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열살차이 06화

6. 연애관

by 이진다

이진다의 두 번째 소설『열살차이』는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창작 소설입니다.

현실의 인물, 사건과 유사하더라도 이는 우연의 일치이며,

일부 인물 및 장소는 서사의 흐름상 가명 또는 허구적 설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즈음 회사 핑계를 아무리 댄다고 할지 언정 지안의 귀가가 늦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서울의 밤거리는 어찌나 화려하고 할 게 많은지..

술을 마시지 않아도 남자친구와 함께 있으니 할 것이 아주 많았다.

또 야밤에 먹는 것은 무엇이든 맛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안이 딱 사회 물을 먹기 전에

학생 때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지안의 상황이 어느 정도 차분해졌을 때 그를 만난 것은 대단히도 큰 행운이었다.


직장인 동호회가 아니었으면 애초에 만날 기회조차 없었을 텐데

정말 우연히도 서로가 순수하게 이성적 관심으로 끌리게 되어 사귀게 된 것은

앞으로 닥칠 어마어마한 시련을 하나하나 넘기는데 분명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쯤 되면 지안의 가정사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그녀의 가정사를 본다면 그녀가 결혼을 오히려 하고 싶다는 생각이 어려울 수 있다.


그녀는 학군지에서 자랐다.

한국에서 대표적으로 손꼽는 그 학군지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졸업했다.

집은 한 때 잘 살다가 IMF 때 보기 좋게 망했다.

그래도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녀의 가족은 거기까지 가진 않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반지하에서 힘들게 살아야 했다.


가난이라는 것은 참 힘든 것이다.

누구든 가난하고 싶어서 가난 해진 것은 아니겠지만

주식으로 벌은 돈보다 더 갖고 싶어서 아버지가 욕심을 내었다.

그리고 한 순간에 아파트를 날려 먹게 되었다.

아버지는 수년간 무직이었고, 한 때 잘 나갔던 인생이 낯설게 느껴질 만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런 가장과 헤어지고 싶어도 자식을 생각하며 헤어지지 못하고

집안의 기둥이 된 어머니는 실질적 가장이었다.


여자가 실질적 외벌이로 3 사람을 먹여 살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초월적인 힘이 필요했다.

남편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시댁도 늘 힘들게 했다.

반대한 결혼을 한 어머니였기에 친정에 가서 속상하다고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뿐이랴 친구들이나 어디 직장 동료들한테도 쉽사리 자신의 마음을 열 수가 없으니

그것은 곧 화병이었고 우울증이었으며 자식들이 아직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만만한 것은 같은 동성인 장녀였으면 그렇게 자연스럽게 지안은 어머니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었다.


그녀가 수 없이 들어 거의 세뇌가 되어버린 어머니의 가르침은 " 능력 키우고 혼자 살라 "였다.

공부를 하는 이유도 대학을 잘 가야 하는 이유도 사회에서 좋은 직업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그 모든 것은 지안이 혼자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지안은 어머니를 이해하려 애썼다.

때로는 어머니를 대신해 어머니가 하고 싶은 말을 아버지한테 전하며

아버지와 싸우기도 했지만 결과는 달라지는 게 없었다.

아니, 애초에 부부의 일에 자식이 끼어든 것이 잘못된 일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지안은 어린 시절에 친족 성추행을 2번이나 당했다.

가해자는 사촌과 남동생.

가난도 부모의 불화도 그리고 남자들의 친족 성추행까지.

생각해 보면 지안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런 엄청난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어머니는 방관했고,

지안은 무너져 내렸으며 자신의 인생에서 "입시"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이 구역질 나는 원가족으로부터 멀리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어쩌면 이러한 심리는 도리어 절대로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머니의 뜻대로 그렇게 살 것이 아니고, 그녀의 가르침대로 살고 싶지도 않았다.

반대로 사는 것이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입증하는 것이라 여겼다.


성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부모는 헤어지지 못해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고 있었다.

그녀의 트라우마는 아무리 정신과 치료나 심리 상담을 받는다고 해도 잠깐이었다.

굳이 이걸 연애하는 대상한테 말할 필요는 없지만

결혼할 상대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녀는 자신이 "수치"라 여겨지는 이 속박으로부터 진심으로 간절히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지안은 재헌과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등등

진지한 이야기 외에도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나 등등

그와는 정말 다양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한국어로 이야기하니 살 것 같다는 생각도 덤으로 들었다.

그전에는 중국어와 일본어를 아무리 잘한다고 한들 한계가 있었는데 말이다.

언어의 장벽이 없으니 어떤 이야기도 다 할 수 있다는 게 기뻤고,

지안은 자신감이 생겨 더더욱 신나게 떠들었다.

그것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든 카톡을 하는 것이든 전화를 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재헌은 바쁜 와중에도 늘 그녀를 생각하며 배려했다.

해외 출장이나 지방 출장이 잡히면 그녀를 위해 선물을 늘 사 왔고,

스케줄 조율이 가능하면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맛있는 간식거리를 준비했으며

통금시간이 있으니 그녀의 집 근처에서 데이트를 하다가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 말이 많다며 재헌을 배려한다고 입을 잠시 꾹 닫는 시늉을 했지만

그는 그녀가 어찌나 다양한 토픽으로 이야기를 하는지 새삼 신기해하면서도

내용이 재미있어 듣고만 있어도 즐거웠다.


하지만 이렇게 말이 많은 그녀도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면 극도록 싫어했다.

이것이 단순히 남자친구와 헤어지기 싫어서 라기 보단 정말 원가족을 말도 안 되게 싫어했기 때문에

재헌은 그녀가 언젠가 말해줄 때까지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맞다 고 생각했다.

또 가끔 가족이야기나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녀의 눈빛이 텅 비어지는 느낌이랄지

애써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는 모습을 볼 때면 재헌은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졌다.

재헌은 분명 그녀에게 아직은 자신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말 못 할 사정이 있다고 여겼다.


재헌은 점점 그의 일상에서 이제 그녀를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존재는 점점 커지고 있었고, 그러한 마음을 숨기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어느 날, 늘 그녀의 집 근처에서 데이트를 하고 이제 데려다주려 할 때 그가 운을 떼었다.


" 지안 씨는.. 그동안 나 만나보니까 어때요? "


" 좋아요 "


" 음.. 나 곧 재건축될 예전에 사둔 빌라도 있고요.. 사업도 열심히 하고 있고.. "


" 저도 오래된 청약 1순위 통장 있어요. 지금 월 10만 원씩 열심히 모으고 있어요. "


이게 아닌데..


갑자기 돈 자랑 하는 것처럼 느껴진 재헌이 얼굴이 빨개졌다.

처음 고백을 했을 때보다더 더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역시 예상하지 못하는 답을 하는 그녀다.


"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지안씨 하나는 충분히 책임질 수 있어요.

나는 지안 씨랑 진지하게 더 만나고 싶어요. "


지안은 재헌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드디어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동시에 씨익 웃었다.


" 아..!! 그래요 그럼 이번 겨울까지 잘 만나면 내년에 결혼해요. "


그 시각,

취직한 이후로 딸이 통금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귀가가 늦는 것을 수상하다고

여긴 어머니가 지안의 방에 들어가 딸의 물건을 뒤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랍 속 한 장의 사진.

재헌과 지안이 웃고 있었다.

어머니의 손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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