀한 광경일 듯했다. 옆에서 내가 재밌겠다고 말하니 아빠가 너도 내려가서 보라고 하신다. 뭐 하러 내가 가요, 차에 남겠다고 하니, 그러렴, 하고 나가신다.


 그랬는데, 흙과 풀 내음 싱싱한 시금치를 봉투에 담아 그걸 좋아라 하시며 팔 노모가 자꾸 떠오르는 것이다. 아, 이것도 글감이 될 텐데. 이미 앞에 놓친 장면이 많아 밭까지 뛰어갔다. 꽃무늬 바지를 입은 노모가 낫으로 흙에서 시금치를 캐서 그 옆에 선캡을 쓰시고, 금테 안경을 쓰신 분께 건네셨다. 허리까지 족히 오는 흰 비닐에 그걸 꾹꾹 눌러 담는다. 비닐이 상당히 큰 데도 아낌없이 무더기로 담으셨다. 그게 삼만 원이었다. 엄마가 용돈 하시라고 좀 더 얹어드렸는데 안경 쓰신 분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띤 채 받은 돈을 머리에 쓱쓱 문지르셨다. 그분의 좋다는 표현인 듯하다.


내년에 오시지요. 내년에 또 오시소, 하시더니 도랑 건너편에 있는 나를 보시고 아빠에게 물으신다. 


"응? 자는 누군교?"

"아, 딸입니다."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드렸다. 그러곤 엄마, 아빠 쪽으로 건너가는데, 두 어른이 시금치 가득한 봉투를 묶기 버거워했다. 덕분에 물씬 풍겨 나오는 풋내를 열심히 맡았다. 싱그러웠다. 셋이 다시 인사드리고 나오는데, 손 한 번 흔들어주시고 다시 작업에 몰두하셨다.


“너무 많은데? 많아서 좀 나눠 줘야 할 것 같아.”


 많다고 감당 안 된다는 듯 말하면서 짜증은커녕, 아주 싱글벙글하신다. 저걸로 나물도 무치고, 시금치 국도 할 거라고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흰 봉투 위에 ‘보물초’라고 쓰여 있는 게 떠올랐다. 고소하고 아삭한 다디단 나물. 구수하고 향긋한 국. 바닷바람 쐰 푸성귀, 보물 맞다.


 바다 낀 관광지라면 흔하게 널린 ‘오션뷰 · 루프탑’ 카페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빛깔 곱고 산뜻한 풍경과 일화가 숨은 그림처럼 있었다. 참 훌륭하다, 생각하며 창문을 내리니 옆에 짙은 바다와 그 위를 덮은 운무가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다. 감상하고 있노라니, 나도 모른 채 굳어있던 마음 한쪽이 푸성귀처럼 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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