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없는 사랑이 어디에 있나 - ing

에필로그

by Jin

안녕하세요, Jin입니다.

드디어 저의 첫 브런치 북 '절망 없는 사랑이 어디에 있나'를 끝냈습니다. 글을 쓰면서도 이게 맞는 건가라고 생각했더랬습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이런 느낌이랄까요. 절망사를 처음 시작 할 때 처음에 너무 가볍게 시작했던 이야기가 마지막으로 갈수록 너무 무거워져서 표현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읽어주시고, 응원의 라잇과 댓글을 달아주셔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붙들고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적으며 완결을 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절망 없는 사랑이 어디 있나의 댓글을 보면서, 이서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던 분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안 갈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타임라인이 사실 무려 10년짜리입니다. 10년 치를 30화 안에 넣을 수 없어서 구깃구깃 최대한 넣을 수 있는 중요 포인트만 넣어서 아마도 더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궁금해하셨을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너'라는 인물은 아버지가 어머니의 외도를 의심하면서 집안을 벌집을 들쑤신 것처럼 만들었을 때 집에 들어가기 싫어 과제 핑계로 친구의 집에서 돌아가며 잠을 청하던 시기에 만난 친구었습니다. 하지만 '너'라는 인물을 만나면서 이서는 크게 엇나가지 않고 너라는 인물에게 자신이 없는 모습을 보며 이상향을 그려나갔고 그 덕에 조금 아주 조금 괜찮은 이서가 있게 되었습니다.


상담사 선생님께 이서가 고백하죠. 자신이 해 줄 수 있기 때문에 해 준 것뿐이었는데. 사람들은 자기를 '거짓말쟁이'라 말한다고. 너라는 인물은 '본인이 보고 판단한 것 외엔 결코 태도를 바꾸지 않는 사람'이라고 제일 앞에 표현해 두었습니다.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이서에게는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서에게 '너'라는 인물은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엔 어렵습니다.


이서에게 너는 종교이자, 신이고, 구원자라는 단어로 밖엔 다른 표현이 잘 떠오르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서의 주변에는 제대로 된 어른이 없었어서 보고 배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너라는 인물을 '내 첫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이지요. 기억하실까요? 바다에서 너라는 인물을 보내줄 때. '고마웠어. 안녕. 내 첫 사람.'이라고 인사한 것을요.


'선배'는 이서에게 어쩌면 아픈 손가락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자신과 동일시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선배는 이서에게 사랑이 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미련이, 슬픔이, 안타까움이 그대로 고스란히 느껴져 절망사 중에는 자세한 표현은 안 했지만 이서에 대한 마음을 끊어내었으면 해서 선배에게 잔인한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부터 선배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을 때 이서는 죄책감을 가졌었고, 그 죄책감은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이서는 그냥이라는 이유를 믿지 않습니다. 너무 막막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상담사 선생님께도 말했다시피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약에 이서가 선배에게 마음을 주었는데 마음이 변해서 싫다고 해버리면 이서는 아마도 꽤 오랫동안 다른 형태로 힘들어했었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맹목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서에게 안되었던 겁니다. 언제 지칠지 몰라서요. 그런데 선배는 꽤 오랫동안 이서를 기억해 주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서에게 '그'는 '원하는 모든 조건을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서가 왜 좋은지 이유를 말해주었고,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평생 70~80% 정도'로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한 것은 이서의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한 일화입니다. 아니 100%도 아닌데 왜? 너는 왜 결혼하는 거야? 라며 다들 이서가 이 사람과 만나는 것에 이해가 안 되는 눈치였지요. 하지만 친구들은 이서의 상황을 거의 몰랐습니다. 그렇기에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친구들이 이서에게 그렇게 말할수록 '이것들 내 걱정에 밤잠을 설치는 구만'이라고 생각하며 소소하게 기뻤습니다. (지금도 이서가 아깝다고 난리) 아무리 잘난 남자를 데려다 소개시 킨들 아마도 친구들은 이서가 아깝다고 해줬을 것이라서요. 아이러니하게도 이서의 입장에서는 그가 아까웠습니다. 제가 아니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과 만나 가정을 이뤘으면 어쩌면, 굉장히 지금보다 행복하게 잘 살았을 사람인데 사람을 잘 믿지 않는 이서라 그가 고생을 좀 했습니다.


글을 적는 도중, 이서는 그에게 3개월 동안 헤어져있었던 그때를 물어봤습니다. 그때 우리가 서로에게 여지를 주지 않았다면 끝내 헤어졌을까?라고 하자. 그는 '나는 헤어지고 싶던 마음이 없었다니까? 네가 헤어지자고 한 거지. 그리고 우린 결혼했을 거야.'라고 말해주었지요. 그는 이런 캐릭터입니다. 그는 이서가 사람에 대한 불신이 강한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믿음을 주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최근 이 글을 적으면서 굉장히 정서적으로 안정이 된 것 같다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도망 안 갈 것 같네.'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이서가 있습니다. 예전엔 밝음이 하나의 페르소나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정말로 밝고, 귀여운 이서인거지요. 물론 쓸 수 있는 밝음의 양이 정해져 있어서 조금 'ㅁ' 조절해 가며 써야 합니다.


몇몇 분은 글을 읽으시면서 눈치채셨을지 모르지만, ‘너’와 ‘나’, ‘선배’와 ‘나’ 사이에서는 ‘우리’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이름도 등장하지 않지요. 초반엔 있었지만, 헷갈릴까 봐 빼버렸습니다. 그와 이서가 나올 때 '우리'라는 단어를 씁니다. '우리'라는 단어는, 정말 마음을 나눈 사람끼리만 쓸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연인이든 친구든.


초반부터 함께 해주신 독자님들은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셨던 것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이서라는 사람이 다양한 관계를 통해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스토리였지요. '절망'이란 단어는 모든 관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모와 나, 사랑하는 이와 나, 친구와 나, 자식과 나. 그 외 모든 관계에서 절망이라는 단어는 언제 듯 찾아오죠. 불안처럼요.


그리고 타오르듯 진한 사랑 외에 다른 형태의 애정의 관계도 있다 전하고 싶었습니다. 저희는 씅을 참지 않습니다. 싸우는 방법은 지금은 순한 맛이지만. 혈연관계의 동생의 말로 표현하면 예전엔 마라맛.이었습니다. 서로 멱살잡이하면서 싸워도 봤습니다. 저희는 한 명이 희생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다만, 그와 이서는 그저 타인보다 서로를 조금 귀여워합니다. 타인보다 서로를 조금 더 안쓰러워하는 정도랄까요. 그래서 그와 이서의 스코어는 여전히 50:50이죠. 누구 하나 일방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는 관계. 글에서 이서가 1g의 마음으로 표현한 것 기억하시나요? 그 어떤 큰 g의 마음보다 1g의 마음이 서로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서가 나중에 행복해지나요? 해피엔딩인가요?라는 댓글을 보면서 이서의 지금 일상을 마지막 에필로그에 꼭 넣어드려야지.라고 생각 했습니다. 이서와 그를 보고 친구들이 가족들이 이서에게 해주는 말입니다.


"둘이 정말 재미있게 사네"

"티키타카. 시트콤 보는 느낌이네"

"둘을 보고 있으면 결혼할 만하구나 싶다가, 회사 나가면 '결혼은 미친 짓이야' 생각나.(혈연관계의 동생증언)"


혈연관계의 동생은 ‘형부 눈에서 꿀 떨어짐’이라고 증언합니다. 그가 보내는 눈빛을 이서만 모르는 걸 까요? 이서는 혈연관계의 동생에게 '난 잘 모르겠던 데에- '라고 말하면서도 이런 제보가 들어올 때마다 배부른 포식자처럼 온화해집니다. 그리고 결심하죠. 오늘은 잘해줘야지. 배부른 사자는 토끼를 잡아먹지 않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주기적으로 넣어줘야 하는 애정. 다 잡은 고기라고 이 어장에서만 있을 쏘냐.! 이서의 모토입니다.


그와 이서의 카톡입니다.



by Jin



가지라고 해 놓고 집에 와서 제가 챙겨 둔 콩나물을 흐흐흐 하고 웃으면서 'ㅁ' 냅다 들고 토켰습니다.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이런 하루하루 잘 살고 있습니다. 싸웠다가. 화해했다가. 사이가 좋았다가. 미적지근했다가. 싸움과 화해에 특화되어 있는 부부. 그와 이서입니다.


그래서 이서는 현재는. 행복하게 살고 있다 말할 수 있겠지요. 죽을 때까지 그와 잘 지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상황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그래서 이 에필로그의 제목이 <절망 없는 사랑은 어디에 있나 - ing>입니다. 조금 현실적이죠?


이서는 늘 끝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건 오랫동안 이서를 살 수 있도록 위로를 준 방식이라, 쉽게 고치긴 어렵더군요.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나를 왜 사랑하지 않는지에 대한 그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지 마세요.


‘내가 뭘 잘못했을까?’

‘타이밍이 안 맞았던 걸까?’

'내가 좀 더 잘나면 괜찮을까?'

'내가 부족한 걸까'


아니에요. 그냥, 그렇게 된 것뿐입니다. 이서도 오랫동안 이서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으려 했어요. 너라는 인물에게서 왜 나는 안 되는지. 고민했습니다. 오랜 시간. 하지만 왜 안 되겠어요, 내가 너의 사랑이 아니라고 했으니, 안 되는 거죠. 이서 역시 안 되는 사람은 끝내 안 되더라고요. 아무리 잘해줘도 마음이 가지 않으면, 억지로 붙잡아 둘 수는 없어요.


그렇다고 그런 사랑이 쓸모없었던 건 아닙니다. 삶의 한 조각으로 언젠가는 도움이 되는 날이 오더군요. 그게 마음을 병들게도 하고 지치게도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이서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겪는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자양분이 되어 다른 상황에 버티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접는다고 내 인생이나 내 삶까지 접을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지만 그냥 내 인생의 에피소드가 하나가 더 생긴 것뿐이더군요.


이서의 같은 경우엔 이런 마음 따위. 부질없다. 하고 체념하던 그때. 정작 내 마음의 조각을 준 적도 없는 사람이 이상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다, 싶었던 것도 아닌데. 그의 곁에서 받는 안정과 따뜻함이, 시간이 갈수록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게 되더군요.



14.7.25. 13:45분에

블로그에 글을 적어 둔 것이 있어

가지고 왔습니다. (무려 11년 전!!! 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좋아하지만

스무 살의 사진을 좋아하던 소녀와

서른이 넘어간 지금의 사진을 좋아하는

소녀는 조금 달라진 것이 있더군요.


스무 살 소녀의 곁에는 짝이 없었고

간혹 사귀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을 담기보다는 풍경을 담는

것이 더 즐거웠고 가치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곁에 있는 사람과

발맞추어 걷고 그곳에 함께 있었음을

남기는 것이 훨씬 더 좋아지더군요.


좋아하는 것이 시간이

흘러 변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방법에 변화가

있을 뿐이더군요.



프롤로그에서도 썼듯이, 저는 제가 선택한 그의 옆에서 흩어지는 벚꽃 잎이 아니라, 커다란 나무에 둥지를 튼 새가 되기로 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는'나비'로 표현했지만, 그건 제가 나비를 좋아해서였고, 실제로 함께 살아가는 삶은 '새', '다람쥐'와 같은 생명들에 가까웠습니다. 저는 지금 그와 함께 스무 번이 넘는 봄을 맞이했습니다. 그와 나 사이의 아이와 함께 저만의 계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말이 길어졌습니다. 다시 한번 더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이서는 여러분과 함께했기에 끝까지 달려올 수 있었습니다. 부족한 글이었지만,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Photo by Jin



이 이야기가

사람들과의 관계에

지쳐있는 '이서들'에게

삶의 방향을 조금이나마

알려주었기를.


절망 속에서 우리 모두

비록, 찬란하진 않더라도
자신만의 속도로 천천히
걸어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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