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 연휴의 끝자락
5월 1일, 2일 이틀 연속으로 열심히 상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덕에 다리가 아주 튼튼해진 느낌이다. 3일은 처음으로 진득하게 동네 구경을 좀 해보기로 했고, 노동절 연휴 마지막 날인 4일에는 4월에 한 번 참여했던 교류회를 한 번 더 참석해보기로 했다. 집에 틀어박혀 있으면 친구는 절대 사귈 수 없다. 무슨 일이든 계기를 만들어서 밖으로 나가야 한 명이라도 더 만난다. 5월의 이 아름다운 햇살을 못 본 채 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동네 구경 루트로 정한 것은 집 근처 난징시루(南京西路)와 정안사(静安寺). 예전에는 서구(西区)로 불렸던 곳인데, 근대 상하이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한껏 멋을 부린 신사 숙녀들이 바삐 움직이는 동네로 많이 묘사된다. 당시를 살았던 모던한 사람들은 난징시루를 걸으며 쇼핑을 했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차도 마셨겠지.
그때의 그 포지셔닝은 바뀌질 않아서, 여전히 상해 사람들의 머릿속에 난징시루 및 정안사를 필두로 한 정안구(静安区)는 멋부림의 동네, 부자의 동네, 쇼핑의 동네라는 인상이 강하다. 다른 글에서 쓴 것처럼, 여기 살고 있다는 친구가 있으면 집에 돈이 많을 확률이 매우 높다. 우리끼리 이야기로, 난징시루는 '상해의 청담동'. 오죽했으면 같은 동네에 사는 지역전문가끼리 농담 삼아 '우리가 여기서 제일 가난할 거야'라는 말도 했을까.
한때, 그리고 오늘까지도 핫한 동네인 난징시루답게 이곳에는 동네 곳곳에 근대 상하이탄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그 당시 좀 살던 사람들이 거주하던 주택이나 그들이 자주 가던 극장과 쇼핑몰까지.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던 거리라고 하더라도 조금만 신경 쓰고 바라보면 다르게 보인다.
아파트 문을 나와 2호선 난징시루 역까지 걸어간다. 가는 길엔 전기차 매장도 있고, 왕자이 우유(旺仔牛奶)로 유명한 왕왕 그룹(旺旺集团) 빌딩도 있고, 그 유명한 스타벅스 로스터리 공방도 있다. 하지만 내 발길이 멈추게 하는 건 그런 현대식 건물이 아니라 난징시루에 남아있는 과거의 흔적들이다. 예를 들면 장위안(张园) 같은.
2호선 난징시루 역 근처에는 장위안(张园)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동네가 있다. 내가 갔을 때는 이미 방문객의 참관을 제한한 상태였는데, 사실 이곳은 19세기 상해 사람들의 놀이 공간이었다. 청나라 말기 장숙화(张叔和)라는 사람이 이곳을 산 뒤, '장가화원(张家花园)'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여기에 전시관, 무대, 놀이공원, 카페 등을 만들었고, 당시 소위 '인싸'들은 이곳에 놀러 와서 놀았다고 한다.
이후 20세기에 들어서는 이 놀이 공간을 석고문 주택지로 재조성하였는데, 워낙 땅이 넓었어서 석고문 주택만 28종 넘게 지어졌다. 상해라는 도시가 도시 전체의 리모델링을 진행하면서 주거환경이 썩 좋지 못했던 이곳도 재개발의 그림자가 드리웠지만, 석고문 주택이 가진 역사적인 가치를 고려하여 건물은 남기고 주민만 이주시키는 조치를 취했고, 2019년 당시에는 사진처럼 건물들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당시 내 느낌엔 남아있는 건물을 신톈디(新天地)나 톈즈팡(田子坊)처럼 개량하여 대중에 개방할 것 같았는데, 현재 모습이 어떤지 모르겠다.
장위안을 보고 뒤를 돌아 골목을 나오니 익숙한 브랜드가 눈에 보인다. 바로 투썸플레이스. 유럽의 어느 건물처럼 생겼는데, 한국 브랜드인 투썸플레이스가 들어와 있으니 신기하다. 중국어로는 투샹카페(途尚咖啡)라고 번역해온 듯하다. 사실 이 건물 전체가 투썸플레이스는 아니고, 대부분은 호텔이다. 카세 부티크 상하이(Cachet Boutique Shanghai)라는 호텔인데, 지하철도 가깝고 완전 시내에 위치해 있으니 여행자가 묵기엔 나쁘지 않은 호텔일 것 같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상해에서 나름대로 국위선양(?)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2019년 5월 당시, 투썸플레이스는 아직 CJ 소속이었다) 이곳이 그해 하반기에 웬 그릭 요거트 집으로 바뀌어있었다. 중국에서 투썸이 자리를 잘 못 잡아서 그런 것이었을까? 땅값이 워낙 비싼 동네일 테니 이해는 되지만, 좀 아쉽다. 지금은 그 요거트 자리에 무엇이 들어왔을까? 변화무쌍한 상해라 다시 갔을 때 못 알아볼까 무섭다.
아래 왼쪽 사진은 난징시루의 도로 표지판을 찍은 것인데, 그 뒤로 어렴풋이 정안별숙(静安别墅)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별숙(别墅)는 한국어로 하면 별장 같은 개념인데, 지금도 중국에서 별숙구(别墅区)에 산다고 하면 부자라고 인식한다. 그런 부자들이 사는 동네 중에 상해에 위치한 곳이라고 하면, 이 정안별숙에 사는 사람들의 주머니 사정을 알만하다. 아, 물론 예전에는 그랬을 것이라는 것이고, 지금은 정작 이 집들의 주인들은 고층 아파트에 살고 여기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 들어 살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세를 들어 살려고 해도 돈이야 물론 많이 필요하겠지만, 집주인만 하겠는가?
조금 더 길을 따라 걸으면 근대 상해에 살았던 사람들의 오락 장소, 극장이 나온다. 민국 30년, 그러니까 1941년 지어진 이 극장의 영어 이름은 Majestic Theater, 중국어 이름은 메이치대극원(美琪大剧院). 외국 영화와 연극 등의 공연이 진행되었던 이 극장은 지금까지도 여러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나도 이 극장에서 연극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시설이 옛날 것이다 보니 자리는 좀 불편했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상해 사람들은 이곳에 대한 애정이 충만한 것 같다.
눈 깜짝할 새 난징시루에서 샨시베이루(陕西北路)로 넘어왔다. 볕이 좋고 날이 좋으니 걷는 것이 힘들지 않다. 게다가 보이는 광경들이 모두 눈길을 잡아끈다.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건물들이 정말 많다.
샨시베이루(陕西北路) 369호에는 무척 큰 저택이 하나 있다. 지금은 송경령 기금회(宋庆龄基金会)로 이름 붙여진 이곳은 본래 송가화원(宋家花园)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즉, 송씨 일가가 1918년 상해에 살기 시작하면서 살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중국을 뒤흔든 세 자매가 이곳에 살았다. 시중에 내놓으려고 하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나올 수도 있지만, 주인의 의도대로 이곳은 기금회가 되었고 지금은 종교 복지단체처럼 운영되고 있다.
난징시루에서 정안사로 거의 다 왔을 때, 고풍스러운 저택에서 또 익숙한 중국의 느낌을 발견했다. 창더루(常德路) 310호, 군인 가족들의 주택이라는 이곳은 4층짜리 벽돌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빨래를 또 잔뜩 말려놓은 것이다. 처음 중국에 와서 이 광경을 봤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빨래를 그냥 집에서 말리지 뭘 또 밖에다 말리나 싶고, 저렇게 예쁜 집에.
하지만 약 두 달 정도 상해에 살아보니 이해가 되었다. 일단, 3~4월 모두 해가 제대로 나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해가 나더라도 미세먼지 가득한 날이 대부분. 또 상해는 습하다. 기본적으로 공기가 물을 가득 머금고 있다. 하지만 이날 상해는 해도 잘 나고, 공기도 좋고, 빨래를 말리기 딱 좋은 날씨였다. 상해에 살다 보면 이런 날이 흔치 않다. 어떻게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묵은 빨래를 하고 널어놓아야 한다. 어떤 일들은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모른다.
정안사로 본격적으로 넘어가기 전에, 출출한 속을 좀 달랠 요량으로 늘 보기만 하고 사 먹진 않았던 총요우빙(葱油饼) 집으로 향했다.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궁금해만 했었는데, 처음으로 한 번 사 먹어보기로 한 것이다. 총요우빙만 먹을 순 없으니 근처에서 버블밀크티도 하나 샀다. 총요우빙과 밀크티를 들고 길을 걷고 있으니 다른 무엇도 부럽지 않다.
총요우빙의 이름을 보면, 파를 듯하는 총(葱), 기름을 뜻하는 요우(油), 전병을 뜻하는 빙(饼)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파기름 빵이라는 말인데, 정말 이렇게 직관적으로 음식 이름을 지어도 되나 싶다. 중국 전역에 각종 방법으로 만든 총요우빙이 존재하는데, 상해에서 파는 총요우빙은 보통 라오상하이 총요우빙(老上海葱油饼)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상해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총요우빙은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추억의 음식이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학교 앞에서 팔던 떡볶이나 떡꼬치 같은 느낌일까?
총요우빙은 일단 그 냄새가 엄청나다. 백종원이 종종 방송에서 이야기하는 파기름이 그 원리라, 빵 자체에서 파기름의 냄새가 나고, 이게 미뢰를 자극한다. 만드는 사람의 스킬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한 입 베어 물면 기본적으로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서, 바삭한 식감에 한 번 놀라고, 속에서 나는 은은한 파의 향기와 감칠맛이 매력적이다. 파 말고는 특별한 것이 들어간 것 같지도 않은데 대체 어떻게 이런 맛이 나나 놀랍기도 한데, 나중에 친구에게 들으니 안에 돼지기름 같은 것을 약간 넣어서 맛을 더한다고 한다.
이날 먹었던 총요우빙도 참 맛있었지만 상해에서 사실 제일 맛있게 먹은 총요우빙은 신창(新场)에 있었다. 값도 난징시루에서 먹었던 것의 반값밖에 안 됐는데. 언제 또 그곳에 가서 총요우빙을 먹을 수 있을까?
상해에 사는 사람들에게 '정안사(静安寺)'를 언급했을 때, 바로 사찰을 떠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정안사라는 동네는 마치 한국의 압구정동이나 청담동, 혹은 가로수길처럼 온갖 쇼핑몰이 들어와 있는 번화가이기 때문이다. 정안사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지우광(久光), Reel 백화점, 캐리센터 등 안 파는 브랜드가 없는 백화점이 가득한 곳. 하지만 쇼핑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내가 관심이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도심 노른자위 땅에 떡하니 자리 잡은 절, 정안사였다.
종교가 없는 내게 도심에 있는 절에 대한 로망을 심어준 것은 2009년 처음으로 북경에 갔을 때 다녀온 법원사(法源寺)라는 사찰이었다. 어떻게 알게 되어 가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당시 잠깐 묵었던 북경사범대학(北京师范大学)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물어물어 다녀왔던 일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평일이라 방문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인지 한적한 사찰에서, 코로 짙은 향 냄새를 맡으며 스님들이 수련을 하고 생활하는 모습을 보았던 장면. 북경이라는 큰 도시의 도심에 이렇게 한적하고 조용한 절이 있다는 것에 놀랐기 때문이었을까? 중국의 절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가까이 위치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정안사 역시 법원사 같은 한적함을 선사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입구의 그 인파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정안사라는 동네는 참 기묘하다. 일단 지하철역은 위에 보이는 것처럼 고풍스러운 건축물 아래에 지어져 있는데, 절 입구로 가는 길에 온통 백화점이다. 게다가 절도 황금빛으로 칠해놓아서 그런지 묘하게 배금주의(拜金主义)의 향기가 난다.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아, 참고로 이 절 근처에 있는 상가를 잘 보면 사찰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듣기로는 괜찮은 식당들도 있다고 하니, 관심이 있는 분들은 가보셔도 좋겠다. 이렇게만 보면 한국의 조계사 근처가 생각난다.
일단 도착은 했으니 들어가 본다. 어째 방문객의 약 30%는 서양인인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정안사 근처에 서양인이 많이 산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근처에 있는 상해희극학원(上海戏剧学院) 어학원에는 금발머리의 외국인이 많다고. 정안사 근처에 괜찮은 양식 음식점이나 칵테일바가 많은데, 다 수요가 있으니까 가게가 생긴 것이겠지?
입구 앞에서 표를 파는 듯한 곳이 있는데, 사실 이 곳은 입장료가 없다. 여기서 돈을 주고 표를 사는 것은 공덕금(功德金)의 형태이며, 향을 올리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래서 표를 들고 들어가면 올릴 향을 받을 수 있다. 표값은 50위안. 향 값도 동네를 보고 결정되는지 다른 데보다 비싼 편이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풍경이 또 참 기묘하다. 황금빛 절과 그 뒤를 수놓는 빌딩 숲. 동네가 동네니만큼 이해해야겠지만, 도심 속 사찰이 갖는 엉뚱한 번화함이 좀 낯설다.
정안사라는 절의 원래 이름은 정안고사(静安古寺)인데, 그 역사를 타고 올라가면 손권이 나온다. 오나라 손권 때 만들어진 절로, 본래 위치는 쑤저우허 북쪽이었지만, 이후 강 범람이 너무 심해 남송 때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문제는 이 절이 상하이의 노른자 땅에 위치해 있었다는 점이다. 조계지를 열심히 건설하던 서양 열강들이 이런 노른자 땅을 두고 볼 리 없었다. 그래서 절은 남겨두되, 그 외의 땅을 모두 상업지구로 바꿔버리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래서 지금의 이런 특이한 풍경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럼 정안사는 문화대혁명을 피해 갔는가? 그럴 리가 없다. 산구석에 있는 절도 아니고, 이렇게 도시 한가운데 있는 절이 문혁을 피해 갔을 리 없지. 아주 정통으로 맞았다. 문화대혁명 때 이 절은 모두 파괴되고 공장이 되었고, 안에서 생활하던 스님들은 모두 강제로 속세로 돌아가게 되었다. 80년대에 이르러서야 전통을 보존하자는 취지로 정안사의 재건이 결정되었고 다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문화대혁명, 정말 대단하다. 전국 각지에 당시 홍위병들로 인해 파괴된 문화유산들을 만날 때마다, 지금 중국이 왜 그렇게 문화대혁명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 하지 않는지 살짝 이해가 된다. 부끄럽겠지.
재건이 완료된 정안사지만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크레인이 오가고 있다. 그래서 19년 이곳에 갔을 때의 풍경은 사실 좀 기대 이하였다. 북경 법원사에서 느꼈던 그 한적함보다는 졸속으로 개발하는 뉴타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뭐 이런 곳이 한둘이겠냐마는. 하지만 절 뒤편으로 살짝 돌아 들어가면 앞에서 보기보다 좀 더 한적한 공간이 나온다. 스님들이 실제 거주하는 곳이기도 해서 조용하다.
그런데 재밌는 풍경을 보게 되었다. 스님들이 기거하시고 참선하신다는 구역의 복도를 걷던 중, 엘리베이터가 있었는데, 이 엘리베이터의 문마저 금색이었던 것이다. 누군가 중국 전역에서 가장 비싼 절을 꼽자면 상해의 정안사라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가 엘리베이터까지 금을 씌워놨네. 물론 중국인들이 금색을 길하게 여기기도 하고, 불교도 종파에 따라 그 건축양식이나 대표하는 색감이 다르기는 하지만, 무소유를 말하는 불교 사찰에서 금색을 이렇게 많이 보니 사실 좀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바쁘게 보낸 노동절 연휴였다. 5월의 상해는 맑고, 맑고, 맑다. 1년간 상해에 있으면서 가장 좋았던 한 달을 꼽으라면 아마 5월을 꼽을 것 같다. 그만큼 날씨도 좋고 공기도 좋고, 풍경도 하나같이 예쁘다. 난징시루의 탁 트인 길에 빽빽한 가로수들 사이를 걸으면 마음속 고민들도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노동절 연휴가 그 행복했던 5월의 시작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난징시루의 하늘이 너무 예뻐서 사진으로 남겼다. 5월 한 달, 내 휴대전화엔 예쁜 상해의 하늘과 구름 사진이 잔뜩 담겼다. 사진을 통 찍지 않는 요즘을 생각하면, 상해에 있을 때 내 감각이 조금 더 살아있었구나 싶다. 글을 쓰다 보니 5월의 상해가, 너무너무 그립다.
[중문 일기 in 위챗 모멘트(朋友圈)]
(譯) 5월 2일, 중국에서 처음으로 브런치를 먹어보고, 치바오 라오지에(七宝老街)를 둘러봤다. 또 루쉰공원과 루쉰기념관을 구경했다. 중국인들의 루쉰에 대한 존경심을 느낄 수 있었다. 5월 3일에는 처음으로 상해 총요우빙을 먹어봤고, 정안사를 다녀왔다. 5월 4일에는 교류회를 가서 또 친구 몇 명을 사귀었다. 오늘 난징시루의 석양이 너무 예뻤다. 약간의 구름이 있어야 하늘은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다.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흐린 날이 없으면 누가 맑은 날을 아껴주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