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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Apr 22. 2019

광기, 그 찬란함을 위하여

히틀러 제국의 탄생

1920년 2월 기존의 독일노동자당과 툴레회의 그리고 31살의 떠오르는 신성 히틀러가 결합하여 나치당이 탄생했다. 정치는 말(speech)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실증한 대표적인 인물이 히틀러였으며, 그의 정치적 레토릭과 웅변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말로서 대중을 선동할 수 있는 기술적 요인을 완벽하게 갖춘 히틀러는 거리와 맥주집에서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였고 자연스럽게 당의 중심이 되어 갔다. 이에 당수였던 드렉슬러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당을 떠났다. 히틀러가 이제 나치당의 당수가 된 것이다. 뮌헨의 허름한 맥주집에서 드렉슬러의 눈에 띄어 정치에  입문한 지 불과 1년 만이었다.    

히틀러는 기존의 국가사회주의 강령에 자신의 고유한 옷을 디자인한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법치주의, 합리주의, 기본권과 인권, 베르사유조약, 국제협약과 평화를 거부함을 선언한다. 그리고 반볼세비키즘, 반유대주의, 보수적 민족주의와 사회적 급진주의의 결합, 개인의 종속, 맹목적 복종, 강함을 숭배하고 약함을 경멸하고, 아리아인의 우성과 유대인 슬라브인 등의 열성을 구별하는 우생학, 폭력의 정당성, 전체주의, 지도자 숭배 등으로 무장을 하고 대중 속으로 파고든다.     


이런 비상식적인 논리는 선동이라는 엔진에 의해 움직일 수 있었다. 종교와 윤리, 보편적 진실성은 나약하기 그지없는 작동원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선동에 대해 자세하게 설파한다.


선동은 대중이 우매하다는 전제 하에 시작한다. 대중이 우매하지 않다면 선동은 작동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대중은 여자처럼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를 숭배하고, 자유의지가 희박하고, 정신적인 폭력에도 취약하고, 소외감에 잘 빠지고, 선과 악의 구별에 대한 판단 능력이 미약하고, 정보 수용 능력이 제한적이어서 이해력이 약하고 잘 잊어버린다.    


"이처럼 대중은 이성보다 감정에 취약하여,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감정에 호소해야 한다. 증오는 혐오보다 오래 지속되며, 변혁을 일으키는 원동력은 과학적인 인식보다 대중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광신과 히스테리이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은 객관성과 의지의 힘이며, 이성적인 담론이나 메시지보다 대중의 감정에 주위를 기울이는 단편적이며 디테일한 장치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선전의 효과는 극대화된다. 가장 아둔한 사람을 납득할 수 있을 정도의 단순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주입해야 한다. 그것의 결과만이 선전의 그름과 옳음을 판단하는 근거이다. 그 결과가 진실이라는 것이다. 지식인을 만족시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대중은 합리적인 이성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비합리적이며 비과학적인 애매한 선전에 움직인다고 확신했으며 그 확신은 놀랍게도 현실이 되었다. 대중은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고 내용이 진실에 위배된다고 하더라도 선전선동으로 진실을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한 것이다. 이 논리를 실행에 옮겨 성공시킨 사람이 바로 히틀러를 선지자로 모신 요세프 괴벨스였다.


지금부터 중요한 연도순으로 이야기를 집약하겠다. 뮌헨의 허름한 맥주집에서 태어난 보잘것없었던 나치가 기존의 위정자들의 멸시를 받으며 어떻게 극우당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장하여 세계를 피의 도가니로 몰고 갔는지 지금부터 간략하게 이야기하겠다.      


1923년

그해 11월 히틀러는 뮌헨에서 쿠데타를 일으킨다. 프랑스와 석탄 채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르크화를 무작정 찍어낸 결과 빵 하나에 4억 4천 마르크가 될 정도로 고공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실업자 수가 급증하여 경제 상황은 최악이었다. 당시 나치당의 당원 수는 1만 명이 넘을 정도로 확장되어 있었다. 혼란한 사회와 히틀러 개인의 역량으로 성장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강한 카리스마로 당을 장악하고 있었다. 선동과 폭력성은 그의 강력한 무기였다.     

히틀러는 건장하고 호전적인 당원을 선출하여 참전 용사 출신인 에른스트 룀을 중심으로 돌격대를 만들었다. 그 나치 돌격대(SA)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때까지 선동과 폭력에 앞장을 섰고, SS 친위대와 쌍벽을 이루는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가 세계 2차 대전이 시작될 무렵 독일군에 편입된다.     


나치당 내 돌격대라고 하지만 사실 당수를 경호하는 사설 폭력 조직이었다. 그 조직에는 전쟁에 참전했던 군 출신 당원들이 많았다. 그들은 동일한 군복을 입고 거리를 행군하며 뮌헨을 공포 분위기로 조장했다. 직접적인 폭동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폭동을 일으킬 정도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살벌한 집회를 수시로 열었으며 당시 치안 경찰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경우 외에는 집회를 해산시키지 않았다.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뮌헨의 정치 지형을 보았을 때 창당 4년 차에 불과한 나치당의 세력은 독일 공산당  보다도 약했다. 히틀러가 광장과 맥주집을 순회하며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세력 확장은 정체되어 있었다. 그해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여 정권을 찬탈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히틀러도 자신의 우상인 파시즘의 원조 무솔리니를 본받아, 나치 독격대와 베르사유조약에 불만이 컸던 참전군인 연합과 그리고 전쟁 영웅인 루덴도르프와 결탁하여 뮌헨을 접수하기 위해 거리에 집결하고 경찰과 대치한다. 돌격 앞으로! 를 외친 히틀러의 명령으로 뮌헨은 폭동에 휩싸이고 결국 나치당원 16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체포된다. 도주하던 히틀러도 체포되어 쿠데타 주범으로 재판에 회부된다. 사실 하루 만에 진압된 그 사건은 쿠데타이기보다는 불장난에 불과한 호전적인 극우정당의 어설픈 폭동 수준이었다.    

에른스트 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사건은 히틀러의 인지도를 전국적으로 넓히는 계기가 된다. 쿠데타 협의로 재판을 받으면서 히틀러는 자신이 왜 쿠데타를 일으켰는지 명쾌하게 논박한다. 베르사유조약의 후유증으로 독일 국민이 피폐되어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며, 이에 애국적인 차원에서 불가피하게 쿠데타를 도모했고, 당연히 쿠데타는 정상적인 정치적 행위라는 내용으로 설파를 했다. 히틀러의 압도하는 언변과 맞물린 이런 주장은 재판관들도 호의적으로 돌아설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재판 과정을 전국구 언론들이 기사화하면서 히틀러라는 이름이 정치 중심지 베를린과 전국에 퍼져나갔다. 바로 대중은 독일의 자존심을 히틀러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5년형을 선고받은 후 8개월 만에 가석방되고, 나치당도 해체되고, 히틀러에게 연설 금지명령을 내렸지만 그보다 몇 배나 더 큰 이득은 히틀러의 전국구 데뷔였다.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결과적으론 도약을 위한 재정비 기간이었다.    


이 사건으로 히틀러의 영원한 2인자 요제프 괴벨스를 만나는 계기가 된다. 유대계 출판사에서 조차 퇴짜를 받고 눈물을 곱씹던 무명작가이며 마르크스주의자인 괴벨스가 신문에서 히틀러를 보고 한눈에 반해버린다. 바로 자신의 우상을 만난 것이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영혼의 스승을 만난 것이다.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몸과 영혼을 받친다. 그리고 나치 정권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나치 친위대(SS)의 사령관이면서 홀로코스트 설계자인 하인리히 히믈러도 쿠데타를 계기로 히틀러를 교주로 모시게 된다. 장량과 한신처럼 그들은 훗날 나치독일의 개국공신이 되어 마지막까지 함께한다. 그렇게 사바나에서 먹이를 찾아 정처없이 떠돌던 굼주린 하이에나들이 히틀러를 향해 모여들었다.

괴벨스와 히믈러

쿠데타 당시 경찰을 향해 첫 방아쇠를 당겨 히틀러로부터 마지막까지 신임을 받았던 율리우스 슈트라이허가 슈트르머라는 주간지를 창간한다. 돌격대라는 뜻의 그 주간지는 10년 후 80만 부를 발행하는 독일을 대표하는 출판물로 성장한다. 슈트르머는 반유대주의로 시작해 반유대주의로 끝나는 반유대 전문 출판물이었다. 국가의 매춘 90%를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고, 경제 불황의 책임은 전적으로 유대인에게 있으며, 독일 여성을 납치하여 성노예로 수출한다는 등의 원색적이고 저질스러운 기사들이 난무하는 잡지였다.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선동으로 점철되었으며, 1935년 뉘른베르트 인종법이 통과되는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열렬한 나치 지지자들도 그의 기사들을 혐오스럽게 여겼다고 하니 기사의 저질 정도를 가름할 수 있다. 슈트라이허는 이에 공로가 인정되어 세계 2차 대전 후 있었던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교수형을 언도받는다.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히틀러는 8개월 동안 호텔 같은 감옥에 기거하면서 나치의 성서 ‘나의 투쟁’을 집필한다. 히틀러의 구술을 루돌프 헤스가 타자로 받아 쓴 나의 투쟁은 10년 후 독일인의 필독서가 된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마르크스를 학습하는 정도의 탐독은 아니었지만 전 국민이 한 권이라도 안 사면 눈치기 보이는 상황이었다. 특히 친구나 가족이나 지인에게 줄 선물로서 많이 구입을 했다고 한다. 당연히 성경을 능가하는 밀리언셀러였다.     


당시 히틀러는 어느 저널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권력을 잡으면 유대인을 교수형으로 몰살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그 당시부터 20여 년 후에 있을 홀로코스트를 꿈꾸고 있었는지 모른다. 유대인 말살에 대한 꿈을.    


1928년

뮌헨 쿠데타 발생 1년 후, 정치계에서 축출된 나치당은 독일민족자유당과 연합하여 재건을 위해 몸부림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다. 괴벨스와 히믈러를 비롯한 새로운 젊은 인재들이 들어와 당을 쇄신했으며,  대중연설이 금지된 히틀러도 2선으로 물러나는 등 전략도 바꾼다. 그렇게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발톱을 숨기고 대중화에 힘을 기울 결과, 1928년 독일 제국의회 선거에서 나치당은 2.6%의 득표율을 얻어 12석의 의원을 확보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괴벨스와 괴링 그리고 4년 후 히틀러와 노선 투쟁 끝에 나치당을 탈당하는 오토 요한 슈트라서 등이 처음으로 국회에 진출한 것이다. 제1당 독일사회민주당이 26% 131석을 획득했고, 공산당이 제4당으로 9% 45석을 얻었다. 나치당이 비록 꼴찌였지만 12석을 얻어 선거에 의해 정식으로 정치세계에 등장한 것이다. 바로 비례대표제 영향 때문이었다. 미국이나 영국 같은 선거제도였다면 꿈도 꾸지 못한 결과였다. 하여튼 그 해 제국의회 선거는 나치당 역사에 기념비적인 위대한 날이었다.    


당시 괴벨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양 우리로 들어가는 늑대처럼 의회에 입성했다.’ 대다수의 상식적인 대중은 ‘약한 자를 강하게 만드는 힘은 광신이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괴벨스의 악마적 교활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괴벨스와 히틀러를 미치광이 취급을 했고 정치 주변을 떠돌다 결국엔 주저앉을 것이라고 과소평가했다. 어느 사회든 극과 극에 보편성과 상식을 벗어나는 괴물 같은 세력이 미미하게 존재하기 마련이며 이들은 활개를 치는 듯하다 제풀에 사라지는 현상은 흔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편성을 가진 대중이라면 폭력과 선동을 대놓고 해 대는 정치세력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인지사정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낙관론은 5년 후 나치 일당 독재시대가 열린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히틀러를 사회악으로 취급했던 그들도 그 절대악을 찬양하게 된다는 사실을 그때만 해도 모르고 있었다.    


1930년

한스 뮐러 내각은 1929년 세계적 대공황의 여파로 내각에 분열이 생겨 다시 총선을 실시한다. 나치당은 이 선거에서 18.3% 득표율에 107석을 획득하여 153석을 얻은 사민당에 이어 2위를 기록한다. 그리고 나치당의 정적인 공산당이 3위를 한다. 나치당은 2년 만에 9위, 즉 꼴찌에서 일약 2위로 도약을 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1929년 미국 발 대공항은 독일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쳐 세계 1차 대전 후유증에서 벗어나는 듯했던 경제 상황을 다시 악화시켰다. 히틀러는 그런 위기 상황에서 가난한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사회주의적인 복지와 실업률 감소를 최우선 정책으로 내세웠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자신이라고 히틀러는 대중을 선동하였고 그 부분이 먹힌 것이다. 처음엔 공포와 폭력과 선동으로 당의 세력을 넓혔다면 그 해 선거는 그런 전략을 반면교사로 삼아 하층민을 겨냥한 선거 전략이 일정 부분 성공한 것이었다.    


2년 만에 제2당으로 급성장한 히틀러는 그 기세를 몰아 국가사회주의를 기반 한 선전선동정치에 올인한다. 그 선봉장은 요제프 괴벨스였다. 히틀러에게 전속 사진사 하인리히 호프만을 붙여 히틀러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이고 수만 명의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 등을 촬영하여 영화관에서 상영하였다. 이런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광고의 극대화를 이끌었다. 이런 류의 선동적 전략은 대중에게 세뇌되어 히틀러를 신격화시키고 집단적 광기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히틀러는 수많은 대중 집회를 열면서 그 자신이 세세한 부분까지 지시하고 계획했다. 귀빈석의 좌석배치나 조명등의 시설을 직접 꼼꼼히 점검하고 여러 가지 효과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당의 연설자들이 집회의 서론 부분을 항상 장식했다. 집회장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히틀러의 모습을 보고자 하는 대중들을 애태우고 기다리게 했다. 청중들이 기다림에 목말라할 때쯤 히틀러는 구세주처럼 그들 앞에 등장하곤 했다. 무대 위에 오직 하나의 불빛만 히틀러를 비추어 히틀러는 마치 고독한 그렇지만 위대한 지도자의 모습을 연출하기도 하였고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내리쬘 때 마치 구세주의 모습처럼 등장하기도 했다.”    


대중은 서서히 나치교의 광신도가 되어 갔다. 바그너의 서곡에 맞추어 군복을 입은 수만 명의 돌격대와 친위대원들이 만장 깃발을 들고 거대한 강줄기처럼 이어져 시가지를 행진한다, 그 위용에 대중은 열광한다. 밤에도 그들은 횃불을 들고 ‘폭력의 찬가’를 부르며 도심을 광기의 도가니로 만든다. 그들은 히틀러를 향해 하이 히틀러! 를 외치고, 히틀러는 거만하게 팔을 들어 답례를 한다. 거리와 광장에 모여드는 대중은 수십만으로 불어났으며 그들은 일제히 히틀러를 향해 열광한다. 광기는 이제 종교가 되어가고 있었다.    

당시 나치당의 지지율을 분석해 보면 50%가 넘는 지지층이 놀랍게도 중산층이었다. 그중에서도 교사들이 핵심층이었다. 하층민에겐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준 반면, 중산층에겐 강한 아리아인과 반유대주의에 대한 공감을 얻어낸 것이다. 위대한 게르만 민족국가를 만드는 데 중산층은 적극 동조했다. 예나 지금이나 어느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중산층 공략의 성패가 권력 쟁취를 결정하기 마련이다.     



1932년

그해 3월 드디어 히틀러가 대통령에 출마한다. 비록 힌덴부르크가 재선에 성공하지만 히틀러는 30% 이상 득표율을 올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7월에 있었던 총선에서 나치당이 37.3% 240석을 획득하여 바이마르 공화국 제1당에 오른다. 사민당을 2위로 끌어내리고 1위를 탈환한 것이다. 창당 후 13년 만에 이룬 기적이었다. 삼류 화가 출신의 히틀러와 아웃사이더적 성향을 가진 중산층 세력이 만든 60명에 불과했던 독일노동당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권력 바로 앞에 도달한 것이다. 뮌헨 거리에서 날뛰다 제풀에 지쳐 사라질 극우정당쯤으로 여겼던 나치당이 이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리에 도달했다.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시간은 그들 편이었다.    


선거에서 승리한 히틀러는 공산당을 몰아내는 데 몰두한다. 공산당은 아직도 제3당을 차지할 정도로 무시하지 못하는 당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폭력성도 만만치 않았다. 선거 전후 히틀러는 자신의 친위대와 돌격대를 동원하여 제1당으로서의 권력을 배경 삼아 공산당을 무력으로 공격한다. 이런 불법적인 폭력에 나치당과 공산당은 극한 대립을 하고 결국 1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후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된다. 독일에서 우선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세력은 공산당이었다.    


전체주의 독재국가를 만들기 위해 히틀러는 국회의 민주적인 절차를 방해하고 정국의 혼란을 조장한다. 1당이지만 득표율이 40%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적 한계를 통감하고 있었다. 이에 국회를 해산하기 위해 정국을 혼돈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그해 11월 히틀러의 뜻에 따라 국회가 해산되고 다시 총선이 치러진다. 하지만 의도와는 달리 33% 196석을 얻어 오히려 의석수가 줄어드는 성적표를 받는다.    


하지만 그런 결과는 한숨 쉬어가는 것일 뿐 히틀러의 정치적 위상은 변함이 없었다. 이미 독일은 히틀러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 지형으로 볼 때 상위 세 당이 서로 연합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총리 내각을 만들 수 없어 대통령 내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치당이 사민당과 연합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더더욱 3당인 공산당과는 연합할 수 없었다. 또한 그 외의 소수당도 나치당과의 연합을 회피하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히틀러는 어떠한 당과도 연합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대통령 힌덴브르크가 요구한 총리직을 히틀러는 받지 않았던 것이다. 히틀러의 목표는 일당 독재였기 때문이다.    

총리 히틀러와 대통령 힌덴부르크

이미 80살이 넘은 고령의 힌덴부르크는 허수아비 대통령이었고 권력의 핵심은 히틀러였다. 히틀러의 광기를 알고 있던 지식인들은 그에게서 ‘피의 냄새’가 진동한다고 불안감을 감추지 않았다. 한바탕 광풍이 몰아칠 것 같은 전운이 감돌았다. 아직도 망나니 히틀러가 독일의 권력을 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기득권층에는 많이 남아 있었다. 설마, 이 위대한 독일이 그따위 망나니한테 어찌 되겠는가...    


하지만 대중에겐 히틀러는 자신들을 구원할 구세주였다. ‘유대인에게 죽음’을 외치며 증오의 수치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런 광기에 대중은 술의 도움도 없이 취해갔고, 위대한 아리아인만이 이 세상을 지배할 권리가 있노라고 외쳤고, 이에 폭력과 선동 그리고 전체주의와 독재는 합당한 것이라고 예속을 공식화했다.    


1933년

전 해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총리직 지명을 수락하지 않았던 히틀러는 새해가 되자마자 반강제적으로 총리에 임명된다. 선거를 통해 의회를 장악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행정 권력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고자 계획을 수정한 것이었다. 1월에 히틀러가 총리가 되고 다음 달 2월에 독일 의사당 화재 사건이 발생한다. 히틀러 정부는 의사당 화재는 공산당의 소행이며 이는 혁명을 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발표를 하고 힌덴브르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비상사태를 선포한 후 대대적인 공산당 사냥에 나선다. 당시 공산당 당수였던 에른스크 텔만을 비룻한 당 간부 등 4천여 명이 체포된다.     

의사당 방화사건

그리고 3월 히틀러 정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다시 총선으로 내본다. 입법부를 장악하기 위한 집요한 획책이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대 실망이었다. 전체 의석에 44% 288석을 획득하여 과반수 달성에 또 실패한 것이다. 사민당 20.4% 121석, 공산당 16.9% 100석, 그리고 나머지는 군소 정당이 차지하였다. 공산당을 와해시킬 정도의 타격을 가했는데도 오히려 전보다 3% 정도가 더 오른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런 결과에 당황한 히틀러는 다른 방법을 강구한다. 민주적인 선거로 의회를 장악하는 것을 포기하고, 행정 권력으로 의회 권력을 삼켜버리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행정력으로 입법부를 무너트리는 쿠데타의 일종이었다. 그로부터 11월까지 이르는 기간은 독일 역사에서 가장 폭력과 선동이 난무한 시기였으며, 유대인 탄압도 행동으로 본격 시작된다.     


결국 히틀러는 공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한 법원을 이용하여 공산당을 불법 정당으로 만들어 해산시킨다. 그리고 소수 정당들도 해산시키고 마지막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을 탄생시킨 기득권의 상징인 사회민주당도 숨통을 끊어놓는다. 강하고 새로운 독일을 위해서라면 대중에겐 민주주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며 독재정권으로 인한 폭력과 공포 정도는 감내할 수 있었다. 이런 정치 상황에서 반나치 운동을 전개하는 세력도 있었지만 나치의 선동정치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하여튼 이제 독일에서 합법적인 정당은 나치당 하나밖에 없었다.    


그해 7월에 열등한 사람, 정신지체자와 정신병자와 기타 장애인들을 강제적으로 불임을 해야 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이 법에 적용되어 실질적으로 불임하는 사람들이 40만 명이 이르렀다. 그리고 유대인 기업 불매운동이 나치당의 선동에 의해 일어났지만 하루 만에 마감을 한다. 또한 유대인은 의사, 법률가, 농장 경영자 등을 할 수 없는 법안인 전문공무회복에 관한 법이 통과되는 데, 그 법은 나치 독일이 태어난 후 첫 번째 반유대법이었다.    

유대인 상점 앞의 나치 돌격대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언론은 이런 히틀러를 향해 맹비난했다. 그동안 독일의 정국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유럽 언론은 폭력과 공포의 칼날을 휘두르며 파시즘으로 몰고 가는 히틀러의 욕망을 간파하고 경고의 메시지를 강하게 토해냈다. 히틀러는 뭇소리니 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었다. 검은 광풍을 몰고 올 것 같은 기운이 유럽에 감돌고 있었다.     


그해 11월 국회는 해산되고 다시 총선이 치러진다. 선거에 나선 당은 나치당 하나였다. 득표율 92%에 총 의원수 661명 중 661명이 당선된다. 바이마르 제국이 마감되고 나치 독일이 시작된 것이다. 이 선거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할 시 입법부가 행정부에 입법권을 위임하는 전권 위임법도 국민투표에 의해 통과한다. 그리고 베르사유 조약 파기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히틀러는 그것을 전제로 국제연맹 탈퇴 건을 국민투표에 올리고, 역시 통과시킨다. 위대한 히틀러의 독일이 탄생한 것이다. 바그너의 리엔치가 독일 하늘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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