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볕이드는창가 May 23. 2021

상해의 진짜 서커스, ERA를 직관하다

어느 충실했던 일요일

2019년 5월 19일, 지난번에 이어 두 번째로 자원봉사활동을 하게 되었다. 지난번에는 여성 봉사자 한 명과 함께 했는데, 이번에는 푸단대(复旦大学)를 다니고 있다는 한 남학생과 함께. 아무래도 지난번에 왔던 친구는 일정상 함께할 수 없었나 보다. 오전에 보호자분이 만나자고 한 공원에서 만나 아이와 함께 공원 산책을 하는데, 신기하게도(!) 지난번 활동 때 내가 이 아이에게 해준 나의 신상정보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실 그간 한국에서 자원봉사활동을 적지 않게 해왔고, 봉사자에게는 클라이언트가 1:1인 관계일 수 있겠지만 클라이언트에게는 그저 일주일에 수없이 만나는 수많은 봉사자 중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도, 느끼기도 했기에 이 친구가 나를 이만큼 기억해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아이가 내가 어디 살고, 이름이 뭐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기억하고 이야기해줬을 때 그만큼 놀랐던 것이 아닐까? 새삼 이 아이에게 이 관계가 기억할만한 것이 되었고, 지속적으로 활동을 하지 않으면 미칠 부작용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된 순간이었다.



봉사활동이 끝나고 친구와 만났다. 장소는 역시 그 친구의 나와바리, 루쉰공원. 루쉰공원은 갈 때마다 항상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이번엔 지난번에 구경할 땐 보지 못했던 족구장을 발견했다. 일요일 점심 나절이라 훙커우구의 많은 장년층들이 모여 족구를 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 건강한 분위기.



그리고 그때! 항상 공원을 다닐 때마다 그냥 지나치질 못하는 물로 붓글씨를 쓰는 아저씨와 마주하게 되었다. 원래도 붓글씨에 관심이 많아 보는 것을 즐기는데, 심지어 그가 쓰고 있던 구절이 어디서 많이 본 구절이다. 바로 이백의 <장진주(将进酒)>. 바른 해서(楷书)로 시구를 하나하나 써 내려가고, 쓴 지 오래된 글자들이 시간이 지나자 돌에서 사라지는 그 모습이 신비로워 보인다. 친구는 아저씨가 써 내려가는 글씨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본다. 아무래도 그 친구는 중국인이다 보니 이런 풍경이 익숙하겠지.



나는 신이 나서 그 친구에게 요즘 붓글씨 수업에서 무엇을 배웠고 어땠는지를 이야기한다. 친구는 이미 펑요췐에서 봤는지 나의 도전을 응원해주고 기특해했다. 공원을 다니다 전통악기 얼후(二胡)와 후루쓰(葫芦丝)를 연주하는 아저씨를 만났다. 본업은 따로 있고 주말마다 취미로 공원에 와서 연주를 하신다는데, 악기를 정말 좋아하시는 분 같다. 친구가 공원 구석에 있는 주치잔예술관(朱屺瞻艺术馆)에 가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라서 그림도 볼 겸, 에어컨도 쐴 겸 종종 들른다고 한다. 가보니 이번 전시는 수묵화 전시다. 차분한 분위기에서 그림을 보고 있으니 마음도 함께 차분해진다.


그림을 다 보고 난 뒤 미술관을 나와 공원 뒷문으로 나가 톈아이루(甜爱路)를 구경한다. 친구가 내가 꼭 먹어봤으면 하는 상하이 간식이 있다고 한다. 그 이름은 요우뚠즈(油墩子). 강소성, 절강성, 상하이 일대에서 볼 수 있는 길거리 간식인데, 채 썬 무와 부침가루를 반죽해서 튀겨낸 듯한 음식이다. 무 떡? 무 도넛? 혹은 야채튀김인데 무만 있는 야채 튀김 같은 느낌. 상하이 사람들에게는 총요우빙처럼 소울푸드 같은 음식이라는데, 사실 내 입맛에는 너무 뜨겁고 느끼했다.... 그래도 친구가 사준 간식이니 맛있게 먹는 걸로.


요우뚠즈. 찍어둔 사진이 없어 바이두에서 찾았다. 비슷하게 생겼다.



친구와 즐거운 상하이 산책을 마치고, 저녁 일정을 소화하러 상하이 마씨청(上海马戏城) 역으로 향했다. 오늘 저녁엔 좀 특별한 이벤트가 있다. 지난번 아쉽게도 보지 못했던 진짜 마씨를 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대극장 리모델링이 드디어 완료되면서 ERA를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ERA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지난 글 참조) 리모델링이 끝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지난번 함께 환러마씨를 보러 갔다 왔던 오빠들에게 연락해 함께 보게 되었다. 공연 내용이 약간 겹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상해를 대표하는 서커스라고 하니 진짜를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연을 보기 전, 출출한 속을 달래기 위해 지난번 갔던 그 광동식 요릿집에서 배를 채우기로 했다. 지난번 방문 때 먹었던 메뉴들과는 리우샤바오(流沙包) 하나 겹치는 것 같다. 나머지는 모두 처음 시켜보는 메뉴들. 탕판(汤饭)과 새우 요리, 튀긴 유부 롤, 그리고 렁훈뚠(冷混沌)까지. 이제 좀 새로운 메뉴를 시킬 용기가 생겼나 보다.



ERA가 진행되는 극장인 대극장은 아래와 같이 입구가 정말 서커스장처럼 멋지게 꾸며져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건 서양에서 온 단체여행객들이 무척 많이 보였는데, 아무래도 그들의 패키지여행 일정 중 이 ERA 관람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언어로 소통할 필요가 없고 직관적인 것이 해외여행을 위한 프로그램에 딱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니 공연장의 크기나 인테리어 역시 지난번 환러마씨와는 차원이 다르다. 역시 상해를 대표하는 서커스 공연답다. 표는 큰맘 먹고 가장 좋은 자리 1열로 샀다. 환러마씨는 표값이 160위안이었는데, 이 공연의 표값은 무려 680위안이다. 한화로 10만 원이 넘는다. 과연 Flex 한 보람이 있을까?!


공연 내용을 별도로 사진 찍진 않았지만 확실히 콘텐츠가 환러마씨 때와는 사뭇 달라 볼만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이라 좀 위험한 공연들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효과는 확실했다. 동물이 등장하는 묘기는 없었던 것 같다. 공연자 한 명이 한 번 실수를 했는데 모든 관객이 한 마음으로 그를 응원했고 결국은 성공하는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물론 낸 돈이 있으니 실수가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만약 상해에 여행을 온다면, 이 공연의 관람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다만 자리는 한 두 번째 정도 좋은 자리로?ㅎㅎ 아무래도 가격이 세고 공연장이 커서 너무 뒷자리만 아니면 몰입하기에 충분하니까 말이다. 한편 아이와 함께 가성비 공연을 보고 싶다면, 또 동물 공연에 큰 거부감이 없다면, 내가 지난번 관람했던 환러마씨도 추천한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큰 만족도를 느낄 수 있을 듯하다.




[중문 일기 in 위챗 모멘트(朋友圈)]

(譯) 굉장했던 하루! 오전에는 자원봉사활동을 했는데, 아이가 지난번 나와 이야기 나누었던 내용을 기억하고 있어서 정말 기뻤다. 오후에는 친구와 함께 루쉰공원을 돌아다녔는데, <장진주>와 사군자부터 얼후, 후루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너무 즐거웠다. 저녁에는 <ERA-시공지여>를 보러 갔다. 공연 정말 좋았고, 눈이 호강하는 시간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 붓을 사기까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