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 연휴 첫날 (1)
5월 1일, 한국이라면 하루 쉬는 이 노동절은 명색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는 꽤나 중요한 휴일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근간인 노동자를 위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짧게는 3일, 휴일 등 타이밍이 좋으면 5일까지 쉴 수 있다. 19년 노동절은 수요일이라 수, 목, 금, 토 4일을 쉬고, 일요일에는 출근 혹은 등교를 하게끔 되어 있었다.
다른 지역전문가들은 이미 4월 청명절 연휴가 끝났을 때부터 노동절 연휴를 어떻게 보낼지 계획하느라 바빴다. 물론 정상적인 일상을 살고 있는 중국인들에게도 그 마음은 마찬가지라, 노동절 연휴와 관련된 모든 것들의 값은 폭등했다. 비행기표, 기차표, 숙박료 모두. 어디를 가도 사람이 많을 것 같았고, 어딜 가나 제대로 구경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결정했다. 노동절엔 상해에 있기로. 어딜 가도 사람이 많을 거라면, 왔다 갔다 돌아다니면서 힘 빼는 것보다 상해에 있으면서 못 가본 곳들을 가보는 편이 더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렇다면 4일이나 되는 노동절 작은 연휴(小长假)의 첫날에는 어디를 가볼까? 고민하다 결정한 곳은 바로 프랑스 조계지(法租界). 상해에 가면 꼭 가봐야 한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상하게 여행으로 오게 됐을 때 늘 일정에 넣질 못했던 곳. 사는 곳에서 멀지도 않은데 묘하게 연이 없었던 곳. 시간이 주어진 김에 한번 들여다보자는 생각으로.
프랑스 조계지의 영역은 넓고도 넓어서, 어디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굳이 시작점을 짚어보라고 하면, 일단 상해 지하철 10호선 교통대학 역에서 시작하면 된다. 교통대학이라고 하면, 그렇다, 내가 한 학기 동안 수업을 듣는 학교다. 학교 근처에 이렇게 근사한 동네가 있다니 정말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통대학 역에서 내려 조계지의 랜드마크인 우캉대루(武康大楼)를 향해 걷다 보면 이렇게 일반적인 중국 건축 양식이라고는 하기 힘든 건물들이 곳곳에 나타난다.
하지만 역시 프랑스 조계지의 시작은 우캉대루. 조계지를 소개하는 대표적 사진은 항상 이 건물의 사진으로 되어 있는데, 위치뿐 아니라 건물의 형태나 모습이 정말 랜드마크라고 할 만해서 이의를 제기할 마음은 없다. 내가 알기로 우캉대루는 내가 방문한 이후 19년 하반기쯤인가 한 번 리모델링을 진행하였고, 그탓에 한동안 철조망과 그물 등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후 20년 1월에 다시 방문했을 때는 공사가 다 끝나 있었는데, 혹시 공사 기간 동안 상해를 여행한 분이 계시다면 그런 분께는 영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외국인들이 몰려 사는 동네, 이국적인 건축양식을 갖춘 저택들이 모여 있는 동네, 조용하고 한적한 부촌. 게다가 조계지라는 특수성이 갖는 어떤 안전함. 이런 이유들 때문인지 조계지에는 민국-문화대혁명 이전까지 약간의 부를 가지고 있었던 유명인들의 고택이 많이 남아있다. 보통 화원양방(花园洋房)이라고 불리는 서양식 저택은 지금까지도 조계지 곳곳에 이국적인 향기를 더해준다.
우캉대루를 지나 우캉루를 따라 조금 걷다 보면 문 앞이 흥성 흥성한 한 고택이 있다. 이곳의 이름은 빠진고거(巴金故居). 삼부작 시리즈로 유명한 사천 청두 출신 작가 빠진(巴金, 파금)이 상해에서 머물 때의 숙소라고 한다. 작가가 살았을 당시의 가구나 인테리어 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고, 대중에게 무료로 개방되어 조계지를 찾는 많은 여행객들이 들르는 장소다. 찾아보니 코로나 사태로 인해 요즘은 대외 개방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좀 아쉽다.
본격적으로 조계지를 둘러보기에 앞서 배를 좀 채우기로 했다. 요런 분위기라면 왠지 양식을 먹어야 할 것 같아 수제버거와 파스타, 리조또 등을 파는 STACK이라는 가게에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파스타가 너무 탈상해급이라 좋았다. 지금 이 가게를 찾아보니 이전을 했는지 이 위치엔 다른 가게가 들어서 있다.
이국적인 저택들 외에 조계지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는 바로 플라타너스 꽃가루. 조계지 산책의 가장 큰 방해 요소였다. 그도 그럴 것이 걸어 다니는 모든 길에 아래 사진처럼 플라타너스가 가득 심겨 있었기 때문. 가루가 어찌나 날리던지 걸어 다니면서는 뭘 먹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다들 용케 아이스크림이나 아사이볼을 사 먹고 있네. 대단하다.
건물들을 이래저래 둘러보다 보니 재미있는 점이 보인다. 입구에 보이는 석고문 형상과 그 석고문 틀을 따라 화려하게 조각된 문양들. 건물 외벽은 또 어떤가. 올록볼록 울퉁불퉁 발린 외벽재. 설명을 보니 이것은 이탈리아의 어떤 건축방식이라고 하는 것 같다. 이것만 보면 중국에 있는 건물이 아니라고 해도 믿겠다. 실제로 이렇게 고풍스럽고 이국적인 인테리어 때문에 이곳 옛 양방(老洋房)은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한다. 중국의 부호들은 이런 데 부동산 투자를 한다는 것 같다.
우캉루, 후난루를 지나 걸으니 안푸루(安福路)가 나온다. 커피 한 잔을 사 오른쪽을 보며 또 조금 걷는다. 맞은편에 케이크라고 쓰여 있는 집을 발견하고 건너가 보는데, 케이크를 파는 집은 아니고 소품 편집샵이었다. 작은 다육 식물들을 밖에 진열해둔 것이 귀여워 사진을 찍었다.
걷다 보니 우루무치중루(乌鲁木齐中路)가 나온다. 개인적으로 내가 조계지에서 가장 좋아하는 길. 조계지 메인 스트리트에서는 약간 벗어나 있어 한적한 편이면서, 프랑스, 미국의 영사관이 위치해 있어 풍경은 이국적인 그런 길. 이곳에는 Feiyue의 운동화 가게와 느낌 있는 옷가게도 있지만, 지금의 상해를 사는 주민들의 집도 있다. 이상하다. 멋진 건물을 그렇게 많이 봤는데도 이 넓은 프랑스 조계지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는 곳이 이곳이라니. 여기저기 걸려있는 빨래들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우루무치중루에서 동핑루(东平路)를 거쳐 펀양루(汾阳路)로 넘어오면 예술 느낌 가득한 길이 펼쳐진다. 상해음악학원(上海音乐学院)이 위치한 곳이라 각종 악기를 파는 상점들이 가득하다. 중국어의 학원(学院)은 우리나라의 개념으로 하면 단과대학의 느낌으로, 상해음악학원은 음악전문대학이다. 예술대학 아니랄까 봐 캠퍼스 건물들이 다 유럽풍이다.
시작은 10호선 교통대학 역에서 했지만,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1호선 샨시난루(陕西南路) 역까지 와버렸다. 홍콩계 대형 쇼핑몰 환마오(环贸) iapm이 있는 이곳엔 좀 특이한 문화유적이 있는데, 바로 동방정교회 예배당(东正教堂)이다.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이곳에도 예배당이 생긴 것 같은데, 특별히 개인적인 신앙이나 종교는 없지만 확실히 이런 종교적인 건축물은 그 자체로 풍겨오는 신성한 느낌이 있는 것 같다.
조계지에 대해서는 예전 글에서 잠시 설명한 바가 있다. 상해가 <난징 조약>에 의해 개항되고, 가장 먼저 조계지를 만든 것은 영국. 이후 미국, 프랑스 등 많은 국가들이 각자의 조계지를 세우게 되는데, 묘하게 프랑스 조계지만 따로 떨어지고, 나머지 나라들의 조계지는 공공 조계지로 한 데 묶이게 된다.
황푸강 강변의 와이탄에 외국자본의 은행이나 선박회사 같은 대외적인 건물들이 위치했다면, 조계지에는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이 실제로 생활을 했던 가택들이 위치했는데, 그런 특징이 지금까지도 잘 남아있는 곳이 바로 프랑스 조계지다. 프랑스 조계지라고 해서 프랑스식 건축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고, 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 국가들의 건축 양식도 찾아볼 수 있다. 혹시 2020년 방영된 중국 드라마 <안가(安家)>를 보신 분이 있다면, 거기서 부동산 중개업자가 파는 고급 저택 매물들이 대부분 여기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조계지 곳곳에 위치한 건물들 중 왠지 좀 이국적이다 싶은 건물들에는 문 옆에 그 건물과 관련된 간단한 설명들이 적혀 있다. 몇 년에, 어떤 건축가에 의해 어떤 나라의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인지 적혀있으니 배경지식이 없어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혹시 학구열이 넘치지만 참고서가 없으면 왠지 불안한 분이라면, 우캉루 초입에 있는 여행정보센터에서 전단지를 받아서 구경을 시작하면 된다.
사실 조계지를 거닐 때 가장 필요한 건 다른 무엇도 아닌 튼튼한 다리와 편한 운동화다. 왜냐하면 프랑스 조계지는 굉장히 넓고, 여러 갈래의 길이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길 사이사이마다 보이는 풍경이 모두 달라서 들어가 보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어져 있다. 그 사잇길들을 모두 걸어 다니려면 엄청난 체력이 필요하고, 그렇게 체력을 소비해야지만 자신의 취향에 맞는 '거리'를 찾을 수 있다.
개인적인 조언을 하자면, 조계지를 여행할 때 지도책은 잠시 내려놓는 편이 좋겠다. 나 같은 길치들을 위해서는 최적의 조언일지도! 어느 길로 어떻게 해서 어떻게 구경해야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으면 오히려 새로운 발견을 하기 힘들 수 있을 것이다. 조계지에 왔다가 '별거 없네~'하며 실망하는 사람들의 90%는 아마 이것이 패인이었을 것이다. 목적의식이나 성취욕 같은 것은 잠시 한 구석으로 밀어놓고, 운동화가 가는 대로 발걸음을 뗀다면 이곳이 마음에 들어올 것이다.
[중문 일기 in 위챗 모멘트(朋友圈)]
(譯) 노동절 연휴, 다들 상해를 떠난 이때, 나는 상해에 남아서 상해 지역 연구를 하기로 했다. 첫날은 우선 프랑스 조계지 여행! 우캉루-안푸루-우루무치루-동핑루-펀양루를 지나 동방정교회 예배당까지. 사람도 별로 없었고, 무엇보다 생각지 못한 즐거움이 많았다. 학교에서도 별로 멀지 않으니, 다음에 또 와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