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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이드는창가 Mar 20. 2021

훙커우에는 진짜 상하이가 있다

노동절 연휴 첫날 (2)

파스타 많이 먹었으니, 총요우빙 좀 먹자


짧지 않지만 길지도 않은 3일의 노동절 연휴 나들이를 플라타너스 꽃가루 굴복해 그만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조계지에서 돌아와 숙소에서 짧은 개인 정비를 마치고 다시 총총총 집을 나온 이유는. 사실 조계지의 세련되고 이국적인 풍경(중국어로 하면 洋气 표현할  있을까?)  물렸던 것도 있고,  달에   쓰는 상해 생활 보고서에  상해의 모습을 담아볼 계획이라 소재를  찾아보러 무작정 나온 것도 있었다.


오전 내내 먹은 파스타를 좀 지워줄 만한 '중국스러운', 아니 더 나아가 '상해스러운' 곳으로 선택한 곳은 훙커우구(虹口区). 우리에겐 윤봉길 의사와 관련된 훙커우 공원(現 루쉰 공원)으로 이름이 알려진 곳인데, 이곳은 또한 상해에서 옛 상하이(老上海, 라오상하이)의 모습이 아직까지는 좀 남아있는 곳 중 하나다. 한편 이런 라오상하이 풍경이 주는 아날로그함 때문인지 영감을 꿈꾸는 많은 예술가들도 이곳으로 몰려들었는데, 덕분에 훙커우에서는 현대와 근대의 묘한 공존을 볼 수 있다. 우선 상해 석고문 주택의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먼저 가보기로 했다.




진짜 상해 사람들이 살았던 곳, 석고문 주택


석고문 주택에 대해서는 예전 매거진 글에서 간단하게 설명한 바 있다. 조계지에 살던 서양인들이 중국인 난민들의 거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면적이 한정된 서양식 주택 안에 공간을 촘촘히 나눠서 지은 공동 주택이다. 중국식 주택 문화와 서양식 주택 문화가 융합된 석고문은 어찌 보면 상해라는 도시를 대표할 수 있는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상해 역시 동서양의 문화가 융합된 도시이니 말이다. 신천지(新天地)나 톈즈팡(田子坊)만 가도 석고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고, 그만큼 상해 사람들의 석고문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하지만 이렇게 석고문이 문화적 가치가 큰 상해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올라가면서 더 이상 실제 사람이 주거하는 주택으로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2009년에 방영한 중국 드라마 <와거(蜗居)>를 보면 신혼인 주인공 부부가 구하게 된 집이 나오는데, 석고문에서의 삶이 그들이 살던 집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방음은커녕 옆집 부부싸움 소리도 다 들리고, 도무지 프라이버시란 것은 없는 삶이다. 게다가 내부 구조가 너무 복잡하고 공동 주방을 사용하는 데다 건물 연식이 오래되어 화재 및 각종 안전사고에 항시 노출되어 있다.


2019년 상해 양회(两会)에서 노후주택 개선이 시급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0주년을 맞아 상해가 도시 이미지 개선을 과제로 받게 되면서 상해 시정부는 오래된 석고문 주택을 허물든 재건축을 하든 어떤 정책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아쉬운 것은 이런 방침에 맞게 상해 시정부에서 내세운 정책이 대체로 기존의 석고문 주택을 모두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상해의 전통이 점점 허물어져간다는 점이다.


내가 살고 있던 난징시루 근처에도 석고문 주택들이 있었으나, 이런 정책적인 문제로 인해서 이미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상해에서 아직도 그 시절 건축된 석고문 주택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훙커우의 석고문 주택 구역(石库门建筑群)이다. 난징시루에서 지하철 12호선을 타고, 10호선으로 갈아타 하이룬루(海伦路) 역에서 내리면 석고문 주택 구역과 그 근방의 힙한 장소들을 모두 만날 수 있다.



이 주변에는 크게 두 곳의 석고문 주택이 있는데, 한 곳은 루이칭리(瑞庆里)이고, 다른 한 곳은 란웨이리(兰葳里)다. 지도에 포인트 된 곳이 루이칭리, 그 바로 왼쪽 아래에 보이는 곳이 란웨이리다. 북경의 후통 같이 일반 사람들이 살던 동네를 상해에서는 리롱(里弄)이라고 하는데, 그 리(里)가 바로 이 두 곳의 이름에 있는 '리'와 같은 말이다. 19년에 이곳에 방문했을 때를 기준으로, 란웨이리는 이미 재개발이 결정되어 이주 절차가 완료된 상황이었고, 루이칭리에는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창문이나 벽이 거의 허물어지다시피 한 이곳은 란웨이리. '주택 재개발은 민생을 위한 가장 좋은 정책'이라는 빨간 표어만 바람에 흩날리고, 빨리 이사를 결정할수록 보상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는 홍보물도 아직 붙어있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나는 다소 실망했는데, 다행히 다음으로 가게 된 루이칭리에는 아직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1920년대에 지어졌다는 이 석고문 주택 루이칭리에는 아직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 증거는 곳곳에 널려있는 빨래들. 주택 입구에는 할아버지가 간이 의자를 놓고 앉아 늦은 오후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내부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듣기로는 가장 그 본래의 석고문 주택에서의 생활이 잘 보존되어 있는 주택이라고 한다. 전통의 보존 측면에서야 의의가 있겠지만 막상 사는 사람들은 당장 재개발이 결정되어 떠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보고 작성을 위해 이런저런 사진을 찍은 후 나는 다음 목적지 반다오완(半岛湾)으로 향했다.



반다오완(半岛湾)과 반층 서점(半层书店)


석고문 주택 구역 바로 옆에는 반다오완문화창의원(半岛湾文化创意园)이라는 마치 인사동 쌈지길 같은 곳이 있다. 건물이 위치해 있는 곳은 반도처럼 생겼다. 위의 지도에서 보면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곳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반다오완이다. 반다오완 문화창의원의 반다오완(半岛湾)이라는 이름에는 반도처럼 생겼다는 의미의 반다오(半岛)와 청년 예술가들의 안식처(港)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있다.


그런데 이곳의 옛 모습을 파고 들어가면 예술가들의 안식처와는 좀 거리가 멀다. 이 건물의 옛 이름은 하얼빈대루(哈尔滨大楼). 본래 미국 상인들을 위해 미국 건축 양식으로 만들어진 건물이었지만, 공공조계지와 중국인들의 주거지의 경계선에 위치해 있던 탓에 이곳은 혼란스러웠던 근대의 상해에서 더더욱 혼란스러운 지역에 속했고, 당시 이 건물은 이 지역의 건달들이나 흔히 말하는 흑사회(黑社会, 마피아?)들이 모이던 곳이었다. 신중국 성립 후 이 지역에 대해서 대규모 정돈 작업이 진행되면서 이곳은 청년 예술가들의 작업활동 공간으로 환골탈태했고, 그러면서 지금의 예술적 의미가 부여되었다.



우측에 하얼빈대루를 끼고 있는 이 길의 이름도 하얼빈로(哈尔滨路). 반다오완 건물에는 여전히 옛 역사를 보여주듯 하얼빈대루라는 당시의 이름이 적혀있다. 미국의 건축 양식을 따와서 그런지 붉은 벽돌로 지어진 것이 특징인데, 입구로 들어가면 다섯 동 정도의 작은 건물들로 나뉘어 있고, 아틀리에나 공방, 사무실, 카페 등 다양한 업종이 입주해 있다. 또 근처에는 상해 음악 밸리(上海音乐谷)라는 공연장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그리고 이곳에는 또 하나 가볼만한 곳이 있으니, 바로 반층 서점(半层书店)이다. 한국에 있을 때도 서점에서 문구 구경, 책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던 터라 이곳에 와보는 것을 꽤 기대했었다. 복단대학 법학 석사, 동제대학 건축 박사가 각자의 일을 그만두고 마음속에 꿈꾸던 서점을 차린 것이 바로 이곳이라고 하는데, 서점의 상징은 단연 1.5층의 또 다른 공간. 본래 건물 구조 자체가 이렇게 독특했던 것을 약간의 리모델링을 거쳐 독립 서점으로 만든 것이란다. 책의 종류가 많지는 않지만 서점 주인이 직접 고른 책들이고, 책갈피나 공책 등 간단한 문구류도 팔아 대체적으로 따뜻한 느낌이었다.




기묘한 예술단지, 1933라오창팡(1933老场坊)


반다오완 외에 이 지역에는 또 다른, 문화예술단지, 혹은 멀티플렉스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1933라오창팡(1933 老场坊). 한국의 상해 여행 책에도 종종 소개되곤 하는 곳이라 상해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에게도 꽤 알려진 곳이다. 이곳의 대문을 들어서면 왠지 서늘하다. 날이 아무리 더워도 이곳의 온도는 왠지 바깥보다 낮은 것 같다. 또 이곳은 전체적으로 어둡다. 낮에도 왠지 조도가 낮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 이곳은 1933년 공공조계지 관료에 의해 상해에 지어진 동양 최초의, 세계 3위 규모의 도살장이었다.


아, 방금 말한 어둡고 서늘하다는 것이 단순한 심리적인 효과로 인한 것은 아니다. 영국의 건축가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이곳은 실제로 일부러 밖에 비해 조도를 낮게 만들게 설계되었고, 또 영국 수입산 시멘트만 사용하여 바깥 온도가 아무리 높아도 실내는 다소 서늘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원효대사 해골물 이야기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이런 과학적인 사실들이 심리적인 작용으로 더 증폭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묘하게 더 간담이 서늘한 건 왜일지.


도살장이라는 것 때문에 이상한 얘기만 했는데, 사실 건물 자체만 보면 독특하고 예술적인 편이다. 소를 잡는 곳도 이렇게 예술적 요소들을 가미하다니, 영국인들 참 독특하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전체 건물이 고대 로마식 바실리카식 건축양식이라는데, 건축 쪽에 배경지식이 없다 보니 그런 디테일한 것은 모르겠고, 적어도 특이하다는 것 하나는 알겠다.


건물을 정면에서 보면 아래 사진처럼 저렇게 사각형으로 되어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막상 원형으로 된 통로를 따라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중국 풍수학의 '하늘은 동그랗고 땅은 네모나다(天圆地方)'라는 개념에서 온 것이라는데, 믿거나 말거나. 좀 더 믿을만한 썰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들이 끌려가다가 중간에 멈추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소들을 어지럽게 할 수 있는 나선형의 통로로 만들었다는 것. 도살장이었다는 과거를 세탁하기보다는 당당하게 꺼내놓기 위함인지, 1933라오창팡 건물 안에는 곳곳에 소들이 실제로 갇혀있었던 것 같은 우리의 문이 남아 있다.


지금은 음식점, 카페는 물론이고 작은 소품을 파는 공방이나 소규모 연극을 공연하는 소극장까지 다양한 활동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하여, 많은 사람들이 주말 나들이 장소로 찾게 되었다. 나 역시 이때 와본 후에 연극 공연을 보러 다시 한번 왔었는데, 밤에 오니 또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웨딩 스냅을 찍는 커플들이나 연인들끼리 사진을 찍는 장면도 실제로 몇 번 목격했는데, 사실 솔직한 심정으로 여기서 그런 사진을 찍고 싶진 않다. 어딘가에서 소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ㅠㅠ




여기에 이런 곳이?! SNH48 공연장


라오창팡을 짧게 구경하고 나와 조금 걷다 보니 사람들로 북적이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게다가 그 인파들 대부분이 젊은 남자. 연예인 사무소라도 있는 걸까 싶어 그 건물 근처로 가보니 어째 익숙한 숫자가 있다. 바로 48! 알고 보니 이곳은 일본의 아이돌 그룹 AKB48의 자매 그룹으로 시작했던 상해의 AKB48, SNH48의 공연장이었다. 이름은 Star Dream 극장(星梦剧院). 어째 이름이 조금 노골적이다.



마침 상해로 나오기 전 한국에 있을 때 프로듀스 101 시즌 3, 즉 일본과 한국의 콜라보로 진행되었던 기수를 열심히 봤었고, 아이즈원의 초반 팬질을 했던 터라 상해에서 만난 48이란 숫자가 꽤나 반가웠다. (시즌 3에 나왔던 일본인들은 본래 일본의 AKB48 소속의 멤버들이다) 하지만 찾아보니 2016년 일본의 AKB 소속사는 상해를 포함한 중국의 자매 그룹과의 관계를 단절했고, 지금은 일본과 아무런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상황인 것 같다. 여하튼 생각지도 못하게 중국에서 이렇게 걸그룹 팬질을 하는 청년들을 만나니 신기했다.



리양루(溧阳路)에 숨 쉬는 옛 작가들


하이룬루에서 리양루(溧阳路) 근처로 움직이면 또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석고문 주택에서 일상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보였다면 여기는 다시 조금 돈이 있는 사람들의 저택이다. 누군가 하고 들여다보면 루쉰과 곽말약 등 근대의 중국 지식인들. 공공조계지이자 일본인 집단 거주지에 가까웠던 훙커우에 살던 옛 작가들이다.


죽은 사람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을 먹고 산다고 했던가? 한때 이곳을 살았던 중국인 지식인들은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은 상해 시정부에서 한다. 시정부는 루쉰의 장서 보관소나 곽말약의 옛 거주지 등을 잘 보존하고 그곳에 사람들이 자주 올 수 있게 만들어 접근성을 높인다. 그 덕분에 죽은 이들은 아직까지 산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고 있다. 훙커우는 이렇게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만들어낸다.




Old-Shanghai는 훙커우에, New-Shanghai는 난징시루에?


얼핏 보면 완벽한 도시 상해에서 약 두 달째 지내고 있던 나는 이 도시에는 '인간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매일 아침 인파에 밀려 학교에 가곤 하지만 막상 도시 자체에서 사람 냄새가 안 난다고. 명품관은 그렇게 많은데, 조그만 문구점을 찾으려면 한참 돌아다녀야 하고, 과일가게 하나를 찾기 위해 20분 거리를 걸어가야 한다고.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숙소를 잡은 동네가 그랬다. 스타벅스 로스터리, 이세탄 백화점, 도토루 커피 등 각종 외국 자본이 넘쳐나는 난징시루에서 생활의 냄새를 찾은 것이 바보 같다면 바보 같은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난징시루의 밤 풍경들


훙커우를 둘러보고 나는 그 동네에 더 머무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이곳이야말로 내가 보고 싶었던 진짜 상하이가 있는 것만 같았다. 사람 냄새가 나는,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일반적인 사람들의 역사. 지하철을 타고 난징시루로 돌아오자 분위기는 일순 변했다. 갑자기 다른 도시에 온 것만 같은 화려함. 더더욱 방금 전까지 있던 훙커우가 그리워졌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밤 산책을 빙자하여 집 근처를, 난징시루를 걷다 보니 몇 가지 발견을 할 수 있었다. 우선, 우리 집 근처에도 석고문 주택은 있었다! 물론 너무 노른자위 땅이라서 이미 재개발이나 재건축 결정이 끝나서 그렇지, 여기도 그런 서민들의 삶(柴米油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화려한 도로와 백화점의 명품관보다 사람들이 더 몰린 곳은 라오상하이 총요우빙(老上海葱油饼)을 파는 곳이었다. 결국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은 것이다. 난징시루에 살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부자인 것도 아니고, 어쩌면 모두 천 원짜리 총요우빙 하나면 행복해지는 사람들인 것이다. (아, 하지만 난 이후에 훙커우의 총요우빙은 난징시루보다 훨씬 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ㅠㅠ)


진짜 상하이는 훙커우에 있다. 하지만 난징시루라고 가짜 상하이의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몇 시간의 산책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나는 훙커우의 모습이 더 마음에 들었지만, 난징시루의 앞과 뒤가 다른 모습도 꽤나 매력적이었다. 한국에서 글을 쓰고 있는 2021년의 지금, 부디 2019년에 봤던 라오상하이의 모습들이 조금이나마 남아있기를 바란다. 허울뿐인 전통이 아니라, 진짜 상해를 살았던, 혹은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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