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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이드는창가 Oct 17. 2020

가벼운 마음으로 짐을 싸 보자

중국으로 떠날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

외국어 회화 시험을 보면 이런 문제가 종종 나온다. '당신은 짐을 가볍게 하고 여행을 떠나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싸 갖고 가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전쟁과 연관되는 어휘가 유난히 많은 중국어에서는 '짐을 가볍게 하고 떠나는 것'을 轻装上阵, 직역하면 '장비를 가볍게 하고 전장에 나가는 것'이라고 하고, 반대로 많은 것을 싸 갖고 떠나는 것을 有备而行(준비하고 떠나기), 혹은 带齐装备(도구들 모두 챙기기)라고 한다. 상해에서 중국어 수업을 들으며 轻装上阵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고, 이건 나를 형용할 수 있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어 재빨리 메모했었다. 나는 여행이든 출장이든 번거롭게 이것저것 챙겨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더구나 떠나는 곳이 마음만 먹으면 대부분의 물건을 구할 수 있는 곳이라면 더 그렇다. 이번에 떠나게 된 중국 상해라는 곳도 내게는 그런 곳에 해당했기 때문에 나의 짐은 다른 사람들이 으레 싸는 양보다 적은 편이었다.


이마트에서 사서 출장 때 가지고 다니곤 했던 캐리어 大자와 小자 각 한 개, 이것저것 넣을 수 있게 수납공간이 많아 선택되었던 백팩 하나, 그리고 1인용 전기장판과 목베개, 작은 크로스백 하나가 1년의 상해 생활에 대비해 준비한 짐의 전부였다. 비록 9월에 잠시 있을 중간 귀국 시기에 겨울옷을 챙겨갈 기회는 있었지만, 3-4월이 한국의 겨울만큼 춥고(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짧은 봄을 채 즐겨볼 겨를도 없이 5월 말부터 바로 더위가 시작되는 상해의 특성상 첫 출국 때 사실상 봄(≒가을), 여름, 겨울옷을 다 챙겨야 했으니 그 모든 물건들을 저 정도 부피에 모두 쑤셔 넣으려 했다면 당연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많은 동료 지역전문가들이 패션을 포기할 수 없거나 꼭 필요한 물건이 많아 이민가방을 장만했는데, 나는 태생적으로 패션과는 거리가 먼데다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없으면 거기서 사고 쓸 만큼 쓴 다음 버리고 오자'는 마음으로 최대한 적게 싸 보기로 했다. 실제로 여름에 입었던 반팔티 중에는 중국에서 산 옷들이 많고, 여름 동안 짧고 굵게 입은 후 중국에 처분하고 오기도 했으니, 계획대로 잘 실행한 편인 것 같다. 이번 글에서는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짐 속에서 꼭 챙겨야 했던 몇 가지 물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요즘 유행하는 MBTI 분류법으로 나를 말하면 나는 아주 전형적인 ENFP 유형이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조금은 계획을 짜는 습관들이 길러졌고, 따라서 짐을 싸기 전에 구글 스프레드시트를 이용해서 카테고리별로 어떤 짐을 싸야 할지, 어디에 넣을지 등을 적어보았다. 목록으로 정리하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훨씬 눈에 들어왔고, 체크리스트로 관리하여 빠뜨리는 물건 없이 잘 챙긴 것 같다. 유형별로 이야기를 해보면 아래와 같다.


1. 전자기기

지난 '카메라 상견례 여행'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지역전문가 파견 전 어떤 장비를 가지고 떠나느냐에 대해 남편과 나는 열띤 토론을 벌였더랬다. 물론 우리 둘의 대화가 대부분 그렇듯 남편의 논리적인 설득에 의해 디지털카메라만 가지고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지만 말이다. 그 외, 지역전문가로서 해야 할 각종 보고들과 정산을 하기 위한 노트북 및 부대 도구(마우스, 키보드)는 필수적으로 챙겨야 할 물건이었다. 그에 더해 지역전문가 활동을 하며 남겨두어야 할 기억들을 잘 보관하기 위한 SSD도 챙겨 넣었다. 태블릿은 사실 그 당시 중국 드라마 보기에 빠져있던 나를 위해 남편이 추천한 물건이었는데, 막상 이동할 때 꺼내기도 불편하고 휴대전화로 보는 것이 훨씬 편해서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돼지코는 사실 조금 애매한데, 예전 중국 여행책들엔 중국이 110V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돼지코를 꼭 챙겨가라는 말이 많지만 막상 대부분의 곳에 220V 선을 연결할 수 있는 곳들이 설치되어 있어 돼지코를 사용할 일이 많이 없긴 하다. 다만 지방 중소도시나 시골로 가게 될 경우, 220V 구멍이 있더라도 과열이 일어나거나 하는 경우가 더러 있고 구멍이 없는 경우도 아주 간혹 있기 때문에 한 개 정도는 백팩에 상비해두고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추천하고 싶은 것은 멀티 충전기(충전 Hub)인데,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가게 될 때 각종 선들을 한꺼번에 꽂아둔 Hub 하나만 챙기면 되어서 아주 편리했다. 


https://brunch.co.kr/@jineye2199/13


2. 문구용품

인사팀장님 노트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올 것이다. 파견 전 회사 인사팀에서 파견 예정자들을 불러놓고 간담회를 할 때, 인사팀장님께서 직접 사내 문구점에서 구매한 노트를 한 권씩 나눠주셨다. 인사팀장님 당신께서도 지역전문가 출신이셨는데, 매일매일 있었던 일들이나 인상 깊었던 일들을 다만 한 문장씩이라도 일기로 작성해두니 허송세월 보내는 것 같지 않고 아주 좋았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사실 그때 노트를 받지 않았다면 내 의지로 일기를 쓰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막상 노트가 주어지니 몇 글자라도 쓰려고 했고, 덕분에 브런치에 이 글을 올릴 때 참고할 수 있을만한 기록이 되었다. 지금 읽으니 조금 흑역사지만 말이다. 


또 한 가지는 딱풀인데, 이건 이전에 파견을 다녀오셨던 분이 조언해주셔서 챙겨가게 되었다. 지역전문가 생활에서 사용하는 경비들을 정리하려면 영수증 부착이 필요한데, 중국에서 파는 딱풀은 접착력이 그다지 좋지 않아 잘 붙지 않는다고 하시며 딱풀을 꼭 챙겨가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중국에서 파는 것은 좀 그런 편이었다. 의외의 꿀팁이었다.


3. 생활용품

아무래도 1년을 낯선 곳에서 살아야 하니 가장 중요한 영역이겠지만, 이불이나 가구를 가져갈 수는 없으니 사실 무엇을 챙겨야 할지 가장 난감한 영역이 바로 생활용품이다. 웬만한 물건들은 현지에서 살 수 있기 때문에 꼭 한국에서 가져가야 할 것만 챙기자는 마음으로 엄선한 결과가 바로 위 목록이다. 누군가 중국으로 나가야 한다면 그중에서도 특히 샤워기 필터, 생리대(여성이라면), 수저, 전기장판은 꼭 챙겨가시라고 조언하고 싶다. 


샤워기 필터는 요즘 한국에도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 같은데, 중국은 사실 쓰는 집이 별로 없다. 그럼 물이 깨끗하냐 또 그건 아니다. 석회질도 많고, 불순물도 비교적 많은 편이라 민감한 피부를 가진 분들은 고생을 많이들 하고, 우스갯소리로 세수할 때는 생수로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환경이 바뀔 때 물로 고생들을 많이 하는 편이니 가능하면 넉넉하게 챙겨가는 편이 좋겠다. 연수기를 챙겨가는 분도 더러 있었다.


생리대의 경우에는 여성에게만 해당하는데, 아마 중국에서 생리대를 사서 써본 분은 공감할 듯하다. 한국에서 파는 생리대들보다 종류도 많지 않고, 무엇보다 얇다! 양이 많은 날 쓰는 생리대도 두께가 너무너무 얇다. 원가절감을 심하게 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혹시 생리통이 심하거나 양이 많은 편이라 생리대를 많이 타는 분이라면 한국에서 좀 넉넉하게 준비해 가는 편이 좋겠다. 나는 다행히 9월에 중간 귀국이 있었기 때문에 반년 정도 사용 가능한 양으로 짐을 싸갔다. 물론 한인타운의 마트에서도 살 수 있긴 하겠지만 값은 비쌀 것이다. 


같은 아시아권에서 수저는 왜 챙기냐 싶겠지만, 중국 식당에서 음식을 드셔 보신 분은 알 것이다. 한국식 숟가락 젓가락과는 모양이나 재질이 다르다. 숟가락은 汤匙라고 하여 탕을 떠서 먹기는 좋지만, 밥을 먹기 편한 모양은 아니고, 젓가락도 모양이 달라 사용하기 조금 불편하다. 마트에서 '한국식 수저'라는 것을 팔지는 않으니 하나 챙겨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기장판이다. 나는 중국 상해로 파견되었는데, 상해가 서울보다 위도가 낮아 훨씬 따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큰 착각이다. 바다에 무척 가까이 위치해있는 상해는 습한 편이고, 온도가 물론 서울보다는 높은 편이지만 습도가 높아 체감온도가 훨씬 낮다. 흔히 말하는 스며드는 추위, 지하실 추위다. 한인타운 근처를 제외하면 난방이 잘 갖춰져 있지 않은 집이 대부분이라 집에서 라디에이터, 중국어로는 暖气를 틀어야 하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국소 난방이라 라디에이터에 꼭 붙어있지 않으면 집은 너무너무너무 춥다. (호텔도 춥다!!!) 그렇다고 잘 때 라디에이터를 틀고 자자니 너무 건조해져서 감기에 걸리기 쉽다. 1인용 전기장판은 필수품이다. 웃긴 건 전기장판이 있었는데도 상해에 가자마자 나는 감기에 걸렸다. 절대절대절대 상해의 겨울-봄-가을 (아니, 여름 빼고 다잖아?)을 무시하지 않았으면 한다. 온도만 보고 짐을 싸면 큰 코 다친다.


4. 세면용품

이 부분이야 뭐, 각자 체질이나 필요에 따라 알아서 다들 잘 챙기실 것이다.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건, 상해에는 한국 화장품 브랜드(이니스프리, 에뛰드 등)가 이미 많이 들어와 있고, 왓슨스 같은 드럭스토어도 많이 있다. 생각보다 다 떨어져도 살 수 있는 곳이 많이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5. 의약용품

'호사다마와 새옹지마'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지역전문가 파견 전 디스크 판정을 받고 실의에 빠졌던 적이 있다. 파견 전에 가장 걱정했던 점도 혹시 현지에서 급성 통증이 찾아와서 파견이 중지되지는 않을까 하는 부분이었는데, 최대한 바른 자세로 앉고, 아플 것 같으면 최대한 걸어 다니고 하는 등의 노력으로 다행히 현지에서 심각하게 아픈 적은 없었다. 초반에는 학교 수업을 들어야 했기에 2시간 이상씩 한 자리에 앉아있어야 할 경우가 많았는데, 이럴 때 좀 아프면 진통제/근육이완제(=허리약)를 먹곤 했는데, 하반기에는 약을 먹는 빈도가 많이 줄었다. 그 외, 생리통이 심한 편이고 위염 증상이 자주 나타나는 편이라 생리통약오타이산(일본 제산제)은 별도로 챙겼다. 감기약, 배탈약 같은 경우 웬만하면 챙겨가기를 바란다. 중국에서 약을 사려면 약국에 가서 증상을 설명하고 그에 맞는 약을 받아야 하는데, 로컬 약국에서 파는 약은 한국에서 파는 약보다 독한 경우가 많다. 효과가 정말 빠른 대신 약이 많이 독하다. 아마 중국인들이 아플 때 병원보다 약국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약이 독하지만 효과가 빨라서인 것 같다. 특히 감기약 같은 경우 중국약을 먹고 힘들어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아, 물론 낫기는 훨씬 빨리 낫는다.) 혹시 몸에 좀 맞지 않을 수도 있으니 약은 한국에서 챙겨가기를 권하고 싶다.


https://brunch.co.kr/@jineye2199/11


6. 개인용품

여기는 주로 학교 등록이나 집 구하기 등에 사용할 문서들이 대부분이다. 필요에 따라 알아서들 잘 챙기겠지만 노파심에 말하자면 여권사진이나 여권 복사본 등은 의외로 필요할 때가 많으니 여유 있게 준비해두기를 바란다. 상해가 아무리 외국인에 꽤 개방적인 도시라고 해도, 집 계약, 주숙 등기, 학교 등록 등 나의 신분을 증명하는 자료들이 필요할 때가 많다. 또 떠나는 나라와 관련된 여행책은 하나 정도 챙기기를 추천한다. 개정 일자가 최신일수록 좋다. 물론 인터넷이 많이 발달해서 정보를 찾기가 어렵지 않은 오늘날이지만, 그래도 정보를 총망라한 책 한 권 정도가 있으면 계획 얼개를 짤 때 유용하다. 대강의 계획은 책을 보고 짜 보고, 구체적인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얻는 것이 좋겠다. 



사실 짐을 가볍게 싼 데는 실용적인 이유 외에 심리적인 이유도 있었다. 많은 물건을 한꺼번에 싸서 떠나면 마치 한국을 영영 떠나 상해에 그만큼의 정을 주게 될 것 같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성격상 정을 쉽게 주는 편인데 이번 지역전문가 과정 자체는 1년이라는 시간제한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깊게 주면 안 될 것 같았고, 내가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듯이 또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항상 떠올리기 위해 최대한 가볍게 짐을 쌌던 것이다. 이후 집을 구할 때도 그런 마음으로 임했다. 물론 목표했던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올 수는 없었지만 더 많은 것을 챙겨 한국을 떠나려고 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미련이 남지 않았을까 싶어 그래도 그때의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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