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위한 변명
톈진 지역연구를 마치고 돌아오니 벌써 5월 마지막주다. 상하이에 온 것이 3월 중순이니 이제 상하이에 산 지도 두 달이 지나가는 중이다. 5월의 마지막주를 맞아 영화를 한 편 예매했다. 제목은 <오월천인생무한공사(五月天人生无限公司)>. 상하이의 극장에서 내 돈 주고 보는 두 번째 영화이면서 한국/중국 합쳐서 처음으로 보는 3D 영화. 상하이에서 처음으로 본 영화는 중국 영화가 아니었으니 중국 영화 중에서는 처음으로 극장에서 보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가 May day라는 밴드에 대한 내용이니 기왕이면 5월이 끝나가기 전에 봐야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극장 상영이 끝나기 전에 볼 수 있었다.
3D 안경은 물론 럭셔리한 의자까지 있는 극장에서, 관람객도 무척 적은 날 보게 된 영화는 참 좋았다. 콘서트의 실황을 담은 3D 영화라 진짜 공연장에 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아무래도 관객이 적다 보니 오월천이 나를 위헤서 노래를 불러준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하지만 중반이 막 지났을 무렵, 생각지도 못한 관객 크리를 겪게 되었다. 이날 이 영화의 관객은 나와 한 여자, 이렇게 딱 두 명뿐이었는데, 이분이 하필이면 내 가까이에 앉았던 데다가 중간중간 휴대전화로 영화를 녹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녹화까지는 내게 피해가 오질 않으니 괜찮았지만, 녹화가 잘 되었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그녀가 영화 상영 중 동영상을 재생했을 때, 나는 조용히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 음향과 그 소리를 겨루기라도 하듯 동영상의 소리가 크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비슷한 종류의 벙찜(?) 현상을 같은 주 다른 요일에 또 겪게 되었다. 이번에는 상하이의 특색이 있는 연극 후쥐(沪剧)를 보러 갔을 때다. 일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 집 근처에 있는 유서 깊은 공연장 메이치 대극원(美琪大剧院)에서 공연을 한 번 실제로 보고 싶어서 따중뎬핑을 계속 찾아보다 발견한 공연이었다. 가보고 싶었던 공연장에서 하는 것도 좋은데 상하이 특색이 있는 공연인 후쥐(沪剧, 沪는 상하이를 뜻하는 약자다)라니! 상하이의 공연예술은 어떤 특색을 가지고 있는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이날 보게 된 공연은 <돈황여아(敦煌女儿)>라는 제목이었는데, 한 여성의 일대기를 다룬 이야기다. 일생을 둔황의 막고굴(莫高窟) 연구 및 개발에 힘써온 여성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명색이 상하이 특색 공연양식인 후쥐(沪剧)다 보니 공연 내내 대사가 모두 상하이 방언으로 되어 있고, 그래서 공연장에는 좌우에 대형 스크린이 있어 대사를 중국 표준어인 보통화 및 영어로 띄워준다. 대사가 상하이 방언일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나로서는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보통화 자막이 실시간으로 나와주어 상하이 방언을 배우는 효과도 있었다.
공연 자체의 내용은 위인전 같은 느낌이라 무척 재미있고 하지는 않았지만, 중간중간 홀로그램이나 입체 영상 같은 것을 사용하여 무대를 보는 맛을 높여준 점이 좋았다. 다만 나의 벙찜은 공연 도중 공연 내용을 열심히 촬영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는 점에서 왔다. 공연 시작 전 스태프들이 공연장 내 취식이 불가능하다는 것만 주의를 시키고 특별히 촬영에 대한 제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관객들은 홀로그램 등 특이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열심히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처음엔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듯 너무도 당당하게 극장이나 공연장에서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찍는 행위가 참 적응이 안 됐다. 물론 한국에도 그런 사람은 있겠지만, 그렇게 대놓고 하는 이는 잘 없다 보니 더 놀랐던 것 같다. 저작권 문제도 있고, 촬영을 하는 행위가 주변 사람들의 관람에 방해가 되기도 하는데 대체 왜 그러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이라는 사회의 맥락에서 보면 그런 모습들이 어느 정도는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우선 극장의 케이스를 보면, 중국의 극장은 생각보다 관객이 많지 않다. 어떻게 보면 중국에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행위는 꽤 고급 취미에 속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쓸데없는 데 돈 쓰는 취미' 같은 느낌이다. 왜냐고? 영화 한 편 보는 데 한국 돈으로 만원 가량 드는데, 동영상 플랫폼에서 영화를 보면 값싸게 연간 회원 등록해서 볼 수도 있고, 심지어 시간이 지나면 무료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개팅이나 데이트 차원이 아니고서야 젊은 사람 중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적어도 상하이에선 그랬다. 이렇게 상영관이 여유로우니 들어오는 관객들이 촬영의 충동을 갖는 것도 이해가 된다.
또,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중국인들은 영화나 공연 티켓을 사는 순간 자신이 그 영화나 공연에 대한 어떤 권리를 샀다고 인식한다. 내가 없는 형편에 거금 얼마를 들여 이 티켓을 샀으니, 공연이 진행되는 몇 시간만큼의 시간은 내가 무엇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다. 온전히 내가 소유한 이 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행동을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권리가 침해되는 것은 내 알 바 아니다. 꼬우면 당신도 촬영하든가!
마지막으로 (너무 갔나 싶긴 하지만) 중국 '공연예술'의 발달 과정을 생각해보면 사실 조용하게 앉아서 관람만 하는 관객은 중국에 별로 없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공연예술은 공연자와 관객의 상호작용이 늘 중요했다. 초기 공연예술의 형태는 이야기를 잘하는 이야기꾼이 맛깔나게 이야기보따리를 풀면 듣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근처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 방식이었고, 주로 구전으로 전해졌기에 관객의 반응이 좋았던 부분은 좀 더 분량을 늘리고, 관객 반응이 별로였던 부분은 줄이는 등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이야기의 변형이 수시로 이루어졌다. 이후에 나타난 각종 전통극이나 만담(相声)을 보아도 관객들이 추임새를 넣거나 중간중간 참여하는 모습이 수시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공연을 보더라도 가만히 앉아서 보는 일은 별로 없고, 영화를 보더라도 생판 모르는 다른 관객들이 다 듣도록 자신의 감상을 말하는 관객이 있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두 개의 서로 다른 공연을 보고, 약간의 문화충격을 받자 내 나름대로 그들을 위해 이런저런 변명을 만들어주게 된다. 이런 행동이 윤리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쩌면 촬영을 특별히 제재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촬영을 제재하는 공연도 이후에 보긴 했는데, 그런 경우에도 물론 촬영을 하는 자는 존재한다. 다만 제재를 당하면 재빨리 그만둔다. 아니, 그만둘 수밖에 없다. 그만두지 않으면 스태프가 초록색 레이저로 계속 그의 휴대전화 화면을 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됐든 사회적으로 어떤 행동이 나타나게 된 데는 나름대로의 맥락과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비단 중국뿐 아니라 그 어떤 나라에도 그런 맥락이란 것은 있게 마련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