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완완 Feb 12. 2023

꽃놀이하러 온 어린이처럼

우리 이미 완전한 존재들 9

   내일은 한겨레교육센터에서 주관하는 ‘매일스케치북’ 수업 첫날이다. 앞으로 100일 동안 함께 그림을 그릴 강사님, 동료를 만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동안 들었던 수업은 코로나19 여파 때문에 모두 비대면으로 이루어져서, 함께 수업을 듣는 메이트를 만나는 건 처음이다. 설레기도 하고, 떨리기도 한다. 개설된 카페에 올린 메이트의 워밍업 글을 보니 재수강하는 분도 있고 전공자도 있다. 각자의 사정도 살아온 환경도 다르지만, 즐겁게 그림을 그리고픈 마음은 같다. 우리는 모두 재미있게 그리려고 모였다.


 미술 수업을 재미있게 들어본 적이 언제였더라. 어렸을 때 다녔던 미술학원에선 혼나지 않으려고 했고 대학에서 배웠던 아동미술 실기 수업에선 성적을 잘 받으려고 했다. 대학교 강의실에서 동기들이 바삐 움직이며 작품을 완성할 때, 나는 도통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성적은 잘 받고 싶고, 성적을 주는 교수님은 독창적인 걸 요구하고, 이 짧은 시간 동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머릿속에 이런저런 잡념으로 가득 차니 뭘 해도 될 리가 없었다. 손에 물감이 잔뜩 묻은 채 우두커니 서서 ‘미술은 진짜 나랑 안 맞아. 이게 끝이야. 내 인생에 다신 미술은 없어.’ 다짐했다.


 그랬던 내가 돌연 그림책에 관심 가지면서 시간과 방법 등 제약에서 벗어나 그림을 그리게 됐다. 미술은 이미 그 자체로 즐거운 것임을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내 영역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는데, 그것도 오판이었다. 기쁨과 성취감이 쌓이니 처음으로 잘하고 싶었다. 마음먹은 것일 뿐, 아직 선 긋기도, 채색도 쉽지 않다. 100일 동안 머릿속에 있는 것을 체화하는데 한결 수월한 정도로 늘었으면 좋겠다.

 

 수업 첫날에는 100일 동안 사용할  미술도구를 받는다. 파브리아노 종이, 수채 색연필, 워터브러시와 물통, 스케칭 연필, 만년필을 받을 때 나는 어떤 기분일까. 처음으로 내 크레파스와 내 스케치북, 내 색연필이 생긴 어린 날로 돌아간 듯 기뻐하겠지.

 

 내일 그리기 주제는 꽃이다. 2시간 동안 함께 그리고, 서로의 그림을 첨삭한다. 그 시간도, 앞으로도, 잘하려고 애쓰는 대신 어린이의 마음으로 몰입했으면 좋겠다. 물론 난 어린이가 아니므로 어른의 동기도 당연히 있다. 메이트는 근사한 작품을 올리는데 내 건 왜 이럴까, 조바심 내는 순간도 찾아오겠지. 그래도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만큼은 부디 유쾌하길.


 조카 산이가 그릴 때 보면 열중하느라 내가 옆에서 불러도 못 듣는다. 그림 속 ‘친구’의 표정을 따라 하기도 하고, 자기가 그린 걸 보고 자기가 웃느라 바쁘다. 퍽 흥미진진해 보이니 나이 먹은 이모, 엄마가 궁금해서 기웃댈 정도이다. 작품을 완성하면 그제야 우리에게 달려온다. 자기가 오늘 이런 그림을 완성했다고. 멋지지 않냐고. 우린 손뼉을 치고 칭찬하며 온몸과 마음으로 그의 그림을 맞이한다. 맞다. 생각해 보니 원래 미술의 세계는 어떤 그림이든 수용할 정도로 자유롭고 드넓었지. 내 그림이 받아들여질까 걱정할 필요 더더욱 없구나. 근심 없이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자. 하얀 파브리아노 스케치북에 꽃을 한가득 심으며, 마치 꽃놀이하러 온 어린이처럼. 그렇게 놀이하자.

이전 08화 나의 100일 글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