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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이드는창가 Feb 20. 2021

상해 생활, 벌써 한 달

익숙함 속 낯섦, 낯섦 속 익숙함

다시, 상해에서의 일상


2박 3일간의 난징 지역연구를 마치고 상해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나름대로 이별 의식을 잘 치렀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상해로 돌아와 내 눈 앞에 산적한 학교 숙제와 보고서, 중간고사 일정을 맞이하니 마법이 풀린 동화 속 공주가 된 듯한 마음이 든다. (내가 공주라는 건 아니고, 그만큼 지역연구가 너무 좋았다는 뜻이다) 어학당 일정상 4월 중하순이 딱 중간고사 기간이고 듣는 수업마다 모두 과제와 시험이 있는 데다, 회사에 내야 하는 이런저런 과제물 일정도 겹쳐버려서 아무래도 며칠은 한 눈 팔지 말고 해야 할 일만 해야 다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참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 1년 전 이맘때엔 사무실에서 몰려오는 각종 업무로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었는데. 그때에 비하면 어학당을 다니며 중국어를 공부하고, 과제를 하고 시험을 보는 일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1년 전이었다면 지금의 이런 하루하루가 그 얼마나 바라 마지않는 일이었을까. 그런데 막상 상해에 와서 지내다 보니 정작 여기서 보내는 학생으로서의 삶에 익숙해져 과제와 시험이 성가시고 맞닥뜨리기 싫은 일이 되어버린 셈이다. 새삼 현업에서 그 많은 일들을 슈퍼맨처럼 처리했던 때를 다시 떠올린다. 갑자기 눈앞의 할 일들이 정말 별 게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 일상이다.


4월 중순은 어학당의 학사 일정으로 하면 중간고사 기간이었지만 나의 지역전문가 생활로 하면 상해에 온 지 만 한 달이 되는 시점이었다. 처음엔 그렇게 낯설고 외로웠던 상해 생활도 한 달이 된 이쯤에는 이미 꽤 익숙해졌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제 슬슬 익숙함 속에서 낯섦을 찾아 나서기 시작해야 할 시점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4월, 익숙해진 교정


그래도 약 한 달 정도 학교를 다녔다고, 심각한 길치이자 방향치인 나도 처음 교정을 밟았던 날보다는 좀 더 방향감각이 생겼다. 초반에는 강의동도 헷갈려 다른 교문으로는 등하교할 시도조차 하지 못했는데, 이젠 제법 익숙해져서 일부러 다른 교문을 이용해 보기도 한다. 4월의 교정은 푸르고, 따사롭다.


푸르고 따사롭던 4월의 교정


아침 수업을 들으러 강의동으로 가는 길에 재미있는 광고를 발견했다. 시 창작 콘테스트의 광고인데, 전 세계 2천여 곳의 대학에 있는 중국어를 사용하는 학생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콘테스트인 것 같다. 아무래도 인문대학 강의동이다 보니 이런 대회의 광고도 하는 모양이다. 문득 한국에서 종종 한문으로 시를 써서 공유해주는 과 후배가 생각이 났는데, 아쉽게도 그 친구는 참여를 못하겠지. 여하튼 이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전통적인 시 창작 문화를 계승시키려는 노력은 본받을만한 점인 것 같다.




당시(唐诗), 중간고사


속한 반이 고급반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학당의 중간고사는 각 과목 담당 선생님의 재량에 따라 필기시험, 구술시험, 보고서, PPT 발표 등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차라리 다 필기시험이었으면 시험 전에 벼락치기로 암기라도 할 텐데, 과목에 따라 워낙 진행 방식이 다양했기에 그 준비가 더 어려웠다. 하지만 그만큼 나름대로 도전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 다양한 시험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유익했고 흥미로웠던 시험은 당시 감상(唐诗赏析) 수업의 시험이었다.


이 수업은 평소 한 시간 반의 수업 시간 중 약 30분 정도를 학생에게 맡기는 수업이었다. 선생님께서 수업이 끝날 때쯤 다음 시간에 다룰 시 3~4수를 알려주시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해설과 감상을 발표할 시를 골라 말씀드리고, 그다음 수업 도입부에 선생님 및 동학들에게 발표했다.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의 발표가 다 끝난 후에 직접 그 시들에 대해 다시 한번 가르쳐주셨다. 발표를 준비한 학생은 좀 더 심도 있게 시를 이해할 수 있고 다른 학생들은 같은 시의 설명을 반복해서 들을 수 있는 효과가 있었다. 나는 학기 동안 왕창령(王昌龄)의 <규원(闺怨)>, 최호(崔颢)의 <황학루(黄鹤楼)>, 이렇게 두 수를 발표했다.


학기중 발표했던 두 시의 발표자료. 준비 과정도, 발표도 즐거웠다.


평상시에 이런 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던 터라,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사실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다만 한국에서의 전공 수업을 돌이켜보면 보통 이런 시가(詩歌) 수업은 열심히 암기한 후 시험시간에 강의실에서 암기한 시를 적고 나오는 방식이 많아서, 이번에도 어쩌면 이렇게 배운 시를 암기해서 적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선생님께서는 수강생들에게 그동안 수업에서 다뤘던 시 중에서 본인이 발표를 준비했던 시를 제외하고 아무 시나 한 수 골라 A4 용지에 적고, 시험 시간에 당신께 1:1로 그 시에 대해 해설을 하라고 하셨다. 대신 형평성 차원에서, 해설을 모두 잘했다는 전제 하에서 분량이 적은 시를 고른 학생보다 분량이 많은 시를 고른 학생의 점수가 더 높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시를 고를까 고민하면서 그동안 수업시간에 다뤘던 시들을 훑어보다가, 왕발(王勃)의 <송도소부지임촉천(送杜少府之任蜀川)>이라는 시로 시험을 보기로 했다. 시인의 오랜 벗이 사천 지역으로 벼슬을 하러 가는 길을 배웅하며 쓴 시인데, 시구 중 세상에 날 알아주는 친구가 있다면, 하늘의 끝도 가까운 이웃처럼 느껴질 것이라는 뜻의 '해내존지기, 천애약비린(海内存知己,天涯若比邻)'이라는 구절이 가장 유명하다.


현업에 있을 때 동료 현채인 직원이 이직하거나 할 때 가끔 사용되던 표현인데, 시험을 볼 때 선생님께는 '1년 후 상해를 떠날 때, 1년 동안 여기서 사귄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인용할 수 있는 좋은 시인 것 같다'라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난다. 시험이라는 중압감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당시(唐詩) 수업은 중간고사를 치렀던 여러 과목 중 준비 과정이 가장 즐거웠고 또 그 시험 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 과목이었다.


시험을 준비하며 써본 왕발의 시



최애 음식과 함께 조촐한 한 달 파티


비록 시험이고 보고서고 많이 남아 있었지만, 상해에 와서 좌충우돌 지낸 지 만 1개월이 된 것을 기념하여 조촐하게 스스로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파티를 하기로 했다. 파티라곤 했지만 누구 다른 사람을 초대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스스로 한 달 동안 잘 버텼다고 도닥여주기 위해, 평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시키고 좋아하는 영화를 한 편 틀었을 뿐.


좋아하는 음식이랄 것도 사실 별 게 없다. 계란볶음밥(蛋炒饭)과 지삼선(地三鲜). 계란볶음밥이야 중국식 웍에 계란, 소금, 약간의 채소를 넣고 센 불에 볶아낸 아주 일반적인 볶음밥이고, 지삼선은 땅에서 나는 3가지 신선한 채소를 볶은 요리로 피망, 감자, 가지가 들어 있는 요리다. 재료로 보나 비주얼로 보나 중국에서는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음식들. 하지만 내게는 마치 영화 <카모메 식당>의 시나몬 롤처럼 그 어떤 요리들보다 익숙하면서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음식들이다.


이 두 음식에 대한 나의 사랑은 그 역사가 꽤 길다. 2012년 북경 교환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내가 교환학생 생활을 했던 북경인민대학(北京人民大学) 동문을 들어서면 학자거(学子居)라는 식당이 하나 있었다. 요리를 주문하는 일반 식당이라서 학식 형태로 되어 있는 학생 식당이나 유학생 식당과는 좀 달랐는데, 위생상태나 서비스, 그리고 맛을 고려했을 때 다른 식당보다 훨씬 우월했고, 그렇다고 값이 비싼 편도 아니어서 자주 이용했다.


그리고 이 식당에서 내가 가장 자주 먹었던 요리가 바로 지삼선. 한국에선 가지를 전혀 먹지 않던 나였는데, 이 지삼선에 들어가는 가지는 한 번 튀긴 후 볶아서 그런지 요즘 말로 겉바속촉이라 아주 별미였다. 거기에 구운 감자까지 곁들여지니 그 맛이 환상! 채소 요리로 분류되는 음식이라 값도 싸서, 내 기억에 당시 지삼선 가격이 12위안, 우리 돈으로 2천 원 정도였는데, 그 양은 두 사람이 충분히 먹을 양이어서 항상 같이 교환학생 생활을 하던 후배와 같이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지삼선의 매력에 흠뻑 빠져 교환학생 한 학기를 보내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그때만 해도 한국에는 지삼선을 파는 중국음식점이 거의 없었다. 왜인고 하니, 지삼선은 한국으로 치면 감자볶음 같이 너무 일반적인 중국의 집 반찬 중 하나라 굳이 만들어서 판매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이다. 지삼선이 한국에서 그나마 판매되기 시작한 것은 양꼬치가 인기를 끌면서 중국 동북지방의 요리가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면서인 것 같은데, 그 이름이 직관적이지 못해서 아는 사람만 시키는 요리 중 하나다. 외국어생활관에 있을 때, 중국인 선생님께 가장 좋아하는 중국 요리가 지삼선이라고 하니 선생님이 보여줬던 벙찐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계란볶음밥은 사실 얘기가 좀 다르다. 사실 교환학생 때는 지삼선을 싸가서 기숙사에서 먹을 일이 있으면, 1위안짜리 쌀밥을 시켜서 가져갔던 것 같다. 볶음밥으로 시키면 값도 비싸지고 양도 훨씬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혼자 먹기 좀 그래서 그렇지 계란볶음밥은 항상 옳았다. 혹시 만화 <요리왕 비룡>의 황금 볶음밥을 기억하는 분이 계시다면 알지도 모르겠지만 중국에서는 아무 식당에서나 볶음밥을 시키면 정말 밥알이 살아있는 볶음밥이 나왔다.


결론적으로 중국에서의 1개월을 기념하는 요리로 나는 지삼선과 계란볶음밥을 먹기로 했다. 쌀밥을 먹어도 됐지만 최저 배달 금액에 걸렸기 때문에 계란볶음밥으로. 그리고 우연히 배달시킨 이 집의 지삼선이 너무 맛있어서 이후 지삼선이 먹고 싶을 땐 이 집만 시켰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삼선은 동북 지방 요리 전문점에서 시켜야 내 입맛에 가장 맞았다. 첫 입맛을 북경에서 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이상하게 남방 지방 식당에서 지삼선을 시키면 가지가 너무 물렁하고 맛이 없었다. 혹시 중국 남방 지역에 사는데 맛있는 지삼선이 드시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참고하시길.


항상 옳았던 지삼선과 계란 볶음밥★



다른 길로 가볼 용기


길치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새로운 길로 가보는 것이다. 그것이 아주 일반적인 길 찾기가 되었든 아니면 비유적인 의미의 도전이 되었든 말이다. 전형적인 길치인 나 역시 그랬다. 사회화 과정을 거쳐 약간 변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질적인 특성은 여전해서 나는 새로운 길이나 새로운 일이 있으면 도전하기를 좀 주저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지역전문가라는 프로그램과 이런 나의 기질적인 특성은 잘 맞질 않았다. 이곳에서 그런 성격 때문에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를 주저한다면 사실상 1년을 허투루 보내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누군가 내 옆에서 이건 꼭 해야 한다고 들볶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한국으로 돌아가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천지였으니 말이다. 미련을 남기고 한국으로 돌아가 후회하느니 이곳에 있는 동안 무엇이든 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론 아주 잘 한 선택이었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나의 새로운 도전의 시작은 별 게 없었다. 그저 평소와는 다른 길로 등하교를 하는 것뿐. 당시 나는 주로 지하철 12호선을 타고 한중루(汉中路)에 내려 1호선을 갈아타고 쉬쟈후이(徐家汇) 역으로 가 등교하는 루트로 다녔는데, 좀 다른 길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승 통로가 너무 길어 사람에 치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사실 있었다. 그래서 환승을 하지 않는 루트를 찾다 보니 동료 지전가분께서 알려준 다른 길이 생각이 났고, 그 길로 등교를 해보기로 했다. 그건 바로 아파트 뒷문으로 나가서 등교하는 루트!


환승이 필요 없는 아름다운 등굣길


아파트 앞문으로 나가면 13호선 난징시루 역이 나오지만, 뒷문으로 나가서 좀 걸으면 1호선 황피난루(黄陂南路) 역이 나오는데, 그 역으로 가서 지하철을 타면 쉬자후이까지 환승할 필요가 없다는 아주 큰 장점이 있었다! 물론 어찌 보면 환승 통로에서 걷는 만큼 지상에서 걷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환승 통로의 살풍경한 모습보다야 지상에서 바깥 구경하면서 걷는 게 훨씬 재미있었으므로 이 길로 가보기로 했다. 황피난루는 신톈디(新天地)와 이어지는 동네라 나름대로 구경할 것이 많았고, 이후 이 길은 나의 메인 등하굣길이 되었다.


다른 길로 갔기에 볼 수 있었던 풍경들


익숙하지 않은 길로 다니니 못 보던 볼거리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집에서 황피난루 역으로 가는 길에는 아주 큰 고가도로가 있었고, 육교를 건너는 길에 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예쁘게 조경을 해둔 구역이 있었다. 또 아파트 뒤쪽에 있는 옌안공원(延安公园)도 만약 이 길로 나와보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풍경이다. 이 길로 다니면 집에서 신천지도 꽤 가깝다는 사실을 안 뒤에는 심심할 때마다 바깥 산책을 나갔다. 마음이 우울하거나 오래 걷고 싶을 땐 프랑스 조계지에서 집까지 슬슬 걸어올 때도 있었다. 휘황찬란한 집 앞 난징시루보다 이쪽이 내 취향엔 더 맞았다.


상해 생활, 벌써 한 달. 그동안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잔뜩 방어적인 자세로 임했다면, 이제는 첫 지역연구도 가봤겠다, 살 곳도 있겠다, 좀 더 못해본 경험들에 발을 들여놓을 필요가 있었다. 시작은 다니던 길을 바꾸는 것부터. 다른 길을 가볼 용기를 가지고 두 번째 30일을 시작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중문 일기 in 위챗 모멘트(朋友圈)]

(譯) 2019년 4월 16일 

상해에 온 지 벌써 한 달이다. 시간이 참 빠르다. 첫째 주에는 강의동조차 스스로 찾지 못했던 내가, 이제는 자유롭게 캠퍼스를 거닐며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을 보니, 스스로 마음이 많이 놓인다. 상해에서의 만 한 달의 시간을 잘 보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중국 요리인 지삼선과 계란 볶음밥을 시켰다. 이제 숙제해야지....


(譯) 2019년 4월 18일 

1. 오늘 쉬쟈후이(徐家汇)에서 돌아오는 루트를 좀 바꿔 봤는데, 총칭중루(重庆中路)에서 예쁜 곳을 발견했다. 친구 중에 돌고래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바로 사진을 보내줬다. (*立即发给她了라고 써야 했는데, 오타인 듯..)

2. 아파트 뒤쪽에 이런 공원이 있다니! 다음엔 카메라를 들고 와서 꼭 사진을 찍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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