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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May 07. 2019

신은 죽었다

히틀러 끝나지 않은 광기의 역사

히틀러가 총리에 오르고부터 유대인 탄압은 말에서 행동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그해 5월 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유대인이 쓴 서적이 괴벨스의 선동에 의해 34개 대학에서 화형식이 거행되고, 멘델스존과 쇤베르그의 음악도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 1938년 브레히트는 당시 상황을 풍자한 ‘분서’라는 시를 미국에서 발표한다. ‘나의 책을 불태워 다오... 나의 책을 불태워 다오...’ 20세기 문명국가에서 벌어진 영혼의 정화식이라 불린 이 분서 사건은 진시황의 분서 사건과 비교하며 두고두고 역사에 회자된다.      

영혼의 정화식

그리고 유대인들의 탈 독일이 시작된다. 현대판 출애굽기였다. 금융인 변호사 사업가 의사 등과 그리고 세계적 명성의 과학자 철학자 예술가들이 영국과 미국과 남미 등 세계 각지로 떠난다. 독일에서 유대인이 산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광기 가득한 분위기가 얼마나 숨이 막히는지, 그런 압박감이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목을 죄고 있었다. 자신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때부터 동화되어 살아왔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유대인은 그것마저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독일에 계속 남아 온갖 박해를 겪다가 게토라는 집단 거주지에 수용되었고 결국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된다.


1933년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미국 망명을 시작으로 유력한 유대인 과학자와 문화예술인들의 탈 독일이 이어진다. 20기 초 양자역학의 새 장을 연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 중 슈뢰딩거 방정식과 슈뢰딩거 고양이로 유명한 에르빈 슈뢰딩거와 올리비아 뉴톤 존의 외할아버지이며 양자역학에 수학을 체계화시킨 막스 보른이 영국으로 망명하고, 1934년에는 원자폭탄 제조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수소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에드워드 텔러가 미국으로 망명하고, 1938년에는 원자핵 분열을 처음으로 발견한 여성 물리학자인 리제 마이트너가 스웨덴으로 떠난다. 그리고 1940년에는 베타 원리와 중성미자를 발견한 볼프강 파울리가 미국으로 떠난다. 그 외에도 맨해튼 프로젝트에 관여한 물리학자인 루돌프 파이얼스와 실라르드 레오도 독일을 떠나고, 아내가 유대인인 이탈리아의 엔리코 페르미도 아내를 따라 미국으로 망명한다. 이제 독일에는 하이젠베르크 외에 물리학자다운 물리학자가 남아있지 않았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기존의 뉴튼 물리학을 뛰어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20세 물리학계를 이끌어온 쌍두마차였는데, 그 물리학계에서 동거 동락하며 연구하던 물리학 도반들이 이제 히틀러에 의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에르빈 슈뢰딩거

과학계뿐 만 아니라 문화예술계도 탈출 러시가 시작된다. 일명 프랑크푸르트 학파라고 불리는 당대 독일의 석학 중에, ‘존재냐 소유냐’의 저자이며 파시즘을 인간의 사회학적 심리를 통해 분석한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저자 에리히 프롬, ‘계몽의 변증법’을 공저한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 등이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들은 나치 지배와 유대인 박해를 처음으로 사회 철학적으로 고찰한 사회철학자들이다. 이성의 독일이 왜 증오와 광기의 독일이 되었는지 분석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그리고 인간의 무의식을 설파한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1938년 빈에서 노후를 보내던 그는 점령군 나치에 의해 빈의 정신분석학회가 해산당하고 책과 재산을 몰수당하는 수모를 격은 끝에 그해 6월 노구를 이끌고 영국으로 망명을 떠난다.     


그리고 무성 영화계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프리츠 랑과 누아르 영화의 거장이며 각본가인 빌리 와일더,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서푼짜리 오페라로 유명한 베르톨트 브레히트, 현대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놀드 쇤베르그도 미국으로 망명을 하여 미국의 문화예술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만약 프란츠 카프가가 그 당시 살아있었다면 그도 역시 그 탈출기에 일원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이외도 독일과 유럽에서 살던 수많은 유대인 기술과학 문화예술인들이 미국 과 영국 등으로 탈출을 한다. 그렇게 탈유럽을 한 유대인들의 면면을 보면 각계에서 당대 최고의 대가들임을 알 수 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나치의 탄압을 피해 유럽을 떠난 명망가들을 보면, 미국이 절대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문명의 새 질서가 형성되는 전환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계 2차 대전의 최대 수혜국은 미국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히틀러로 인해 미국이란 초강대국이 탄생한 것이리라.    

프린츠 랑

히틀러가 집권할 무렵부터 독일 내에서는 그에 저항하는 반나치 운동이 전개되었다. 히틀러의 정적 탄압은 유대인 탄압에 견주어 약하지 않아서 독일 공산당 지도자급은 모조리 처형을 했고, 나치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 또한 폭력으로 탄압하였다. 이에  유대인만 탈 독일을 한 것이 아니라 반나치 운동을 하던 정치인들도 박해를 받고 독일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대표적인 인물이 1970년대 폴란드를 방문하여 유대인 게토 추념탑에 무릎을 꿇었던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였다. 나치 독일 시절 젊은 정치 초년병이었던 브란트는 나치의 집요한 탄압을 피해 노르웨이로 망명을 했다. 그리고 종전 후 서베를린 시장을 지낸 에른스트 로이터, 사민당 당수였던 오토 벨즈, 1950년대 사민당 당수를 지낸 에리히 올렌하워 등이 망명을 하였다. 또한 사민당의 유력한 정치 지도자인 쿠르트 슈마허와 파울 로베 등은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었고, 종전 후 초대 총리가 되는 아데나워는 대중과 접촉을 끊는 감금 생활을 했다. 유대인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박해를 받았지만 반나치 운동을 하던 정치인들은 강력한 저항을 하면서 망명과 강제수용소와 가택 연금과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는 ‘하이 히틀러’를 외쳤다.    


1933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나치 독일의 역사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이 만들어지고,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고, 1941년 본격적인 홀로코스트가 시작되고, 그리고 1945년 4월 30 일 히틀러가 자살하면서 그 광기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는 사실을.    

아우츠비츠

600만 명의 유대인과 200만 명의 소련 포로, 숫자도 파악할 수 없는 동유럽 슬라브인과 그리고 수많은 집시와 장애인과 동성애자 등이 이유도 없이 학살당하는 홀로코스트가 히틀러의 자살과 함께 끝났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유대인의 멸망과 열등한 인종에 대한 청소를 실행에 옳긴 ‘최종 해결’이 집행되고 ‘죽음의 행군’을 거쳐 그렇게 꿈이 거의 다 실현될 무렵, 악도 무너졌다.     


여기서 홀로코스트에 대해 자세하게 논하지 않겠다. 나치에게 학살된 현황만 얘기하겠다. 유대인 600만 명(폴란드에 살던 유대인의 90%, 유럽 전체의 70%), 소련군 포로 250명, 폴란드인 200만 명, 장애인 27만 명, 집시 22만 명, 슬로베니아인 2.5만 명, 프리메이슨 22만 명, 동성애자 1천5백 명, 여호와의 증인 5천 명, 그 외 5천 명, 전체 약 1100만 명이 홀로코스트의 공식적인 학살자 수다. 소련에 있던 유대인을 포함한 러시아인을 합하면 그 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약 2600만 명으로 추산한다고 한다. 소련에서 학살된 러시아인은 그 수가 너무 많아 계산이 안 될 지경이었다. 물론 전쟁에서 전사한 사망자 전몰자 수는 포함하지 않은 수이다. 너무나 많이 죽었다.    

게이 홀로코스트

이 홀로코스트를 구상하고 설계하고 집행한 사람은, 선전선동정치의 집행자이며 죽음의 천사라 불리던 요세프 괴벨스, 반유대주의 인종주의의 이론가 알프레도 로젠베르크, 나치 친위대와 게슈타포 사령관이며 유대인 멸망을 꿈꾼 실행자 하인리히 히믈러, 프라하의 도살자 및 피에 젓은 사형집행인이라 불리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유대인 이송 최고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 이 모든 계획을 수용소에서 집행한 말단 실무자들, 또한 인종청소를 무관심하게 지켜보았던 나치 독일 대중과 관료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장했으며 그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돌프 히틀러이다.     


처음 반유대주의가 형성된 것은 종교적인 이유였다. 1700년 전 초기 기독교가 형성되어 갈 무렵 종교적 결집을 위해 대주교 크리소스톰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예수를 죽인 자들이 유대인이며 그들은 탄압을 받아야 할 사탄이라고 설파를 했다. 당시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전파하고 기독교화한 유대인이 유럽에 살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교와 상관없는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도 상존하고 있었다. 동일한 유일신을 믿는 두 종교를 다 인정할 수 없었던 교구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유대인을 탄압해야 만했다. 하지만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은 유럽의 기독교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들 문화를 고집했으며 개종도 거부하는 개성이 너무 강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의 500년 노예생활을 거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수많은 이민족과 싸우면서 살아남았고, 마지막엔 로마의 예루살렘 대학살로 나라를 잃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범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반유대주의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지만 그런 사실을 논박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성경과 관계된 서적은 성직자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문맹률이 90%에 달했다고 하는 고대와 중세 그리고 계몽시대까지 성경은 백성들이 읽지도 보지도 못했다. 더구나 성경은 라틴어로 된 성경만이 성경 취급을 받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침투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도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기 때문이었다. 대중에겐 미사 때 성직자가 읽어주는 것을 듣는 것이 성경의 전부였다. 지금처럼 누구나 성경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이로 인한 편협한 성경해석이 반유대주의를 비판할 수 없게 한 원인 중에 하나였다.    


그렇게 천년 동안 종교적인 이유로 박해를 받아왔다면 계몽주의 시대부터는 인종적인 이유로 박해를 연장한다. 종교적인 문제가 희석되었다고 하여도 천년 동안 이어져 온 박해에 대한 인식은 이미 집단 무의식화 되어 있었다. 유대인을 박해했던 로마 가톨릭을 95개 조항으로 비판하고 종교개혁을 이룩한 루터도 말년에는 유대인을 상종하지 말아야 할 종자들이라고 힐난한 것을 보면 당시 세속적으로 인종주의가 사회 전반에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 인식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덕 고리대금업자라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표출된다. 자기들끼리만 놀고, 인간미라곤 털끝만큼도 없고, 돈 만 아는 독종으로 대중은 유대인을 자신의 인식 틀 안에 격리시켰던 것이다. 그러면서 시기와 미움과 증오심을 키웠다. 특히 이런 현상은 루터의 나라 독일에서 유독 심했다.      


유대인들이 경제적으로 무시 못 할 정도로 기반을 다져가고 있던 18세기 중엽에 이미 영국과 네덜란드는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주는 등 형식상으로는 반유대주의를 철폐했다. 이런 현상은 상대적으로 유대인에게 관대했던 칼뱅의 영향이 컸다. 물론 대중의 밑바닥에서는 우리가 중국인을 ‘때국놈’이라고 비하하듯 아직도 유대인에 대한 곱지 않은 이미지가 남아 있었다. 그런 유화적인 변화는 독일에도 영향을 미쳐 멘델스존 가문이 18~19세기에 경제적 사회적으로 성장하는 배경이 된다. 물론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멘델스존 가문은 철저하게 짓밟히지만 말이다.    


그리고 19세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시기에 독일 각계에서 뛰어난 유대인들이 나타났다. 경제 금융계는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영향력이 강했고, 아인슈타인이 나타나 물리학계를 뒤집어버렸고, 쇤베르그가 현대음악의 장을 열었고,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체계화시키며 무의식의 세계를 설파하는 등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정도의 파괴력 있는 거물들이 각계각층에 등장한 것이다. 또한 법학과 철학은 물론이고 특히 의학계에는 유독 유대인들이 많아 독일 대중과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초등학교 동기였던 비트겐쉬타인을 공부 잘하는 부잣집 유대인 아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당시 유대인은 독일 사회 저변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었다.    


이에 독일인들에게서 유대인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트리아에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히틀러가 유대인을 미워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불과 이백 년 전까지만 해도 무식하고 이기적이고 돈 만 밝히는 때국놈들이라고 멸시를 하던 유대인들이 이젠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회의 중산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에 국민적 경계심과 위기감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유의 멸시는 양태는 다르지만 민족성이 강한 국가에서 잘 나타나는 현상이다. 일본과 대한민국에서도 그런 현상은 잘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그런 분위기가 심화되면 극우적인 성향을 가진 대중에게서 원인 불명의 증오라는 괴물을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현재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혐한 현상이 그 예이다.     

'유대인은 우리 불행'

그리고 독일에서 유독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던 이유는 루터 때문이었다. 루터가 말년에 조금만 자제력을 발휘했다면 그토록 피비린내 나는 광적인 유대인 박해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스트리아 빈에서의 히틀러는 인생 낙오자였다. 육체적으로 건장하지도 않았고, 사업을 할 정도로 성격이 활달하지도 않았고, 회사에 취업해 사람과 부대끼면 살 정도로 친화성도 없었다. 따라서 떳떳한 직업을 가질 만한 변변한 조건 하나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저 엽서 정도를 그려 팔아 동가식서가숙 하며 근근이 먹고사는 삼류 화가에 불과했다. 그에겐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누구도 관심이 없는 루저였다. 세계 1차 대전이 없었다면 그는 극장 간판이나 그리면서 상업 화가로 삶을 영위했을지 모른다.     


그런 히틀러의 무의식에는 열등감이란 어떤 기운이 가득 차 있었다. 열등감이란 욕망과 분노가 강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감정적인 현상이다. 욕망과 분노는 열등감과 비례한다. 욕망과 분노가 약하다면 열등감도 비례하여 약하게 발생되고, 욕망과 분노가 없다면 당연히 열등감이 생산되지 않는다. 열등감이 없다는 것은 가슴에 분노가 없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히틀러에겐 형체가 모호한 기형적인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부모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근친상간은 신체적인 기형아가 태어날 확률이 높은 것만은 아니고 정신세계가 특이한 기형아도 생산될 가능성이 높다. 그 욕망은 형체가 불분명한, 불교에서 말하는 갈애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히틀러 자신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의식 밑바닥에 숨겨져 있었다. 에이리언이 숙주 안에서 서서히 자라고 있었으며 히틀러 자신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무언가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이 강력했지만 현실은 그것을 거부했다. 자신의 능력으로 신분을 상승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그에겐 상대적으로 열등감만 더 커질 뿐이었다. 자신의 비루한 능력과 신분 상승의 욕망은 서로 뒤엉켜 열등감이 형성되고 그것은 형체를 알 수 없는 분노라는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정신이 빈궁해진다는 것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절망이라는 정신상태와 형태면에서 같을지 모른다.    


그의 내면에서 마그마처럼 끓고 있던 분노가 마침내 찾은 표적은 바로 유대인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접하게 된 유대인들에게서, 역사적으로 보잘것없었던 유대인들이 빈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하릴없이 여러 극우적 정치 집회에 기웃거리면서 반유대주의에 대해 자의 반 타의 반 학습되었으며, 그런 것들이 자신의 궁핍한 삶과 비교되면서 시기심과 질투심이 맹렬히 타올랐던 것이다.    


히틀러의 그런 분노는 형태를 알 수 없는 모호한 증오로 증폭된다. 형이상학적으로 그 증오를 설명할 수 없다. 그냥 증오라는 현상만 존재할 뿐이다. 사실 유대인을 왜 증오하는지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홀로코스트 이후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수많은 학자들이 분석을 했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샤머니즘적’이었다는 것이다.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는 뜻이다. 히틀러가 많은 이유를 들어 유대인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인종이라고 설파했지만 그것은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선동에 불과했다. 진짜 원인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그의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세계 1차 대전은 독일 대중과 히틀러에게 새로운 독일을 여는 전환점이 되었다. 자신도 놀랐을 정도로 언변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식한 히틀러는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세계는 정치판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독일 대중의 분노와 히틀러의 분노가 만나 화학반응을 일으키자 마치 탄화 카바이드가 물과 화합하여 격렬하게 반응하듯 강력한 에너지가 만들어졌다.    


히틀러의 첫 일성은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대중화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논리는 단순했다. 유대인은 역사적으로 볼 때 루터도 주장했듯 상종을 하지 말아야 인종이다. 그 종족은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킨 주범들이며, 그 볼셰비키가 세력이 커지면 독일을 삼킬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유대인은 볼셰비키와 같으며 지구 상에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강한 아리아인이 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 강하고 새로운 독일을 만들기 위해서는 유대인과 볼셰비키의 척결이 우선이다. 이에 대중은 열광한다.    

처음엔 그런 논리는 미약했다. 하지만 대중에게 집단적 무의식화 되어 있던 반유대주의 정서를 히틀러는 집요하게 자극하여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그 촉매제가 복지와 실업자 해소였다. 세계 1차 대전으로 살기 힘들었던 대중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괴벨스를 앞세워 선동정치로 반유대주의를 부각시킨 것이다. 대중은 열광한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부터 유대인 박해는 누구도 거슬릴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 끝이 ‘최종 해결책’ 홀로코스트였다는 것은 이미 그때 예견하고 있었다.    


이런 독일 정세에 많은 지식인들이 저항을 했지만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대중은 시간이 갈수록 히틀러 종교에 매몰되어갔다. 파시즘 체제에 대중은 예속을 욕망했다. 실업률은 제로에 가깝게 되고 복지는 확장되어 배고픔은 사라지고 그렇게 천국과 같은 낙원을 만들어준 히틀러는 그들의 구세주였다. 그들은 광신도로 변하여 갔다. 따라서 대중은 철저히 유대인 탄압에 동조했고 최소한 무관심했다. 이성을 의도적으로 마비시킨 것이다. 자신의 이웃이었던 유대인이 독일을 떠나고, 돌격대와 친위대의 폭력으로 가게가 불태워지고, 게토와 강제수용소에 감금되고, 그리고 대학살이 일어나고 있을 때도 그들은 침묵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침묵은 동조와 다름없었다.     


그것은 광기였다. 카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해서 인간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원죄가 바로 광기였으며, 인간이 영혼과 감성을 가지면서 나타난 샤머니즘적 환각 또한 광기였다. 로마 콜로세움에서 노예들이 사자에게 잡혀 먹히는 장면을 보고 집단적으로 열광하는 것 또한 광기이다. 광기는 집단화되었을 때 그 효과가 핵분열처럼 극대화된다. 국가주의 체제를 갖춘 국가에서 민족성과 애국으로 대중을 결집시키고, 그것은 광기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에서 학습해 왔다.    


홀로코스트는 인간의 집단적 광기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히틀러와 독일 대중의 광기는 즉흥적으로 발생된 현상이 아니라 오랜 기간 숙성되어 온 유럽의 반유대주에서 기원한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히틀러가 실행하고 독일 대중이 묵인했지만, 유럽의 적지 않은 대중도 그에 동조하였다는 여러 정황들이 있는 것을 보면 인종주의는 단순히 히틀러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유럽의 인종주의는 역사적 배경이 확고하며, 그것은 이미 살아있는 생물처럼 대중의 내면에 보편적 무의식화 되어 호시탐탐 표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21세기 현재도 유럽에서 극우당이 득세하고, 그 당을 추종하는 극우단체들에 의해 폭력적 인종차별 현상이 백주대낮에 나타나고, 특히 축구장에서 벌어지는 노골적 인종차별 행위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유럽에서는 일상적인 현상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거대하게 집단화 된다면 그리고 그들을 열광시킬 수 있는 지도자가 나타난다면 또다시 잠재되어 있던 집단적 광기가 폭발하여 세계를 휩쓸지 모른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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