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고 1년만에 그만두고 싶었겠어 - 17
웹툰 '정년이' 120화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있다. 국극단의 메인 배우들은 다 떠나버리고, 금전 사정으로 국극의 미래마저 불투명해져버린 상황, 그럼에도 배역을 준비하는 영서에서 우울해진 정년이는 말한다.
'세상인엔 왜 끝이 있을까' 영서가 대답한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끝나. 인간마저도.' 다시 정년이 묻는다. '사랑하는데도? 이상해.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영원하지 않다니.' 그러자 영서는 다시 대답한다. '미래는 떠난 사람이 아니라 남은 사람의 것이야 그리고 우리가 남았어 너와나.' 마침내 정년은 깨닫고 말한다. '생각해봤는디 끝이 있어도 상관 없어야. 다시 시작하면 되니께. 밥 잘 먹고 잠 많이 자고. 맞지?'
솔직히 고백한다. 떠났던 회사가 너무 그리워서 재입사 원서를 써볼까 고민한 적이 있다.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고 싶었다. 전 회사의 사람들이 너무 좋았다. 좋은 원고를 건져내 대박작으로 만들어 낼 때의 희열이나 뛰어난 매출을 낼 때의 기쁨같은 것들이 자꾸 그리웠다. 그리고 솔직히 월급도 그리웠다. 그리운 마음을 헤아리고 나니 욕심이 됐다. 나만큼 잘할 수 있는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도 없는데. 그런 마음이 자꾸 들었다. 내가 어떻게 헤집고 나왔는지 알면서도 염치도 없이 다시 한번 도전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다시 한 번 나를 인정해주고, 좋은 사람들도 함께 일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한 며칠 열병처럼 앓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다시 지원하지 않았다.
건강상의 사유를 심각하게 대면서 퇴사한 마당에 다시 돌아가는 것도 웃길 뿐더러 무엇보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퇴사의 원인을 회사에서 찾으면 끝도 없다. 회사는 그냥 공간이다. 움직이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환경. 나와 맞고 안 맞고를 살펴봐야지 이게 문제고 저게 문제고 따지다 보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맞지 않았다. 작가를 뒤에서 받쳐줘야 하는데 나는 자꾸 내가 인정받고 싶었다. 욕심이 났고 욕심에 나를 갈아 넣었다.
그런데 내가 욕망하는 만큼의 사람이 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나도 해보고서야 알았다. 내가 기대하는 만큼의 내가 되기 위해서 나는 신작도 구작도 많이 챙겨봤고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라고 하면 그렇게, 저렇게 생각하라고 하면 저렇게 생각하면서 흉내도 내봤다. 그리고 안되는 만큼 울었고 스스로를 공격하기도 하면서 힘들게 지냈다. 다른 사람들한테 시간적으로 피해도 많이 줬다. 결국 그렇게 사는 게 안 됐다. 내가 부족한 사람이었던 게 아니다. 그냥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던 거다 나는. 인정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직사회에 적응하는 일에도 나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냥 그러면 그런 거다 생각하고 의문을 표하지 않는게 내게만 퍽 어려운 일이었다. 궁금한게 많아도 의도를 물어보면 안된다는 게 사회생활을 못하는 반증이랬다. 내 성질을 죽이는 건 가능한 일이지만 내가 하루 아침에 괜찮은 사람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면 또 힘든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친구가 내게 그랬다. 너는 스트레스를 만들어서 치르는 사람 같다고. 때로는 세상 일을 그러려니 해야 하는데 그러려니 하지를 못하니까.
그런데 내가 다시 회사에 입사한다? 그것도 안좋게 헤어진 전 회사에? 일단 서류에서부터 떨어질 지 모르고, 무슨 생각인지 들어나 보자 싶어 면접에서 불러 떨어뜨릴지 몰라도 똑같은 일에 반복이다. 회사에 시스템이랑게 애시당초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없다. 좋은 사람들과 보냈던 좋은 시절들은 딱 그 순간에만 존재했던 환상이다. 매일같이 좋은 곳도 없으며, 그럴 수도 없다. 어디든 사람들이 안맞고 상황이 나쁜 순간들이 있는 반면, 좋은 사람들 딱 맞는 상황들이 있는 순간이 있다. 후자가 계속되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어차피 내 기억속에만 존재하는 추억들이니 실제로 그랬는지도 이제와서는 알 수 없는 일이고 말이다.
사랑했다면 놓아주는 게 맞는 것 같다. 몇 번이고 이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계속해서 하는 이유는 그만큼 내게 특별했던 곳이라 그렇다. 회사는 배우는 곳이 아니라지만 충분히 배우지 못해 아쉽고, 좋은 사람들과 할 수 있었던 많은 일들이 생각나 발걸음을 머뭇거리게 하는 곳이다. 안 좋은 추억만 있지는 않았다. 함께 남아 야근을 하면서도 준비하던 프로젝트가 잘되리란 생각에 신이나던 밤들이 그저 그립다.
그러나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끝이 난다. 끝이 나면 시작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이 긴 인생 언젠가는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삶을 짦은 점에 연속이 아닌 긴 선의 만남이고 나에게는 감사하게도 시간이 있다. 아직 무엇도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시간. 좋은 시간은 시간대로 남겨두고, 또 새로운 하루를 시작해 보련다. 사랑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만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