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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완 Feb 03. 2023

천천히 멈추고 있었다.

숨구멍 4

* 천천히 뒤집히고 있었다'의 속편입니다. 정승환의 '보통의 하루'를 들으며 썼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KBtv46sx8k

김이선이 가고 싶었던 곳으로 가자.


 숙소에 도착하고 하루는 그냥 잤어. 3시간을 내리 운전한 걸 핑계 삼아, 짐을 풀고 한참 자기로 했어.


 사실 일어나지 않길 바랐는데. 오래오래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는데. 암막 커튼 틈새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덕분에 눈이 저절로 떠지더라. 어제 감은 머리가 조금 떠서, 손에 물을 묻혀서 정리했어. 보니까 눈은 실핏줄도 터지지 않았고, 충혈되지도 않았어. 안약, 잘 넣고 있어. 걱정하지 마. 여기까진 정말 정상이었는데.


 미안해. 문고리를 잡고, 그걸 밀고 나가는 게 너무 힘들어. 괜찮아지고 싶어서 왔는데, 그럴 수 없으면 어떡해. 문고리 한 번 잡고, 침대로 다시 돌아가고를 반복했어. 재미없이 몸만 더워지고 지치는 릴레이 게임같이. 등에 식은땀이 베여 축축했어. 할 수 없이 나한테 거짓말했어.


 나는 변하려고 나가는 게 아니다. 괜찮아지려고 나가는 게 아니다. 허기져서 나가는 거다.


 너랑 같이 갔던 식당에서 순두부 정식을 하나 시켰어. 한 입 먹었는데, 먹을 수 있겠어. 부드럽고 고소해서 꽤 잘 넘어가. 한 공기 반 정도 먹었어.


 너랑 나는 뭐든 쉽게 매혹되어 메뉴 하나가 맛있거나, 하다못해 일하는 직원이 상냥하면 그 이후로 뻔질나게 들렸지. 그래서 우리 얼굴을 다 외웠던 직원은 네가 떠난 이후에도 내 ‘옆에 분‘은 어디 있는지 물었어. 늘 대답 없이 눈인사만 하며 돌아왔어. 언제 한번 식당을 나선 후 바보같이 펑펑 울면서 ‘집에 있을 거예요. 천연덕스럽게 나타날 거예요. 제발 집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집으로 향한 적이 있어. 곧 어두컴컴한 집안을 보며 절망했지만.


 여기 사장님은 날 몰라. 내 세상에 너를 모르는 사람이 있구나. 날 알면 당연히 널 알아서, 나 혼자 있으면 네 부재를 달려들 듯 물어볼 거라 믿었어. 작년에 한 번, 올해 너 없이 한 번. 사장님을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이 분은 나를 몰라봤어. 그럼, 너도 모르시겠지.


“맛있게 드셨어요? 입에 맞으셨어요?”

“너무 맛있었어요. 오랜만에 맛있는 거 먹어서 좋았어요.”

“그러셨구나. 다행이네. 또 오세요.”


 차 안에서 시동을 건 채 가만히 앉아있는데, 발이 어는 것 같았어. 추워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게 성가셔서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어. 히터를 틀고 열기를 쐬고 있는데, 얼어붙은 발이 녹으면서 뭔가 생각나더라.


“못가? 우리 시간 없어?”


 네가 가고 싶어 했던 곳이 머릿속에 두루뭉술하게 떠올랐어.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무슨 문화재였지. 오죽헌이었나. 오죽헌밖에 생각 안 나는데, 분명 오죽헌은 아니었어. 어찌어찌 검색하니까 나오더라. 강릉선교장이었다. 그거였구나.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가 될 것 같아.


 입장표를 받고 들어갔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건 연못에 세워진 누각 형식의 정자였어. 팸플릿을 보니 '활래정'이야.


 지나가다 옆의 일행과 동행하는 도슨트의 이야기를 잠깐 들었어. 원래 이곳에서 나는 향기는 세 가지래. 사람 향, 소나무 향, 연꽃 향. 여기 여름에는 연꽃 향기가 만개한다는데, 연못은 얼어붙었고, 연꽃은 모두 시들었어.


 안채, 바깥채, 행랑채 다 포함해서 102칸이나 된다고 했어. 내가 숫자에 이렇게 연약한 사람이었나. 이상하게 자꾸 헛발을 짚어서 가볍게 발을 삐었어. 마음이 까무러쳤어. 옆에 아무 향기가 안 나서. 본래 향기를 잃은 곳에서 102칸을 다 둘러봐야 하는 게 괴로웠어. 여기가 지옥처럼 느껴졌어. 돌아가려 했는데.


차로 돌아가려 했는데 이상하게 발이 안 떨어져. 내 멋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서, 이젠 슬프지도 않고 화만 났어. 여기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저 뒤편에 있는 둘레길로 향했어.


 돌계단을 올라가는 건 어렵지 않았어. 반쯤 올라왔을 때 잠깐 멈춰서 밑을 내려다봤어. 기와벽 너머로 전경이 다 보이더라. 그 앞에는 검은빛 도는 대나무 줄기가 바람에 날려서 소리 내는데 스산했어.

 

 어느 순간부터 돌계단 위를 걷지 않았어. 소나무 위에서 떨어진 잎이 제 빛을 잃은 채 쌓여있었어. 밟을 때 푹신했는데, 아마 내 발밑에 켜켜이 쌓여있을 거야. 걸을 때마다 잎에 숨겨진 나뭇가지가 우지끈 꺾이는 소리가 들려. 관절 꺾을 때 나는 소리 같아. 떨어진 솔방울, 소나무 가지가 한데 모여 무덤을 이루고 있었어. 주위엔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 바람 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 간간이 저 너머 공사 현장에서 무언가를 파괴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야.


 우뚝 선 채로 다 끝났다고 느꼈어. 끝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어. 머리서 발끝까지 점점 새하얘져 가는데.

저 밑에서 소나무 줄기가 빛 받아서 반짝이는 게 보였어. 무더기로 쌓인 황폐해진 솔잎과 나뭇가지 무덤 사이에서, 초록빛 도는 비단 천이 너울너울 흔들리더라. 저 밑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위에서 보니까 참 찬란하더라.


 백지화되었던 내 몸과 마음이 초록으로 다시 채워졌어. 너는 네 소원을 어떻게 거기에 두고 가니.


 이선아. 이 세상 사람들이 네 안부를 물어보는 걸 점점 실례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앞으로 오늘 내가 갔던 식당의 사장님처럼 내 세상에 널 모르는 사람이 앞으로 더 많아질 거야. 괴로웠지만, 괴로울 테지만, 완전히 뒤집히진 않았어. 60도 정도만 기운 것 같아.


 그러니까 섞여서 살게. 온전해 보이는 부서진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위로하며 함께 살아갈게.


 좀 더 여행할게. 기울어진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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