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담 Aug 06. 2023

잘나가던 대기업 퇴사하고,창업 후 비로소 알게된 것들

우리는 퇴사를 하고 고시원 원장이 되었습니다.

고시원 원장에 대한 타인의 시선은 곱지 않다.


내가 고시원을 운영한다고 이야기하면, 아니 남편을 퇴사 시키고 남편과 고시원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정말 신기한 눈빛을 보낸다.  네? 고시원이요? 하면서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반문하곤 한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하나둘씩 고시원 거주 경험담을 풀어놓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고백은 '사실 나도 한 때 고시원에 살아봤는데...' 보통 이렇게 시작해서 '너무 힘들었다.'로 끝맺음 되곤 한다.


그럴 때 마다 생각보다 가까운 주변에 고시원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다만 속시원하게 먼저 말을 하지 않을뿐.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적절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시절이 인생에서 꽤 힘들었던 순간의 한 페이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고시원에 살았었다는 사실 자체가 타인으로 하여금 나란 사람을 평가절하 시키진 않을런지 걱정도 될것이다. 아무리 고시원이 살만해지고 좋아졌어도 여전히 사람들은 고시원 이라는 단어를 불편해하고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기 때문이다. 이런 시선은 고시원 원장도 피해갈 수 없다. 여전히 고시원 원장은 사람들에게, 특히 직장생활만 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신기한 존재로 여겨진다.


유민아빠는 10년동안 몸담았던 회사 대신 고시원 원장이라는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우리의 선택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는 아직까지 판명나지 않았지만 그덕에 나 또한 고시원 원장 남편의 사업 파트너가 되었고 자영업을 경험하고 있다. 남편은 어디가서 떳떳하게 내밀 대기업 명함과 직함은 없지만 그 대신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많은 시간을 확보하였고 월급쟁이 이상의 돈을 벌고 있기에 대체로 만족하는 편이다. 하지만 고시원을 한다고 했을 때, 가장 큰 거부감을 가진것은 다름 아닌 집안의 어른들이었다.


멀쩡한 인서울 4년제 경영대학을 졸업하고, 알만한 기업에 다니던 큰 아들은 시아버님 평생의 업적이자 자랑거리였다. 그런 아들이 잘나가던 회사를 하루 아침에 갑자기 때려치우고 고시원을 한다고 하니 황당함을 넘어 황망하기까지 하신 것 같다.


어느날은 친구 아들 결혼식에 다녀 오셔서는 다시 취업을 하던지, 20대 때 했던 회계사 공부 경력을 살려 회계사든 세무사든 시험을 다시 보는게 어떻겠냐고 강요 반 제안 반의 말씀을 하셨다. 남편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고 짧게 대꾸하며 대화를 중단시키고 싶은 눈치였지만 아버님의 훈계는 끝날 줄을 몰랐다. 듣다 못해 시어머님이 나서서, 불혹이 다 되어가는 아들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게 두라며 다시 직장 생활을 할거라면, 뭐하러 퇴직을 했겠냐며 역정을 내셨다. 결론 없는 실갱이 끝에 아버님이 마지막으로 툭 던지신 질문에 우리 부부는 순간 얼음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이 큰 아들 뭐 하냐고 물어보면, 이제 뭐라고 답해야 하나? ..”

남편은 죄인이라도 된듯 고개를 떨구더니, 이내 황당하다늦 듯 고개를 쳐들며 대꾸했다.

“고시원 한다고 하면 되죠.”

“…..”

아버님은 말 없이 애꿎은 휴대폰만 들여다 보며, 힘 없이 쳐진 눈꺼풀만 꿈벅이셨다. 어색한 분위기에 눈치만 보던 며느리인 내가 겨우 거둔 한마디는 가관이었다.

"유민애비 고시원 안정되면 다른 공부 할 거에요 아버님, 친구분들 물음에 대답하기 난감하시면 그냥 회계사든 세무사든 뭐든 준비중이라고 하세요."(물론 평생 고시원을 할 생각은 아니지만, 아직까지 우리 인생 계획에 그런 거창한 플랜은 없다.)


대기업을 퇴사하고 창업을 한다는 것은, 그것도 고시원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우리 역시도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지만, 아직까지 그것이 정말 잘한 일인지 혹은 무모한 결정이었는지 헷갈릴 때가 많다. 한바탕 시부모님의 잔소리를 듣고 집으로 귀가한 남편에게 물었다.


"퇴사한거 후회해? 괜히 내가 아이 핑계로 퇴사를 부추겨서 그런 결정을 했나 싶기도 하고 마음이 안좋네."


"아니 전혀, 내가 퇴사를 한 이유는 명확해. 시간을 돈으로 사고 싶었기 때문이야. 더이상 시간의 노예가 되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오늘을 우리 아이들에게 쓰지 못하고 메여 있는 것은 바보같은 생각이 들었거든.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아이들의 건강과 행복이야. 우리가 곁에 있음으로 인해서 우리 아이들이 많이 안정을 찾았고 행복해졌잖아. 후회하지 않아."


곧 승진을 앞두고 있던 촉망받던 대기업 직장인에서 고시원 원장으로 강등된 남편의 대답은 단호하고도 감동적이었다. 나 역시 아직 육아휴직 중인 직장인 신분이며 1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였지만, 막상 지금 당장 두둑한 퇴직금을 챙겨줄 터이니 회사를 그만두라고 한다면 고민이 많이 될 것 같다.


고백하건데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연봉도 1억이 넘지만 특별한 꿈과 열정이 있어 입사한 회사가 아니었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고,하루 빨리 돈을 벌기 위해 몸부림쳤다. 부모님의 이혼과 함께 기울어져버린 가세에 따라 많은 생활비가 필요했다. 지금 당장 먹고 살기 위해, 싱글맘의 자녀가 되어버린 동생들의 입에 풀칠을 해주기 위해 고민 없이 선택한 일이었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오며 10년 넘게 몸담은 '대기업 직장인' 이라는 타이틀에는 형언할 수 없는 수 많은 인생의 의미가 담겨있다.




대기업 퇴사하고 고시원 창업해보니

비로소 알게된 첫번째 진실


잠시 들추고 싶지 않은, 나름 가슴아픈 나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꺼내보자면, 우리 부모님은 내가 20세가 되던 무렵 이혼을 하셨다. 이혼 사유는 '남편의 외도'였다. 내가 20살이던 무렵 막내 동생은 12살 초등학교 5학년, 둘째 동생은 15살 중학교 2학년이었다. 전재산을 털어 시작한 사업도 보기 좋게 말아먹고 본인 보다 열두살이나 어린 정신나간 조선족 여자와 바람난 잘난 아빠 때문에 나는 20대 내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 따위를 찾는 것은 사치에 불과했기에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필사적으로 돈을 가장 많이 벌 수 있다는 대기업에 취업했다. 그런 큰 딸은 늘 엄마의 업적이자 자랑스러운 금메달이었고 김연아 선수 버금가는 챔피온이었다.


나와 우리 가족을 먹고 살게 해준 소중한 직장이기에 지금의 '회사'를 생각하면 오만가지 복잡한 심정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나는 늘 퇴사를 꿈꾼다. 이제 먹고 살만해졌고 꿈을 꿀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남편은 달랐다. 소위 금수저라고 불릴만큼 유복하진 않았지만 나와 달리 평범한 집안에서 번듯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본인이 꿈꾸던대로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여 관련 직무에 종사하며 안정적인 직장생활과 명예로운 정년퇴직을 꿈꾸던 사람이다. 그런 남편이 잘나가던 회사를 퇴직하고 고시원 원장이 된 것은 시부모님께는 단 한번도 상상해본적 없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인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을 부모가 대신 살아주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이루어낸 우리의 가정에게 닥친 엄청난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하여 어쩔수 없이 최선을 선택을 한 것이었다. 억대 연봉 대기업을 퇴사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만족한다고 답하는 남편이 기특하기도 하고 고맙기도한 이유이다.


대기업 퇴사하고 창업해보니 비로소 알게된 첫번째 사실은, 가장 가까운 사람, 혹여 그것이 부모 자식간이라 할지라도 모든 일에 대해서 무조건 적으로 지지하고 응원 받을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남들이 다 아니라고 할 때, 가장 큰 응원을 보내줬으면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가족이다. 하지만 시아버님의 열렬한 응원은 받을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서글픔이 느껴졌다. 가족에게도 무조건적인 지지를 받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남에게 인정 받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퇴사 후 알게된 두번째 불편한 사실은

내 존재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지금껏 우리는 한장짜리 명함에 XX기업 00과장, 00부장 타이틀만 내밀면 모든것이 만사 OK였다. 남들앞에서 구구절절 나의 직업에 대해서, 연봉에 대해서,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단 말이다.


하지만 고시원 원장은 명함이 없다. 고시원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의 명함은 00역 고시원 하고 치면 나오는 네이버플레이스 검색어이고, 두번째 명함은 고객의 평판과 후기이며, 세번째 명함은 매출이고 순익이었다. 이 모든것을 미주알 고주알 설명하며 신기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임을 타인에게 설명하는 것은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6살 우리 집 첫째는 얼마전부터 엄마 아빠 대화를 어깨너머로 듣더니, 질문이 많아졌다.

엄마 고시원이 뭐야? 고시원이 뭐하는 곳이야? 아빠 또 고시원 가는거야? 등등 참으로 난감한 질문들이었다. 6살 아이에게 기묘하고도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고시원업을 뭐라고 설명하는게 좋을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훗날 아이가 초등학교 가서 엄마 아빠 직업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을 하는게 좋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내가 어릴적에는 엄마 아빠 직업을 써서 넣는 가정통신문 같은것이 있었는데, 시골에서 식당을 하며 집짓는 일을 하던 엄마 아빠는 초등학생인 나를 앉혀 놓고,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열심히 설명했던 일이 떠올랐다.


하루는 아이 아빠가 쉴새 없이 입실 상담 전화를 받는 모습을 보며 큰 아이가 말했다. '아빠 고시원 인기 짱이다! 아빠는 인기쟁이네~ㅋㅋㅋㅋ.' 하고 말이다. 해맑은 아이의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서울에서 가장 인기있고 사람들이 살고 싶어하는 고시원을 운영하는 사업가라고 말을 해주면 어떨까. 그것도 꽤 멋진 설명인것 같다.


얼마전 한 모임에서 만난 승무원 출신의 필라테스 강사 친구가, 퇴사 후 어엿한 필라테스 강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수식어처럼 따라 다니는 '승무원 출신' 필라테스 강사라는 명함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털어놓은 일이 있었다. 대기업과 고시원 원장 사이, 승무원과 필라테스 강사 사이에 알 수 없는 불편한 간극이 존재하는 것 같다. 대기업이라는, 승무원이라는 조금은 화려해 보이는 꼬리표같은 수식어가 사라지는 순간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일까?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하여, 나란 사람에 대하여 정확한 수식어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 뿐이라는 것이다. 나의 명함에 당당하게 새길 수 있는 하나뿐인 수식어를 찾아 내어 나란 사람을 더이상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유일무이한 존재로 만들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은 퇴사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공통적인 숙제나 다름없다. 숙제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혼을 내는 선생님은 없지만, 끝끝내 풀어야만 하는 인생의 숙제 같은 것이다.


이 외에도 남편은 회사원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니 불편하점이 한두가지가 아닌듯 했다. 직장 다닐땐 빵빵하게 나오던 신용대출이 잘 안된다는 점, 건보료를 많이 내야 한다는 점, 사업 세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 고시원 운영을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그 누구의 지시없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내야 한다는 점 등에 대하여 볼멘소리를 하곤 한다.


다행히도 수십가지의 불편한 점이 있지만, 그 안에서 그 모든 단점을 상쇄시킬만한 강력한 장점도 발견한 듯 하다. 그 중 하나는 '자유'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는 하나는 남은 인생동안 제2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을 찾아내기 위한 소중한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대기업을 퇴사하고 고시원 원장이 된 남편, 남편을 퇴사 시키고 고시원 원장을 자처한 와이프-

나도 언젠간(?) 빠른 시일내에 퇴사를 꿈꾸며, 우리 인생의 멋진 수식어를 함께 찾아갈 날을 고대한다.




같이보면 좋은 글

연봉1억 워킹맘 김과장,고시원 원장되기로 하다.

대기업 남편까지 퇴사시키고, 고시원을 한다고?



 

작가의 이전글 연락 두절된 남친을 찾아달라고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