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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이드는창가 Mar 27. 2021

루쉰을 만나다, 루쉰공원

노동절 연휴 둘째날 (2)

하루는 짧고, 돌아다닐 곳은 많다


치바오(七宝)에서 잔뜩 사람에 시달리고 인파에 떠밀리듯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왔는데, 오후 두 시 남짓밖에 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날이 많지도 않은데, 오후부터 남은 시간을 허투루 보내기가 너무 아쉬웠다. 어딘가를 가고 싶은데 또 유명 관광지를 찾았다간 치바오에서처럼 공황장애 전 단계까지 갈까 두려웠다. 그래서 고른 곳이 루쉰공원. 사실 전날 훙커우에 갔을 때 가보려다 시간이 맞지 않아 못 가본 루쉰기념관이 내심 마음에 걸렸기 때문인데, 치바오보다는 사람도 적고 한적할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루쉰공원은 그 규모로 보면 상해에서 결코 작은 공원은 아닌데, 이상하게 그 체급(?)에 비해서는 평가절하되어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루쉰의 묘와 루쉰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는 공원인데 왜일까 고개를 갸우뚱하다가도, 그 평가절하로 인해서 오히려 이곳이 훙커우 사람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지역 공원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래도 인기가 많아지고 관광객이 늘면 세기공원(世纪公园)처럼 입장료를 받을 수도 있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주민들은 오지 않게 되니까 말이다.


한국에서는 루쉰공원이라는 이름보다 훙커우 공원이라는 이름이 더 낯익을 수도 있겠다. 이곳이 바로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이 일어났던 바로 그곳이다. 사건이 있은 후 중국에서는 해당 의거가 일어났던 곳에 윤봉길을 기념하는 '매원(梅园)'이라는 이름의 기념관을 만들었는데, 루쉰 묘, 루쉰 기념관 외에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이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난징시루에서 루쉰공원을 가려면 우선 지하철 12호선을 타고 취푸루(曲阜路)에서 내려서 3 정거장 간 후 훙커우 축구장(虹口足球场) 역에서 내리면 된다. 역에서 나와 도보로 조금 걸으면 공원의 입구가 등장한다. 훙커우구 자체가 예전에 일본인이 많이 살던 조계지 영역이었기 때문에 공원 입구까지 걷는 동안 보이는 건물들이 꽤 이국적인 편이다. 또 공원 옆에 조그맣게 붙어있는 놀이공원(游乐场)도 있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의 꺄르르거리는 웃음소리도 들을 수 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공원까지 가는 길과 공원 입구에서 보이는 풍경



루쉰공원(鲁迅公园), 훙커우 사람들의 심장


지금의 루쉰공원은 여러모로 훙커우 사람들의 놀이터이자 안식처이고, 그들의 심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사실 이렇게 되기까지 이 공원은 수많은 풍파를 겪어야 했다. 그 역사를 설명하려면 이 공원의 몇 가지 특징에 대해 언급할 수밖에 없겠다.


루쉰공원에는 다른 공원과 다른 특징이 세 가지 있는데, 우선 공원 전체가 영국식 정원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 배경은 바로 이 공원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과 관련이 있다. 루쉰공원이 처음 조성되게 된 시기는 1905년으로, 공공조계지의 관료에 의해 만들어진 사격장 옆에 조성된 작은 공원에 불과했다. 그 이름은 훙커우 공원도 루쉰 공원도 아닌 '신 사격장 공원'. 참으로 성의 없이 붙인 이름이다. 그리고 혹시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지만 1928년 중국인에게 개방되기 전까지 이 공원에 출입이 가능한 사람은 외국인뿐이었다. (중국인에게 개방된 이후에도 일반적인 중국인은 일본인이 무서워서 못 왔다고 한다) 조계지에 조성된 공원이고 사격을 즐기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든 곳이니 유럽 사람들의 수요에 맞췄겠고, 그래서 내부 모습이 영국식 정원 형태를 보인다.


두 번째 특징은 이곳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조성된 체육 테마 공원이라는 점인데, 이 역시 당초 이 공원이 사격장과 붙어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지금은 공원과 훙커우 축구장이 분리되어 있지만, 막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이 두 공간이 붙어있었는데, 그래서 지금보다 공원의 규모가 훨씬 컸다고 한다. 워낙 땅이 넓고 원래도 운동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원이라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는 경찰이나 군사 훈련, 열병식 등의 장소로도 종종 이용되곤 했다고. 1937년 팔일삼 사변 이후 일본은 심지어 이 공원의 일부를 '일본상해신사(日本上海神社)'로 만들어 전사한 일본군을 추도하는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어쨌든 이 모든 정황들이 공원이 그런 모든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컸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세 번째 특징은 이 공원이 상해에서 몇 안 되는 사람 이름을 딴 공원이라는 점이다. 상해의 대부분의 공원들은 황푸공원(黄浦公园), 쉬쟈후이공원(徐家汇公园), 런민공원(人民公园), 푸씽공원(复兴公园), 징안공원(静安公园) 등 주변 지명을 따서 그 이름을 붙였는데, 루쉰공원은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루쉰의 이름을 따 명명하였다. 물론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본래 이름은 훙커우공원(虹口公园)이었는데, 여러 해 동안의 검토 끝에 1988년 그 이름이 루쉰공원으로 바뀌었다.


루쉰은 1927년 10월 광저우에서 상하이로 올라온 후 상해에서 9년 정도 살다가 세상을 떠나는데, 살았던 곳이 現 훙커우구 산양루(山阳路)에 있었고, 이곳과 훙커우 공원이 또 가깝다 보니 훙커우 공원에서 루쉰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루쉰이 쓴 작품들이 중국인들의 머릿속에 남긴 인상은 대단해서,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많은 이들이 훙커우공원을 루쉰공원으로 개명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하는데, 결국은 세상을 떠난 뒤 20년 만에 본래 공동묘지에 있던 묘역을 이곳으로 옮기고 기념관을 세우면서 공원 이름도 함께 변경하게 된다.


열강들을 위해 만든 체육 공간이었지만 도리어 그 열강에 반기를 든 사건도 일어났고, 중국인을 깨운 대문호가 휴식을 취할 때 자주 들렀던 곳. 지금은 훙커우에 사는 시민들의 쉼터이자 노년층의 운동 장소, 중년층의 광장무(广场舞) 장소로서 활약하고 있다. 루쉰기념관이 있어서인지 이 공원에는 세계문호광장(世界文豪广场)이라는 이름의 장소도 조성되어 있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호들의 동상을 세워두었다. 한국에서 좋아하는 문호들과는 좀 다른 라인업이다. 이것도 사회주의 국가라서 그런 걸까?




중국인들은 루쉰을 참 사랑하는구나


공원을 전체적으로 둘러보기 전에, 전날 가려고 했지만 폐관 시간이 지나 가질 못했던 루쉰 기념관을 먼저 가보기로 했다. 루쉰 기념관은 루쉰이 생전에 머물렀던 도시들에 이곳저곳 조성되어 있지만, 상해에 있는 기념관이 1951년 개관으로 가장 먼저 조성되었다. 아무래도 그의 생의 마지막을 함께한 도시라 그런 것 같다. 공원 입구를 통해 들어가 조금만 더 안으로 들어가면 루쉰기념관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루쉰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이곳의 벽에 쓰여있는 루쉰기념관(鲁迅纪念馆)이라는 글자는 중국 초대 총리 저우언라이(周恩来, 주은래)가 친필로 쓴 글씨다. 루쉰기념관은 무료로 민간에 개방되어 있으며, 음료 등은 입구에 맡겨놓고 들어가야 한다.



루쉰 기념관에는 루쉰이 상해에 머물렀던 만 10년간의 생활들을 총망라하는 유물들과 이야기가 담겨있다. 많은 이들과 함께 사회 현안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 지식인으로서의 루쉰 뿐 아니라 그의 개인적인 생활이나 가족과의 관계, 그가 죽고 난 뒤 사람들이 얼마나 슬퍼했는지 등도 함께 보여준다. 특히 루쉰의 각종 사진들로 만들어낸 포토월은 중국인들이 루쉰이라는 지식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기념관에 있던 각종 사진들과 자료들, 영상들을 보고 나오는데 벽면에 적힌 시가 눈에 들어왔다. 중국 현대시인 장커쟈(臧克家)가 루쉰을 위해 쓴 시, <어떤 사람(有的人)>이었다. 간결하고 어휘도 쉬운 시인데, 여러모로 느끼는 바가 있어 여기에도 적어본다.



<어떤 사람(有的人)> ─ 장커쟈(臧克家, 1949, 북경에서 씀)


어떤 이는 살아있지만, 그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이는 죽었지만, 아직 살아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有的人活着, 他已经死了;

有的人死了, 他还活着。


어떤 이는, 인민의 머리 위에 올라타 이렇게 말한다. "하하, 내가 얼마나 위대한가!"

어떤 이는, 몸을 굽혀 인민을 위해 기꺼이 개처럼 일한다.

有的人, 骑在人民头上:“呵,我多伟大!”

有的人, 俯下身子给人民当牛马。


어떤 이는, 이름을 돌에 새겨서라도 "썩지 않길" 바란다.

어떤 이는, 들풀이 되어 불에 태워진들 괜찮다고 여긴다.

有的人, 把名字刻入石头想“不朽”;

有的人, 情愿作野草,等着地下的火烧。


어떤 이는, 다른 이를 못살게 하기 위해 살지만,

어떤 이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더 잘 살게 하기 위해 산다.

有的人, 他活着别人就不能活;

有的人, 他活着为了多数人更好地活。


인민의 머리 위에 올라탄 사람은, 인민이 그를 끌어내려 무너뜨릴 테지만,

인민을 위해 개처럼 일한 사람은, 인민이 그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骑在人民头上的,人民把他摔垮;

给人民作牛马的,人民永远记住他!


돌에 이름을 새긴 사람은, 이름이 그 시체보다 훨씬 빨리 문드러지겠지만,

봄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푸른 들풀이 자라날 것이다.

把名字刻入石头的,名字比尸首烂得更早;

只要春风吹到的地方,到处是青青的野草。


다른 이를 못살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의 말로(末路)는 말 안 해도 알 테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잘 살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군중이 그를 높이높이 들어 올릴 것이다.

他活着别人就不能活的人,他的下场可以看到;

他活着为了多数人更好地活着的人,群众把他抬举得很高,很高。



기념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루쉰의 묘가 있었다. 루쉰 선생의 묘(鲁迅先生之墓)라는 글자는 마오쩌둥의 글씨라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된 오늘날에도, 기념관과 루쉰의 묘역에는 아직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국과 중국인을 사랑했기에 오히려 거침없이 그들을 일깨우는 문장을 썼던 사람. 그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루쉰은 오늘날 중국인에게 그런 사람이다.



푸르른 공원과 활기찬 사람들


목표로 했던 루쉰기념관과 묘를 다 본 뒤, 조금은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못다 본 루쉰공원의 모습을 둘러보기로 했다. 5월 초의 상해는 너무나도 푸르렀고, 공원 이곳저곳에 연휴를 즐기러 나온 동네 주민들이 많이 보였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인 매원은 5시면 문을 닫는 터라 둘러보지 못해 아쉽다.



이전 매거진 글에서 인민공원(人民公园)에 대해 쓸 때 공원에 각종 서클(각, 角)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하며 루쉰공원의 광장무 서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 외에도 루쉰공원에는 다양한 서클이 있다. 이날 공원을 산책하다 만난 사람들은 악기 서클이었는데, 중국의 전통 악기 얼후를 연주하는 모임이었다. 건물 한구석에 모여 취미가 맞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함께 악기 연주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취미란 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공원에 모이는 모든 사람들이 악기 연주 같은 취미활동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모여서 카드놀이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모여서 이런저런 신세한탄을 하며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대화를 나누는 모임은 하도 커서 무슨 집회가 아닌가 하고 오해했는데, 나중에 중국인 친구 말로는 그냥 서로서로 모여 각자의 재테크 노하우나 병원 정보나 이런 것들을 주고받는 것뿐이라고 하더라.




추억 보관소, 루쉰공원


지금에야 밝히지만 상해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 내가 제일 그리워하는 공간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으면 나는 아마 주저 없이 훙커우와 루쉰공원을 꼽을 것이다. 이 글은 꽤나 담담하게 썼지만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마음은 지금 당장이라도 루쉰공원으로 달려가 어느 벤치든 앉아 멍 때리고 싶은 마음이고. 그도 그럴 것이, 노동절 둘째날 정말 단순히 루쉰기념관을 못 보고 온 게 아쉬워서 갔던 공원과 그 주변 동네가, 이후 몇 달간의 상해 생활 속에서 내게 꽤나 아름다운 추억을 몇 번이나 선물해주게 되었기 때문이다.


발단은 청명절 연휴에 참가했던 교류회. 그 자리에서 어렵사리 위챗 친구가 되어 연락을 주고받던 친구가 있었다. 광고업계에서 일하는 친구였는데, 동갑인 데다 한국이나 한국 드라마에도 관심이 많고, 그림도 잘 그렸다. 잘 알겠지만 그런 자리에서 만난 관계가 그저 메시지 몇 번 주고받는다고 지속되기는 어려운지라 그 친구와도 그 정도로 그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날 루쉰공원을 다녀와서 위챗 모멘트에 루쉰공원에 대한 내용을 올리자 그 친구가 루쉰공원이 본인 동네에 있어 거의 매주 간다며 놀러 오면 성심성의껏 소개해준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정말로, 그 친구와 며칠 뒤 공원에서 만났고, 친구는 공원 안의 숨겨진 장소들은 물론이고 이런저런 볼거리들, 먹거리들, 그리고 아는 친구들까지 내게 소개해주었다. 루쉰공원 자체도 볼거리가 많지만, 미술관에 조그맣게 붙어있는 주치잔예술관(朱屺瞻艺术馆)과 근처의 톈아이루(甜爱路), 뚸룬루(多伦路), 지하철역 근처의 카이더 롱즈멍(凯德龙之梦)까지 중국인들에겐 인기가 좋지만 정작 관광객에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장소들이 많았는데, 그 뒤로 몇 차례 이 친구와 만나면서 이런 곳들도 모두 가볼 수 있었다. 상해에서 나고 자란 상해 토박이라 상해 방언이나 상해인들이 즐기는 것들을 소개받았음은 물론이다.


5월 2일에 처음 이곳에 왔던 이날만 하더라도 내가 이후 이 공원을 이렇게 자주 오고 또 언젠가 이곳을 사무치게 그리워하게 되리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주말마다 공원에 나와 광장무를 추던 아주머니 아저씨들, 놀이공원을 바라보며 멍 때리고 앉아 친구와 함께 레몬티를 마시던 그 오후 햇살, 친구의 권유로 무서움을 참고 공원 놀이동산의 UFO를 탔던 그날, 톈아이루 입구에서 사 먹었던 요우뚠즈(油墩子), 초두부를 경험하게 해 준다며 친구가 사준 라오창샤 초두부(老长沙臭豆腐)의 뜨거움.


언제쯤 다시 상해에 가서 루쉰공원 앞 CoCo에서 밀크티를 사들고 공원 산책을 할 수 있을까? 다시 가게 되었을 때도 훙커우는, 루쉰공원은, 여전히 인간미 넘치는 사랑스러운 모습일까? 그날이 올 때까진, 루쉰공원은, 적어도 내겐, 추억보관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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